비숲2 OST Part.2 하현우-침묵 https://youtu.be/1t37gulpjUg
<6화: 수백의 절망보다, 한 줌의 희망 >
(시간 배경 2019.05.19(일) / 회상 2017년 6월 중순 주말)
간만에 제대로 푹 자서 머리가 아주 맑다. 이렇게 잘 잔 게 얼마만인가. 여진은 기지개를 쭈욱 편다.
거실로 나가보면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라곤 없고, 담요는 자라도 대고 접은 듯 곱게 개켜져 있다. ‘아침 사 오겠습니다’ 카톡만 한 장 와있다. 여진은 피식 웃으며 오케이 이모티콘으로 답한다.
이 양반 분명히 어디 씻을 곳 찾아 나갔나 봐. 어제 아침에도 그랬을 테고. 집주인이 재워준다는데 샤워 한 번을 편하게 안 해요. 물소리에 나 깰까 봐 그랬나? 차암 예의가 지나치게 바르시다니까... 여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잠시 후 여진은 젖은 단발을 톨톨 털며 거실로 돌아온다. 아침 햇살은 유난히 환하고 몸은 가뿐하다…. 털썩, 소파에 편하게 자리 잡은 여진은 이내 골똘히 상념에 잠긴다.
어젯밤, 쏟아지는 잠에 몽롱해질 즈음, 여진은 거실 창문을 열어둔 걸 퍼뜩 떠올렸다. 아직 밤공기가 차갑지…. 작게 중얼거리며 미닫이를 살살 열고 나왔을 때, 황검사는 이미 곤히 자고 있었다. 두 손을 단정히 모아 배 위에 올려놓고. 자는 모습도 딱 평소 모습 같네…. 여진은 생각했다.
반듯한 미간은 그저 평온해 보였다…. 여진은 문득 황검사가 들려준 꿈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꿈을 좀처럼 안 꾼다고 했었다. 그때 서부지검에서 함께한 이들은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일까. 잃어버린 이들은 어떤 아픔일까. 그 그리움과 외로움을 그는 어떻게 삼키고 있는 걸까. 이명의 고통 대신 꿈으로 드러나서 그래도 다행인가.
여진은 문득, 그때 그 폐건물을 생각했다. 겨누어진 총구 앞으로 돌아서던 그 표정을 떠올렸다. 함께 유서를 열어볼 때의 표정도. 여진더러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설명하기 힘든 얼굴표정을 꼽아보라 한다면 그중엔 분명 그때의 황검사 얼굴이 있으리라.
'나의 이것이 시작이길 바란다'... 그 유서의 내용은 여진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찌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창준 전 검사장의 행적과 범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여진의 시선은 냉정했다. 하여 황검사가 그를 일컬어 괴물이라 했을 때, 여진은 황시목이란 사람의 변하지 않는 공정함과 냉철함을 높이 샀다.
그럼에도 황검사가 걱정되었지. 영검사가 잘못되었을 때 쓰러졌던 그를 여진은 보았다. 무덤덤한 사람이라 해서 아무도 그 아픔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후배와 선배의 죽음을 눈앞에서 겪고도 담담하다는 이유로, 황검사 직장 사람들은 그가 비정상이라 치부할 터였다. 사람마다 괴로움을 느끼는 방식이 다른 것뿐인데...
여진은 죽은 검사장이 황검사에게 모질어도 너무 모질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 사람은 황검사를 그만큼 완벽하고 단단하기만 한 존재로 본 걸까. 황검사도 한 명의 사람, 아픔을 느끼는 사람인데.
황검사는 최빛 단장과 여진의 관계가 끝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맞는 말이다. 여진은 단장님이 다시 나아가는 걸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황검사님 선배는 이제 돌아올 수 없다. 여진과 단장님에겐 남겨진 시간이 있지만, 황검사와 이창준 검사장에겐?
영검사와의 시간도... 거기서 멈춰 버렸어. 그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영검사는 영검사만의 빛을 내며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을 텐데. 황검사는 더 칭찬하고 귀 기울이며, 더 잘해주었을 텐데. 그러나 이젠 말 한마디 나눌 수조차 없잖아.
떠난 이들과는, 남은 시간이란 게 없다. 남겨진 사람에겐 그게 그대로 끝일 수가 없는데도…. 황검사는 그때 일들을 마음속에 어떻게 정리했을까. 아니 정리가 다 되긴 했을까? 그에겐 앞으로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황검사는 현재 여진의 상황을 걱정해주고 있다. 위로해주고 있고…. 그럼 그동안 황검사를 향한 내 걱정과 위로는 어떤 형태였나. 충분했나. 여진은 늦은 밤중 갑자기 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여진은 다른 이의 역사를 함부로 짐작하지 않으며, 궁금하다고 해서 캐묻지 않는다. 상대의 아픔에 손이 닿을 때 담백하게 위로할 따름이다. 하여 그때 여진은 황검사의 심경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떠난 이들과의 과거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 그저, 또 아프면 말해요… 하곤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
여진은 문득 2차 경검협의회 날을 떠올렸다. 갑자기 덮쳐온 고통에 괴로워하던 황검사…, 여태 눈에 선한 그 모습을. 그는 서검사가 실종된 상황을 힘들어하면서도 스스론 그걸 자각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2년 전 일이 남긴 아픔을, 그는 전혀 돌보질 않고 지내왔던 것 아닐까. 스스로 보듬을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요즘 세상엔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황시목은 정반대이다. ‘내가 행복해야 해’ 그런 나르시시즘이 0%인 사람이다.
그렇게 담담해 보여도 내가 좀 더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좀 더 자세히 황검사 심경을 들어주고 위로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황검사에겐, 그가 무의식에 묻어놓은 걸 꺼내놓도록 촉구해줄, 그럼으로써 치유를 촉진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전문적 상담을 추천해볼 수도 있었다. 워낙 먼 곳에 지냈다 해도, 각자 일로 바빴다 해도, 오지랖 같았더라도, 조금 더 그 오지랖을 부려 보면 좋았어….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여진은 소파 위에서 빙글 돌아누워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본다. 환한 햇빛이 이젠 거실 한가득 들어찬다. 어젯밤의 상념을 이어가려다 말고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홉 시가 되어간다. 여진은 갸웃, 하며 폰을 집어든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황검사가 받는다. “일어나셨네요.” “어우 일어났죠. 검사님 지금 어디세요?” “어…. 바로 앞입니다.”
여진은 문득 짚이는 게 있어 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본다. 난간에 기대서서 볕 쬐던 황검사가,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이쪽을 본다. 밝은 톤 산뜻한 차림새에, 드라이기로 털어 말렸는지 머리가 평소보다 보풀보풀한 모습. 황검사가 죽 전문점 종이봉투를 살짝 들어 보이자, 여진은 그를 보며 말없이 웃는다... 자신도 모르게, 편안하게 크게 활짝. 여진이 웃기만 하자 의아한지 황검사 눈이 살짝 커진다. 여진은 계단을 훌쩍 뛰어 내려가 봉지를 받아든다. “음식 식겠다, 왜 밖에 있어요?” “전자레인지로 데우면 되니까요”, 하고 답하는 황검사 눈가에 엷은 웃음이 걸린다.
"죽 사오셨구나! 아침으로 죽 좋아해요?" 스스로의 호오를 생각해본 일이 좀체 없는 시목은, 이거 좋아해요? 류의 질문을 받으면 쉬이 답하지 못한다. “그, 누룽지랑 비슷해서 사봤습니다.” 경감님이 호탕하게 웃는다…. “그쵸 아침엔 이런 게 최고지! 와 맛있어 보이네-”
잠시 후 두 사람은 잘 데운 전복죽 두 그릇 앞에 마주앉는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조그만 부엌을 채우고, 둘은 후루룩 편하게 소리 내며 먹기 시작한다.
“원주지청은 밥맛 어때요? 검사님은 예전부터 구내식당파인거 내가 알아.” "먹을 만합니다." "그럼 그 근처 식당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강원도 음식은 안 짜더라고요.” “통영에선 좀 짰죠, 남쪽이라…. 음, 근데 원주에선 매끼 챙겨 드시죠?” "네." 시목은 끄덕여 보이다가…, 이유 있는 기시감을 느낀다. 경감님은 시목더러 밥을 잘 먹고 다니는지 한 번씩 꼭 물어보곤 했다.
잘 챙겨 드시느냐는 질문에 시목이 우물쭈물하면, 경감님은 "씁! 또 막 거르고 다니면 안 됩니다-” 하고 얼러댔다. “제대로 드셔야지! 일도 다 밥심이잖아. 그쵸? 내가 지켜봅니다아--” 경감님이 짐짓 째려보며 왓칭유 제스처까지 하면, 시목의 입가엔 본인도 모르는 미소가 담겼고, 경감님은 그걸 잡아내며 즐거워하곤 했다…. '어!! 웃었다! 내가 이거 하며는 꼭 웃는다니까-'
'잘 챙겨 드시느냐', 거꾸로 시목이 그걸 물어본 일은 여지껏 없었다. 경감님은 지금… 매끼를 잘 챙기시는 걸까? 시목은 과거 한동안 홀로 식사하던 제 모습을 떠올린다. 외따로 떨어져서 먹고 있노라면 멀지 않은 곳에서 흘끔 돌아보며 수군대던 회사 사람들. 시목은 전혀 타격을 입지 없었으므로, 중간에 급무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끼니를 조용히 마쳤다…. 그러나 경감님이 만약 그런 상황에 있다면…?
이전에 경감님은, 마음 편한 동료들과 웃으며 먹는 매 끼니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라 했다. `막 땀 흘리고 와서 둘러앉아 먹는 밥이 그렇게 꿀맛이에요. 밥 먹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구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도 들고. 맨날 밥때 놓치는 것도 상관없어요, 오히려 시장이 반찬이지!` 하며 쾌활하게 웃던 경감님….
"안 먹어요? 죽 다 식겠다!" 그 말에 퍼뜩 정신 차린 시목은, 에둘러 다른 질문들을 한다….“아침은 원래 어떻게 드십니까?”“누룽지 아니면 햇반! 사 먹을 때도 있고요. 출근길에 계란말이 김밥 끝내주는 데가 있어요.” "서대문 근처엔… 맛집이 많습니까?" "오오 검사님, 맛집 정보 수집도 해요?" 경감님은 폰을 꺼내더니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여기는 이게 맛있고, 아, 무엇보다 빨리 나와서 좋아요. 후딱 먹고 가기 딱이야…. 경감님은 전부터 `내가 또 먹을 거엔 꽤 진심이지.` 하며 호탕하게 웃곤 했다. 맛집 소개에 임하는 경감님 표정이 정말로 진지해 보여서, 시목은 조금은 안심한다. 경감님은 시목 본인과는 또 다른 -어쩌면 더 현명한- 방법으로 대처해나가고 있으리라….
여진은 방금 막 와있던 문자를 발견한다. “정검사님은 어제 짐 다 보내놓고 오늘은 몸만 출발한대요. 네 시 비행기라는데…. 검사님 시간 돼요?” “네.” “정검사 배웅 나갈까요? "끄덕- 황검사님은 진지한 얼굴로 동의한다.
여진은 기지개를 쭉 켠다. 오늘 비워놔서 다행이야, 일요일 한번 쉬어 보겠다고 어제 소처럼 일했지! 용산서 시절부터 시간 외 근무는 늘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여진은 그걸 두고 불평해본 기억이 잘 없다…. 그렇지만 오늘마저 일에 치여 정검사 배웅도 못 나갔더라면, 분명 속상했으리라.
"오후 비행기니까,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볼까 봐요." 여진은 즉각 폰을 꺼내 전화를 걸어본다. 신호음이 가는 사이, 황검사는 전날처럼 자연스럽게 그릇을 개수대로 옮긴다. "어, 두세요!" 말려보지만, 그는 고집스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고무장갑에 손을 끼운다.
*
*
*
불쌍하게 홀로 남겨졌던 황검사 차를 구출하러 들른 추모공원에서, 여진은 산책을 제안해본다. "좀 걸을래요? 약속 시각까지 꽤 남았는데." 공원 한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지 명랑한 웃음소리가 아른아른 들려오고, 어디선가 꽤 짙은 라일락 향기가 흩날려온다…. 추모공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무거움과는 이질적인 소리와 향기.
"검사님. 2년 전 6월이었잖아, 평상에서 자고 갔을 때 기억나요?"
"네" 돌아보는 황검사 눈이 살짝 커진다.
황검사는 남해로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서울에 들른다며 연락해왔었다.
"그때…. 검사님이 고 강진섭씨 부인한테 사과하러 서울 올라온다 했을 때, 나 진짜 놀랐어요. 예상을 못했었거든."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황검사의 말에, 이번엔 여진이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본다.
"그날 같이 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 혼자 방문하면 그분이 불편해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절 마주쳤던 게 나쁜 기억이었을 테니까요." "…. 같이 가자고 해줘서 고마웠지."
여진은 그날 기억의 한 자락을 손에 쥐어본다.
젊은 여성은 잠자코 방문자들을 응시했다. 그 얼굴에선 분노나 원망보단 지친 듯한 기색만 읽혔다.
“상 치르던 중에 검찰청에서 사람 왔었어요. 또다시 제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무죄는 밝혀졌으니까 이제 더 떠들지 말라고.” 당신들도 그래서 왔나요. 여성이 지친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해명해도 소용없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상처입은 사람에겐.
“의의를 제기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부실수사였습니다. 제 책임을 물으실 사안입니다.” 황검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진도 덧붙였다. “저희가 무죄 증거를 더 일찍 발견했어야 합니다...”
“억울하다고 계속 외치면, 그러면 그이가 살아 돌아오나요.” 여성은 눈을 내리깔았다. 말투는 담담했으나 말끝엔 옅은 한숨이 섞였다. 동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창을 넘어 들어와 방안의 무거운 공기와 뒤섞였다...
황검사는 뭔가 결심했을 때 나오는 버릇대로 입술을 꾹 물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부군께서 그렇게 되셨을 때의 제 처신을 사과드립니다.” 처음으로 여성이 약간의 감정을 담은 반응을 보였다. 큰 눈이 부릅떠졌고, 쏘아보는 그 눈엔 눈물이 엷게 비쳤다.
“여기 같이 오신 한여진 경감께서 제게 일갈한 일이 있습니다. 범죄로 상처받은 모든 이가 피해자이며, 상처 입은 유족을 수사기관이 또다시 상처입히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고요... 그날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의학적 결함으로 인해 제겐 공감능력이 부족하단 걸 말씀드려도... 변명일 뿐이겠죠.”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황검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가 그렇게 깊숙이 고개 숙이는 건 그때 처음 봤다. 국가가 시민에게 사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여진도 조용히 따라 고개를 숙였다....
시목도 여진처럼 곰곰이 그날 일을 돌이켜보고 있다. 고민할 때의 버릇대로 입술을 매만지며. "수사 중 고 강진섭 부인에 관해 검증해야 했던 건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이어야 했습니다. 더 둘러가야 했더라도요."
"...사과하신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요. 용서도 받았잖아요, 그거 쉬운 일 아닌데."
"용서였습니까?"
"용서였죠. 그분이, 자기 아기가 살아갈 세상에선 힘없다고 억울한 일 겪는 사람 없게 해달라고 그랬잖아요. 우리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다, 다시 한번 믿어보겠다, 그 말이었던 거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생각에 잠긴 시목의 미간이 좁아진다. 이즈음에서 두 사람은 적당한 나무그늘을 찾아 벤치에 앉는다.
"`범죄로 상처 입은 모두가 피해자다`, 경감님 말씀을 당시에 바로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추후에 이해했습니다. 제가 피해자의 감정을 공감할 순 없더라도, 최소한 상처입히는 쪽이 되진 않아야 한다, 그런 지침이 생겼습니다."
"검사님에겐 그때 이후로, 뭐랄까 스스로한테 부과한 규범이 더 늘어난 거네? 그전엔 온리 성문법이었다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검사님 대단해. 그 일들 겪었던 걸, 좋은 쪽으로 승화시켰어."
시목은 잠시 망설인다. "제가 `저 또한 상실을 겪었기에 공감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아닙니다. 여전히 저는 그런 감정들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경감님께서 피해자들에게 해주신 그런 공감과 위로를, 전 아마 영영 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법, 공감하는 정도가 다 다른 거니까. 검사님이 이상한 거 절대 아녜요! 나보고 과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어. 그리고 결국 우리 역할의 본질은 사법정의를 세우는 데 있잖아요? 관할 피해자지원센터 통해서 상담자 연결하는 게 오히려 진짜 필요한 일이죠. 마음이 아픈 거 치료, 아무나 하나? 전문가가 해야지."
"세상엔,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지, 검사님처럼." 여진은 시목 등을 톡톡 친다. "검사님은, 변하지 않는 부분만큼은 정말 굳건히 그대로고, 그런 한편 변화하는 부분도 있죠, 계속 나아가고 있어. 검사님은… 정말 좋은 검사예요." "좋은 사람이고요." 여진이 덧붙인 말에, 시목의 얼굴엔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이 드러난다.
여진이 씩 웃는다. "나 다른 사람들 함부로 평가하지 않아요. 좋고 나쁘고 판단할 자격이 나한테 있겠어요? 이건 그냥, 내가 느끼는 거예요, 검사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시목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린다.
"그건 그렇고 검사님,"
"네?"
"자기 자신도 좀 더 챙겼으면 좋겠어요. 본인한테도 조금만 더 잘해줘요."
"전…. 괜찮은데요."
"검사님이 그렇게 말해서, 또 워낙 단단한 분인 거 아니까, 스스로 잘하시겠지 생각했어요. 내가 오지랖 부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지켜만 봤고. 그나마도, 나 본청 가고 둘 다 더 바빠지고부턴 안부만 겨우 물었지만…."
여진 표정이 심각해진다. "근데 요번에 보니까 말이죠, 서검사 실종됐을 때, 힘들단 걸 스스론 모르시더라. 그게 이명으로 표출된단 건 다른 방식으로 표현을 아예 못 했다는 거잖아. 이명까진 안 가더라도, 자신도 모르고 묻어버린 괴로움이 많을지도 몰라요." 여진이 몸을 쑥 기울여서 황검사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스스로 본인은 괜찮다고만 여기니까…. 더 걱정이 되죠.."
"미안합니다." 그때의 계단참에서처럼, 미안해하는 저 표정…. "어허! 미안할 일이 아니지!" 여진은 그때처럼 -그때보다는 살살- 황검사 어깨를 탁 친다. "그럼 난 검사님한테 훨씬 더 미안하게? 나도 걱정 어지간히 시키고 있는데?"
"외계인이 있다고 믿어요?" "네." "왜요?" "공간 낭비니까요…." "여기도 마찬가지죠." 그 대화를 나눴을 때처럼, 여진은 손가락을 들어 황검사 이마 앞에 휘휘 돌린다. "요 안에, 여기 어딘가에 든 걸 스스로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걸 다른 사람한테 꼭 얘기해 보고. 뭐 나도 혼자만 꿍쳐놓은 적 많으니까 할말은 없네. 어쨌든, 말로 표현해보는 게 제일이죠! 말은 생각의 그릇이라잖아요, 담아 봐야 아는 거니까. 나도 모르게 묻혀있던 생각도 끄집어낼 수 있을지 누가 알아요?"
여진은 문득 특임팀 모임을 떠올리곤 손뼉을 탁 친다. "그러고 보니 검사님 얘기 잘 하시더만! 저번주에 특임팀 모인 날."
"영검사에 관해서만큼은… 많이 돌이켜봐서, 제 생각이 뭔지 어느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요. 당시 경감님이 주신 도움 덕분도 있고요."
"에이 내가 해준 게 뭐 있어요…. 검사님, 나랑 특임팀 사람들에게 먼저 그렇게 얘기해준 거, 정말 잘하셨어. 우리 검사님, 대단해."
여진은 옆에 앉은 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 톡톡 토닥인다….
"있죠, 그때 검사님이 속에 생각 꺼내놓는 걸 보고 영감을 얻었어. 나 상담을 받아 보려고 해요. 뭐 회사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려는 건 아니고, 나 스스로 들여다보고 지키는 거, 그 과정을 도와주는 게 전문가니까."
"그리고 검사님도, 한번 알아봤으면 좋겠어요." 조금 놀란 듯, 시목 눈썹이 올라간다.
"늦은 감이 있지만, 늦었다는 건 없으니까. 지역마다 정신건강복지센터도 있고, 또 나한테 상담센터 몇 곳 연락처 있어요. 경완이한테도, 고 강진섭씨 부인한테도 연결해줬었고. 그때 왜 난 검사님 생각을 못 했을까. 범죄로 상처입은 피해자엔… 검사님도 해당인데. 가족을 잃은 분들만큼 극심한 아픔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치유가 필요한 거잖아."
시목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 생각에 잠긴 듯….
"그러니까 검사님도 원주 가면 한번 알아보기? 그때 일, 한참 지난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아직 겨우 2년밖에 안 지난 거고, 그리고 이번에도… 놀랐잖아요."
시목이 작게 끄덕인다. "네."
"나 이거 오지랖입니까?"
"아닙니다."
여진은 작게 끄덕이며 씨익 미소짓더니, 휴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편하게 내뱉는다.
"있잖아요 검사님. 내 상황 물어봐주고, 들어준 거. 도움 많이 됐어요…. 고마워."
시목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여진 얼굴을 들여다본다. 현재진행형이잖습니까, 앞으로도 얘기해 주세요, 하고 눈빛으로 말하듯.
"나도 검사님 근황 자꾸 물어볼 겁니다! 검사님도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고. 언제든 필요할 때 말해요." 시목이 작게 끄덕인다.
여진은 문득, 자신이 여태 그대로 황검사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휙 떼기가 그래서인가, 아니면 어쩐지 좀더 이대로 있고 싶어서인가, 여진은 팔을 잠자코 놔둔다. 시목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제 슬슬 정검사님 데리러 가봐야겠네, 말하면서도 여진은 시목 등에 걸친 팔을 떼어내지 않는다. 시목은 제 어깨를 감싼 여진 손을 조용히 본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움직이질 않는다.
여진이 달래듯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곤 팔을 거두어가자, 그제야 시목은 눈을 깜박거리며 잠자코 일어난다.
"우리 검사님, 그러고보면 허리 많이 펴졌어! 전엔 막 구부정했는데."
"그러다가 또 맞을까봐요."
아하하하!!! 여진이 호탕하게 웃는다.
"정검사님 취향으로 먹자고 내가 막 밀어붙였어." "감사합니다." 민하가 쑥스러운 듯 작게 웃는다.
시목도 여진도 베트남 음식은 익숙지 않기에, 민하 추천에 따라 무난한 메뉴를 택한다. 민하가 앗, 하더니 점원에게 덧붙여 부탁한다. "고수는 따로 주시겠어요?" 정검사님, 늘 이렇게 배려심이 넘쳐서 참…. 여진이 씩 웃는다.
"베트남 음식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어요?" "대학 때 베트남에 여러 번 갔었습니다. 외국 음식을 현지에서 먹어본 유일한 경험이어서인지, 새로움에 끌리더라구요" "오오, 가서 무슨 활동 했어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학살 역사 사죄를 위한 대학 간 교류활동이었습니다. 그곳 연구자분들과 저희 대학원 선배들이랑 학술교류도 하고요." "와! 진짜 중요한 일 하셨네. 국가 차원 사과는 아직 미흡한데, 학생들이 먼저 나섰구나…." 여진이 탄복한다.
"그때 다녀와서 후기 기고했죠? 동문일보에 실린 정검사 글, 잘 읽었습니다." 시목 방식의 칭찬에 민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읽으셨을 줄 몰랐습니다…."
"오오. 그러고 보면, 정검사님도 앞으로 논문 써보실 생각 있어요? 해외연수 없이 쓰기도 하던데." 여진이 눈을 반짝인다.
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직 초임일 뿐인 제가… 자격이 될까요?" "주요 학회지 게재 승인은 어렵겠지만, 써보는 데에 의미가 있죠." 시목이 진지한 얼굴로 답한다.
여진이 끄덕인다. "맞아요, 황검사님도 임관 초반부터 꾸준히 썼잖아." 시목이 눈을 깜박이며 돌아본다. "읽어 보셨습니까?"
"혁신단 일로 읽게 됐죠. 통영에서 쓰신 거-검찰 내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의 폐단 예시 모아놓으신 그거, 단장님한테 그걸 보여드렸더니 단장님도 되게 인상깊으셨나봐. 있죠, 법제단에서 검사님 뽑아간 거 알고 단장님이 화내셨어요. 맘에 드는 자문위원 골라놨는데 검찰쪽에서 가로챘다고."
"제가 경찰쪽 자문위원으로 갈 수도 있었죠, 그러고 보면."
"그랬으면 우태하 못 잡았죠. 법제단 들어간 게 검사님 아니었어 봐, 그거 잡았겠어요?"
"역사엔 if가 없죠…." 시목의 말에 여진이 털털 웃는다. 그렇지, 지난 일 놓고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역시 우리 검사님, 맞는 말 잘하셔.
"오오오!!!" 빛깔도 다채로운 음식들이 나오자 여진이 물개박수를 친다. 시목도 신기한지 유심히 들여다본다. 다행히 두 분 다 음식이 입에 맞는 듯해서, 민하는 두 분께 맛집 한 곳을 알려드렸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해한다.
"우리가 시간 빼앗는 건 아닌가? 가족분들이랑 어디서 만나요? 정검사님 언니분도 같이 가셔서 둥지 트는 거 도와주신다면서요." "아, 언니는 부모님이랑 같이 청주공항에서 비행기 타서요, 제주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오! 그럼 공항까지 같이 가요- 바래다 드려야지!"
셋은 시목 차로 합쳐서 이동한다. 인천공항을 향하는 고속도로…, 여진으로선 꽤 여러 번, 도주하려는 용의자들을 쫓아 달리기도 했던 이 길. 지금은 정검사 배웅을 위해 이 길 위에 있다.
시목이 잠자코 운전하는 동안, 뒷자리에서 여진은 민하에게 알뜰살뜰 뭔가를 잔뜩 챙겨준다. "이건 멀미약. 먹는 거랑 붙이는 거…. 이미 챙기셨어도 넣어둬용. 그리고 초콜릿이랑 마카롱! 이 종류 좋아하시죠?" 비행시간은 한 시간 남짓인데 장거리 여행 급으로 챙겨주는 여진, 사양하면 경감님이 섭섭해하실까봐 고맙게 받는 민하.
사실 여진이 민하에게 가장 챙겨주고 싶은 건, 초콜릿도 마카롱도 아닌 이야기 한 토막이다. 민하에게 힘이 될 만한, 여진이 최근에 나름 내린 어떤 결론에 관한 이야기.
"대놓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겪다 보면... 그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보여요,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한 덩어리. 그렇게 보면 참 괴로워. 그런데 면면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마음 어느 한구석엔, 원칙을 지키는 게 맞다는 생각이 분명 있어요, 작든 크든. 그걸 다 뭉퉁그려서 저 우매하고 악랄한 무리,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절대 안 되겠더라고."
"세곡지구대 재수사 승인 안해주셔서, 새 정보국장님한테 첨부터 실망했어요. 그런데 그 후로 얘기를 나눌수록, 기본 원칙을 절대 안 어기는 분인 게 보이더라고. 다른 사람을 내가 섣불리 평가내리고 재단해선 안 되겠구나, 어떤 경우에라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
"그래서 이젠, 덩어리 대신, 스펙트럼으로 보기로 했어요. 옳음에 대한 감수성도, 행동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고, 흑백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마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을 알아가 보려고. 뭐 아직 그 사람들이 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더라도, 이젠 내가 철판 한번 깔아볼 용기랄까 의지가 생겼어요. 같이 일하려면 사람들을 알아야지."
민하는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여진의 말에 빠져들어 있다. 시목 또한 몰입하여 경청한다.
"정검사님. 내부고발 한 사람이 죄인이 되는 지금 문화는 정말이지 바뀌어야만 해요. 주눅들지 마세요, 정검사님은 어디까지나 당당한 거고, 그 곧은 용기에 공명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야. 적극적으로 찾아 보세요, 새 직장에서 꼭 멋진 선배, 동료들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참, 우리 정검사님이라면 잘 해나갈 텐데, 내가 사족을 달았나."
민하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져 있다. 여진은 조용히 손을 뻗어 민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인다.
"감사합니다, 경감님. 사람 속에서 희망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셨네요." 민하가 여진 얘기를 곰곰이 되새길 동안, 여진은 민하 손을 꼬옥 잡아준다.
"사실 그 동안 두 분을 보고 참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앞선 길에 있어주셔서 감사해요."
내내 조용하던 시목이 나직이 입을 연다. "몇 년의 경력 차이에 큰 의미는 없을 겁니다.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또 각자의 강점이 있는 거겠죠..." "맞아. 앞섰다기보단, 같이 나아가는 걸로 해요." 여진이 씩 웃으며 동의한다.
"스스로를 믿되, 스스로나 주변 이들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것 또한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나 한경감님에 대해서도요."
민하의 큰 눈이 더 커진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셋은 복작이는 카페에 들러 좀더 얘기를 나누지만... 속절없이 출발 시각이 성큼 다가온다.
캐리어 힘차게 끌고 떠나는 민하의 뒷모습을,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서서 한참을 지켜본다. 민하의 인영이 인파에 묻혀 결국 눈으로 쫓는 게 불가능해질 때까지.
여진은 문득 떠오른 농담을 던져본다. "검사님, 우리 모습이 말예요, 큰딸내미 유학 보내면서 걱정하는 부모님같지 않아?" 시목이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유학 보낼 만큼 큰 자녀가 있을 만한 나이는 아닌데요. 경감님도 저도." 빵 터진 여진의 웃음소리가 인파의 와글거림에 묻힌다.
웃느라 단발이 흐트러진 여진이 시목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 두 사람은 이제 돌아서서 인파를 헤치고 걷기 시작한다...
<6화 끝> (나아가다 시리즈 마무리)
https://bori-shrimp.postype.com/ Postype에도 연재됩니다. Daum/Naver/Google에서 '비숲2 나아가다'를 검색하셔도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공유하실 때엔 출처를 남겨주시고, 댓글 한 번씩만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리새우 드림.
민하 후일담: 외전 - '그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민하'
[나아가다/Chamomile] 외전_ 그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_민하
*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포스타입에서 읽기: bori-shrimp.postype.com/ #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무렵, 청주공항 비행기가 뜨지 못할까 봐 내내 전전긍긍했던 건 다행히도
bori-shrimp.tistory.com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비숲2 시목여진]_[Chamomile]_2화. 늦은 밤, 조그만 포장마차에서 (0) | 2020.11.20 |
|---|---|
| [#비숲2 시목여진]_[Chamomile]_1화. 안목 (0) | 2020.11.09 |
| [#비숲2]_[나아가다]_5화. 이정표 (0) | 2020.10.24 |
| [#비숲2]_[나아가다]_4화. 그리움, 그리고 반가움 (5) | 2020.10.19 |
| [#비숲2]_[나아가다]_3화. 신뢰, 그리고 걱정 (0) | 20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