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보리새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시리즈 '나아가다' 中 2화 & 3화 일부만 정민하 검사를 주인공으로 서술됩니다.
<3화. 신뢰, 그리고 걱정>
시간 배경 2019.05.17 금요일
이틀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민하는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여러 차례 선배들의 집무실로 불려 다녔다. 질책받고, 대기하고, 다시 불려가서 질책받기를 반복하면서 민하는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막말을 들었고 받아본 적 없는 눈총을 받았다.
대외적으론, 뇌물 증거는 민하가 아닌 정보국 한여진 주임이 얻어낸 거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민하는 그 과정을 '거든' 정도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민하는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일부는 '어린 게 쓸데없는 정의감으로 선배들 욕보인다'며 눈살을 찌푸렸고, 또 일부는 민하더러 ' 교활한 정보경찰에게 이용당한 아둔한 초짜'라고 혀를 끌끌 차댔다. 그 와중에 민하를 또한 고통스럽게 한 것은... 지검 사람들이 '뇌물을 받은/ 송경사의 제보를 은폐한' 이들에 대해 분노하지도 더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눈을 돌리기만 하면 오물이 없는 게 되는 것처럼 여긴다. 뇌물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그보다 내부고발이 더 큰 죄인 것처럼.
검찰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민하는 속으로만 연방 외쳤다. 경찰이 이렇게까지, 하는 문제의식으로 매일 고통받으셨던 송기현 경사님. 그분은 얼마나 아득한 절망 속에 계셨을까. 동료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무관심하다는 게 아프다. 법 집행관들인데. 정의에 입각해 세상을 봐야만 하는 사람들인데. 이전의 민하라면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빛나는 눈으로 양분을 쑥쑥 흡수하던 법관 꿈나무 민하는, 자신이 일하게 될 곳의 법관들이 기본적으로는 정의를 향하리란 희망을 가졌었다...
상사들은 민하를 불러세워놓고 지독한 훈계와 추궁으로 한참씩을 붙들어놨다. 엊그제까지 웃고 대화하던 동기들은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야유를 담은 차가운 눈빛, 너는 이제 타자다, 하는 노골적 냉대... 자꾸만 뱃속이 쿡, 하고 세게 쑤셨다. 민하는 유연한 종류의 강함을 지녔다: 굽어지고 휘어졌다가 다시 펴질 순 있어도, 버티다가 깨져버리는 딱딱한 종류는 아니다. 그러나, 민하의 마음엔 아직 껍질도 굳은살도 없다... 하여 그 부드러운 마음에 사람들의 냉대는 비수가 되어 꽂힌다.
송기현 경사 일을 수사하면서, 민하는 참고자료로서 수많은 직장내 따돌림 사건들의 파일을 읽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따돌림이란 얼마나 잔인한 건지 거듭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로 접하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구나, 따돌림은 이런 거구나. 겨우 이틀째인데 벌써 이렇게 흔들리다니. 그 사례들 속의 피해자분들은, 고 송기현 경사님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넌 그 정보국 주임한테 당한 거야. 거기도 징하다, 하필 이런 애송이를 이용해먹냐" "그쪽은 공을 세운 셈이니 승승장구하겠지. 넌 뭐냐? 갓 초임인데 제대로 찍혔어. 이러고 나가서 변호사나 잘 하겠냐?" 이런 말을 듣는 건, 본인을 향한 인신공격 못지않게 몹시 괴로웠다. 심지어 경감님은 민하의 내부고발이 본인에겐 국면 전환일 수 있다는 건 생각조차 안 하셨을 텐데. 잠깐 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믿냐, 할 수도 있지만 만난 시간이 짧다고 사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민하는 한경감님의 올곧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세곡지구대 사건 조사에 뛰어드실 때, 그 진실을 세상에 내보낼 때, 경감님은 직장 내에서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일찌감치 예측하곤 그저 담담하셨었다...
게다가 민하는 경감님을 아주 잘 아는 분으로부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들었다.
바로 저번 일요일이었다. 민하는 황검사님, 한경감님과 꽤 늦은 밤까지 얘기를 나눴다. 수사가 대거 진척되었던 만큼 같이 짚어봐야 할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급무가 생긴 한경감님은 그 늦은 밤에 야근하러 뛰어들어가셔야 했고, 민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기 방에 있던 캔커피라도 챙겨드렸다. 경감님이 먼저 떠난 후, 황검사님은 원주로 출발하기에 이미 늦은 시간인데도, 출발을 보류해가며 민하에게 한경감님과의 과거 일화를 들려줬다. 정검사가 한경감님을 신뢰했으면, 하는 황검사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눈 감아주고 침묵하니까. 누구 하나만 제대로 부릅뜨고 짖어주면 바꿀 수 있어요’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그때 저는 들이받지 말자고 했는데, 한경감님은 타협하지 않으셨어요. 수사의 본질에 천착하는 분이지, 오염된 동기로 움직일 분이 절대 아닙니다. 자기 이득만 챙기는 이들과는 정반대에 있는 분입니다."
생각보다 길어진 이야기에, 황검사님은 결국 자정 훌쩍 넘겨 출발하셨다. 깊은 밤 고속도로를 달려야 했을 황검사님. 길 조심하시라며 걱정하던 민하는, 경감님께 그랬듯 캔커피라도 챙겨드렸다. 지검에 남은 민하는 본인도 한 캔 똑 따서 들이키며 서류를 펼쳤다. 똑같은 캔커피를 마시며 깨어 있는 두 분을 떠올리자, 이런 분들을 만난 게 참 벅찼다. 그날 밤 민하는 지치는 줄도 모르고 책상에서 밤을 새웠다.
*****
믿는다, 그러나 지금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경감님은 지금 어떤 마음이실까, 어떤 상황이실까. 경감님은 자신을 포장하거나 수식하지 않는 분이다.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라 해서 스스로 적극 해명하거나 자기어필하실 분 같지 않다. 내가 먼저 저 경감님 믿어요, 하면 오히려 어색하지 않을까? 서로 잘못한 게 아닌데도 경감님과 어색한 관계로 남는 건 아니겠지...
이제 오늘의 일과가 끝나간다. 업무에서 배제되었으니 정시퇴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시키는 대로 하더라도 퇴근하는 뒤통수에 욕이 쏟아질 게다, '지검 뒤집어놓고 본인은 속 편하네', 하는 욕.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누굴까, 민하는 힘없이 그러나 반듯하게 전화를 받는다. "혹시 잠시 볼 수 있어요? 퇴근했나요, 아직?" 최빛 단장님이다. 얼굴 알려진 전직 정보심의관과 함께 눈에 띄면 민하에게 안 좋을까 봐서인지, 단장님은 지검을 벗어난 외진 골목에 차를 세워놓곤 민하를 불렀다.
"난 떳떳하지 않아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나처럼 물러나야만 하는 건 정검사 선배들이지 정검사가 아녜요. 흔들리지 않고 공직에서 버티길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지 않기를 바래요."
"한주임... 자기 안위 보존하겠다고 정검사 이용할 사람 아녜요. 한주임마저 의심하면... 사람에 대한 희망이 없어져 버려. 그러지 말아요, 믿었으면 좋겠어." 민하가 황급히 손사레친다. 한경감님을 믿습니다. 오해하지 않아요... 단장이 민하를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입을 뗀다. 옆자리에 앉은 민하는 잠자코 경청한다. 단장은 한여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려준다.
" '왜 스스로를 후려치시냐, 그딴 손 안 잡았어도 단장님은 좋은 자리 가셨다. 원하는 만큼 되셨다' 그 말을 듣는데 아찔했어요.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내 능력으로 올라와서 이 후배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었어야 했다, 하고. 내가 한여진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깊이의 실망감을 안겨준 건가, 하는 자각이 가장 괴로웠어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던들 결말이 달랐을 테니까, 계속 같이 나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근데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건, 한주임은 나랑 다르다는 확신 덕분이었어요."
"서검사 후배라면서. 마음고생 많았겠어요... 서검사 찾은 날, 구조 현장에서 한주임이 그랬어요. '이 현장까지 오면 안 되는 거였다'고. 진작에, 통영서 죽은 학생 비싼 신발을 보고 이상한 걸 눈치챘어야 했다고. 경찰로서 해야 하는 반성을 하는 한주임 앞에서 깨달았어요. 사망자 집에 간 것도 사진을 본 것도 나였는데, 내가 그걸 짚어냈어야 했는데, 그저 수사권조정에 눈이 멀어 눈에 보이는 어긋남 앞에서도 그냥 입을 닫았던 거야."
"내가 진짜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잊고 걸어왔구나 하는 각성의 계기는 한주임이었는데. 이제 비로소 진짜 봐야 할 걸 보면서 다시 한번 제대로 걸어야겠다는 그런 각성 비로소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난 이미 늦었던 거죠. 이미 저질러 버린 잘못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해야 하는 걸 했어요. 높은 자리 스스로 내려놨다고 내가 대단한 거 절대, 절대로 아니에요. 내가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을 밝히게 한 사람은 한주임이에요"
민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장이 조용히 티슈를 쥐여주곤, 민하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어깨를 토닥여준다. 뭐라도 사 먹여야겠다, 하는 단장님. 그러나 민하는 폰을 보고 화들짝 놀란 참이었다. "저어... 한경감님으로부터 30분 전에 문자 와있었는데, 제가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봤습니다." "한주임이 만나러 온대요?"
"네! 혹시 두 분 다 오신 김에 같이..." 빛이 살폿,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이젠 정검사와 한주임의 대화인걸요.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고 떠나는 민하의 등 뒤로, "지검에서 멀리 떨어져서 만나요-" 최빛 전 단장이 당부를 덧붙인다. 이번에도 단장은 민하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한다.
*****
여진은 의정부지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앞에 차를 세워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검사님, 지검에 있어요? 문자의 답장을 기다리며.
이틀 전. 증거 봉투를 모두아 건네던, 얼굴은 희게 질렸어도 눈빛만큼은 결연하던 정검사. 언론에 크게 터트리실 거냐고 묻는 민하 앞에서, 여진은 정검사가 내부고발자가 될 상황을 우려했다. 정검사는 조용히 답했다:"최빛 부장님께도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도요." 진실은 세상에 드러내야만 했고, 또한 민하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여진과 민하는 이 결말을 알고 있었다. 여진은 작게 끄덕였다. "오케이, 증거물 바로 등록하고 복사본 만들게요." 본청을 나서던 정검사의 뒷모습에, 이제는 적진이 되어버릴 지검으로 돌아가는 그 뒷모습에... 여진은 문득 가슴이 철렁했다. 꼿꼿하지만 여린 저 어깨, 이제 겨우 스물 여덟... 정검사가 괜찮을지 꼬옥 잘 들여다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도움은 별로 안 되더라도, 그래도.
그러나 그 이후로, 여진은 근 이틀 간 밤낮없이 불려 다니느라 민하를 보러 갈 시간조차 없었다. 네가 가져온 거 네가 제대로 터트리라며 의정부지검 비리 건을 여진에게 전격 일임한 정보국장님 덕분이었다. 정보국 사람들은 여진을 두고 ‘살길 찾아왔네’, ‘그 어린 검사만 불쌍하지’ 하며 연신 비아냥댔다. 그제야 아찔하게 자각했다. 자신에만 관여된 일이라면 남들이 보기에 어떤 모양새인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민하의 일이라면 다르다, 남들이 그렇게 보고 오해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민하의 용기와 곧음이 폄훼되고 있었다. 의정부지검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민하가 교활한 정보경찰에게 농락당한 둔하고 융통성없는 자, 조직에 자살골 넣은 자로 비웃음 사고 욕먹고 있다면...
여진은 자기변명을 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항상 옳은 동기로 살아온 여진은 오해를 받더라도 꿀릴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검사에게 어떻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하나. 정검사님 이용한 거 아니에요, 나 믿지요? 말하는 스스로를 떠올려보면 왠지 작위적이라 느껴졌다. 밤늦은 때의 연락은 실례라는 핑계로 정검사에게 연락하는 걸 연기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쁜 일더미에 치여서라면, 한밤중에라도 찾아가거나 전화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를 때다. 어떻게든 민하를 먼저 찾아가야겠다 마음먹고는, 전날 밤을 새우고 끼니를 전부 굶어가며 어떻게든 일감을 모두 해치워 넘겼다. 외투를 들고 달려 나가는 여진의 뒤에서 정보국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독하게도 빨리 처리하네. 기다렸단 듯이. 따돌림 그거 터트린 것도 알고보면 빅픽쳐 그렸던 거 아냐? 돋보이려고?", "자긴 이제 일 끝났다 이건가, 이 시국에 일찍 퇴근하네?", "뭐 살길 찾아왔으니 발 뻗고 자려나 보죠." 귓전에 들려오는 못된 말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이 걸었지만, 잔인한 말들 한가운데에 상처받고 있을 민하를 생각하며 여진은 속으로 소리 내 울고 있었다.
*****
지잉- 30여분 만에 민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녹양역이요? 바로 근처입니다! 역 앞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어어어 뛰지 마요 천천히 와요!"
달려온 민하를 픽업한 여진은, 든든한 밥을 먹이고 달달한 후식도 사준다. 두 사람은 한참을 대화하며 한강 변을 걷는다. 누가 어떻게 오해하느냐는 이젠 그저 잡음일 뿐이다. 정검사님, 같이 한 잔 할래요? 주량 센 두 사람은 여진 집에서 밤늦게까지 마신다. 하루가 고됐던지 까무룩 잠들어버린 민하를 여진이 옮겨 누인다. 잠든 얼굴을 보고 여진은 문득, 이렇게 앳된 얼굴을 한 어린 사람이 그 험한 일을 겪어야 하다니...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민하 우는 건 자기가 달래서 고이 재워놓고서, 여진 본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꼼꼼히 이불 덮어주고 자리끼도 챙겨주곤 조심스레 미닫이를 닫는다. 남산이 보이는 계단중턱으로 내려온 여진은, 메시지 목록에서 시목을 찾는다. 황검사님 지금은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바로 방금 전에 그로부터 문자가 와 있다: '깨어 계십니까', 문자를 보고서 여진은 바로 전화를 건다.
"검사님은 자야죠. 이번 주말도 서울 온댔잖아. 이따 일찍 출발해야 하잖아요." "아... 지금 올라가는 중입니다. 오늘은 밤을 새우려고요."
"이 오밤중에 고속도로라구요? 건강을 챙기셔야지-!" 타박하면서도... 여진은 시목을 부른다. "밤, 새더라도 같이 새요 검사님. 여기부터 와줄 거죠?"
"네."
...그러려고 일찍 출발했습니다.
원래 시목은 야근해놓고 토요일 오전 일찍 출발할 생각이었다, 이창준 선배님의 기일에 맞춰... 그러나 민하의 내부고발 소식에 이곳의 상황을 걱정한 시목은 몇시간이라도 빨리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더랬다...
담장 밑에서 올려다보며 꾸벅 묵례하는 황검사 모습에 여진은 반가움이 와락 밀려드는 걸 느낀다. 바로 저번주에 봤는데도, 한참 만에 보는 듯한 반가움.
민하가 푹 자는 동안 둘은 계단참에서 커피캔 하나씩 들고 밤새 대화한다. 아예 부엌 의자까지 꺼내 놓고 앉아서. 밤공기는 서늘하지만 왜인지 춥진 않다. 미세먼지가 유독 적어 저 멀리 가로등까지 쨍한 그런 밤이다.
정검사를 걱정하는 여진. "정검사님 용기있는거 강한 거 믿는데, 그런데도 걱정돼서 참...." 시목이 조용히 여진을 돌아본다.
시목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입을 연다. "걱정이란 게... 걱정한다고 해서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뭐가 어떻게 얼마나 힘드시냐 함부로 물어볼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켜보는 것 뿐이더라구요."
끄덕끄덕, "맞아요 정말. 내가 생각하던 게 바로 이거였어." 여진은 적극 맞장구친다. "정검사가 견디기 힘들 때마다 털어놓아 줬으면..."
시목은 계속 여진을 지그시 바라본다. 먼 곳 불빛을 응시하던 여진이 시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문득 여진은 시목의 중의적 말뜻을 알아차린다. 경감님도요, 시목의 고요한 눈빛이 말한다.
"저는 경감님이 언제나 잘 헤쳐나갈 분임을 믿어서, 미처 걱정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방금 경감님이 하신 말씀처럼, 신뢰와 걱정은 다른 극단에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요."
여진은 커피 캔을 만지작거린다. "난... 부정적인 감정은 그냥 훌훌 털어버리면 된다고,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상적으로 그런 감정이 고개를 드는...그런 상황은 지금이 처음인 거야. 그래서 그걸 일부러 부정했어요, 난 그냥 괜찮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어쩌면 나 아직, 지금 내가 어떤 방식으로 견뎌나가봐야 할까 못 정한 것 같아. 그래서 내 얘기를 자꾸 안 하게 되었던가봐. 검사님한테나, 용산서 식구들한테나... 이제 좀씩 상담도 구하고 그럴게요 나도."
여진은 기지개를 쭉-펴며 웃어보인다. "또 이렇게 한 가지씩 배워가는 거죠 뭐.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어."
"저는 더 그렇습니다." 시목의 말에 여진이 소리내어 웃고, 여진의 웃음에 시목은 엷게 미소짓는다.
"고마워요 검사님. 믿으면서도 걱정해주는 거." 이번에도 시목은 눈빛으로 화답한다. 아닙니다. 나도 고맙습니다, 늘.
이야기는 밤새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해가 떠오르는 걸 둘은 함께 지켜본다. 유난히 공기가 맑은 날이라 그런가, 투명하고 붉은 빛이 강렬하다. 해가 뜨고 나자 둘은 결국 이젠 졸음을 참기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여진은 그 전 밤도 샜었고, 시목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그럼에도, 둘 중 누구도 안에 들어가서 눈 붙이자는 말은 안 꺼낸다, 안에서 자고 있는 민하를 불편하게 해선 안 되므로.
*****
대학 때부터 민하는 아무리 달려도 다음날 여섯 시면 일어나서 씻고 공부했다. 한창 체력이 좋을 나이이기도 하지만, 여리여리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오랜 태권도 수련으로 단단해진 몸 덕분이다. 그런데도 민하는 오늘따라 유독 푸욱 자고 일곱 시 넘어 깼다. 민하치곤 늦잠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머리맡 협탁에 놓인 예쁜 물주전자와 컵. 가슴이 왠지 몽글몽글해진다. 민하는 물을 양껏 마시고는 살며시 미닫이를 열고 나온다. 경감님이 주무시나 보려 했는데... 어? 사람이 없다. 소파에 놓인 담요뭉치는 펼쳤던 흔적도 없이 그대로다. 식탁 위에는 쪽지 하나. '밖에서 바람 좀 쐽니다~ 자다 깨서 저 없어도 놀라지 마세요!:>' 누룽지를 끓일 생각이셨는지 냄비랑 누룽지까지 식탁에 나와 있지만,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식탁엔 의자가 없다... 논리적인 생각을 해보려면 정신부터 차려야지, 민하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본다. 민하는 이내 외투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선다.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등받이 없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등은 건물 외벽에, 어깨와 머리는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 곤히 자고 있는 황검사님과 한경감님. 헝클어진 머리와 푸석푸석한 얼굴들을 정남향 밝아오는 아침 햇빛이 고스란히 비추어 보인다.
민하는 화들짝 놀란다. 아, 왜 어쩌다가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걸까, 나의 영웅들. 몹시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민하는 걱정부터 한다. 추우셨겠다, 아침 이슬 맞으신 거 아냐? 게다가 경감님 목이 꺾인 각도가 다소 걱정스럽다. 깨워야 하나... 그러나 너무 곤히 자는 분들을 깨우기가 미안하다. 그래서 민하는 도톰한 담요를 가져다 아주 조심스럽게 두 사람에게 덮어준다. 섬세한 손길로 한경감님의 꺾인 고개를 바로 펴 드린다. 업어가도 모를 듯, 두 사람은 여전히 곤히 잔다. 이젠, 커다란 담요 뭉치 위로 머리만 둘 나란히 뽈쏙 나와 있는 형국이다.
가만가만 계단을 다시 올라간 민하는, 뜨끈한 누룽지 한 번 제대로 끓여볼 요량으로 냄비를 불에 올린다.
<3화 끝>
#오마주_시즌1_여진이 자는데 시목이 차마 못 깨웠던 장면
https://bori-shrimp.tistory.com/ 티스토리 블로그에도 연재됩니다. Daum에서 '비숲2 나아가다'를 검색하셔도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공유하실 때엔 출처를 남겨주시고, 댓글 한 번씩만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리새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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