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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숲 시목여진] 2차 창작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비숲2]_[나아가다]_5화. 이정표

by 보리-새우 2020. 10. 24.

I Wish I Would Stay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Ambience, NZ ASMR

https://www.youtube.com/watch?v=zHMDDpVvFY0&feature=youtu.be


<5화. 이정표, 따르고 싶었던 사람>

최빛을 생각하는 여진, 이창준을 떠올리는 시목 (시간 배경 2019.05.18_이창준 전 수석 기일 )

 

시목은 카페 주소를 찍어 보낸다. 서검사 실종 수사 중엔 자주 드나들었던 경찰청이지만, 여진의 내부고발 이후 그는 그 근처에도 안 간다. 검사와 함께 다니는 걸 정보국 사람들이 본다면 여진을 향한 눈초리가 더 살벌해지리라... 그는 본인이 따돌림 당할 때는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없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건 한경감님의 일이다. 

   늦은 시간이라 그럴까, 카페에 사람은 거의 없다. 여진과 눈이 마주치자 시목은 테이크아웃 봉지를 살짝 흔들어 보인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서검사 차로 합쳐서 이동했다면서요. 벌써 운전해도 되나..?"  "여러 가지를... 빨리 다시 시작하는 게 서검사에겐 자존심의 문제인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타 줬어요? 위험했던 거 아냐?" 시목은 잠자코 돌이켜본다. "크게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참... 회복이 빨라서 다행이네. 마음 졸이며 찾던 게 엊그제같은데" 여진의 말에 시목이 살짝 끄덕인다. 

 드디어 집이다- 여진은 운전하는 동안 작게 흥얼거린다. 시목은 잠자코 운전석의 여진 옆얼굴을 본다. 여진이 시목의 이명에 대해 설명해주던 그 날에도, 시목은 이렇게 옆자리에 타 있었다... 

  '여전히 실마리는 안 보이지, 일은 다른 지검으로 넘어갔지, 끝나고 서에라도 들르려고 했는데 협의회는 축축 늘어지지, 그래서 너무 신경 쓰다 보니까, 머리 말이에요.' '아닌데요?' '통영에서도 계속 아팠어요?' '아뇨, 거기선...'

  "저... 2차 협의회 날에요. 제가 서검사 실종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다 하셨었죠" 

 "어유... 그때 힘들었죠."  

 "잘 생각해봤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씀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눈이 커진 여진이 살짝 돌아본다. 

 "저는 이명의 이유를 생각해본 일이 잘 없었습니다. 그저 빨리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사라지고 나면 그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어요." 살짝 끄덕이며, 여진은 진지한 눈빛으로 듣는다. 

"지난 일도 돌이켜보게 되더라구요... 2년 전 일이요. 후암동에서 그 살인이 일어나던 날... 박무성을 찾아가서 이창준 전 검사장 비리 증거를 받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이명을 느꼈습니다."  빨간불이어서, 여진이 차를 세우고 시목 쪽을 본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작년 통영지검에선... 계속 괜찮았다고 했죠?"  "네." "아아 난 또... 통영에서도 그, 전 지청장 비리 잡으셨잖아요. 사람들이 막 뭐라 그랬을 것 같아서. 그... 예전에 청주에서도요?" "네... 청주에서도 그렇고 다른 곳에선, 적어도 상부 비리와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시목이 거친 지검들 중 몇 곳에서 내부고발을 했는지 여진은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이네... 그치만 이명까진 안 가더라도, 내부고발에 뒤따르는 상황... 검사님도 어떤 형태로든 힘들었을 텐데."

 시목이 잠시간 곰곰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연다. "... 전 따돌림과 냉대에 영향을 안 받습니다. 혹자는 '무디다' 또는 ‘노여움을 안 탄다’라고도 표현하더군요. 전 그저... 운이 좋은 건지도 모릅니다."

"...경감님은 저와 다르세요. 사람 안에서 희망을 보시고, 또한 사람을 읽어내는 예리한 감수성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가 함부로 짐작할 순 없지만, 실망... 을 하실 테고요. 제가 어떻게 드릴 말씀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엇도 없네요."

우리 검사님... 본인 얘기 들려주다 말고 왜 내 걱정부터 합니까.  여진은 찡한 표정으로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시목을 정답게 탁 친다. "무스은! 도움 되죠, 도움 되고말고!! 저번에도 이렇게 차 타고 있었는데, 나한테 말해줬잖아요? ‘전엔 미루는 분이 아니었는데’ 하고... 검사님 고마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여진은 엑셀을 밟기 전 시목 쪽으로 몸을 쑤욱 돌려 잠시간 눈을 맞춘다. 

시목은 잠자코 여진 옆얼굴을 살핀다. 제대로 위로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에, 경감님은, 본모습을 되찾길 촉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응답한다... 동문서답인가, 우문현답인가. 나 하나도 안 변했죠? 스스로에게도 확신을 더하듯 말하던 경감님을 떠올리며... 시목은 원주로 가기 전 만났던 파전집에서의 그 눈빛을 한다. 어느 새 남산 부근이다. 여진이 차를 세우기까지, 시목의 시선은 계속 여진을 향한다. 

  도착! 쾌활하게 차 문을 탁 닫더니, 여진은 시목 쪽을 돌아본다. "있잖아... 검사님도, 아예 영향 안 받는다고 너무 단정 짓지 말아요. 언제라도 쪼오금은 힘들 수 있잖아, 그럼 말하는 거다?" 아프면 말해요, 병원에라도 옮기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시목은 대답 대신 술만 삼켰다. 그는 이번엔, 잠시 망설이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여진은 앞서 걷다 말고 시목을 또다시 돌아본다. "전에 그랬잖아 검사님이, 검사님은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대신... 그저 성문법에 의거해서 살아왔다고. 그런데... 그분한테 희망을 걸었던 거고 그래서 아팠던 걸까. 아까전에 얘기해준... 2년 전 이명이요."

 시목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느릿느릿 답한다. "... 아마 그랬겠죠. 저 스스로조차 몰랐더라도요." 시목의 미간이 좁아진다. "말씀처럼 저는, 사람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한 사람에 대해 이정표, 라는 단어를 쓴 일이 있습니다." 여진이 발걸음을 아예 멈추고 경청한다. 시목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간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었습니다. 검찰은 볼 것도 없이 정부편이다, 누구나 이미 결론 내린 재판에서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인 한 선배, 가 있었습니다. 그 날 전 앞으로 어떤 검사가 되어야 할지의 이정표... 를 세웠습니다."  "존재만으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분의 변해가는 모습이... 검사님을 많이 실망시켰겠어요. 어떻게 느꼈는지 내가 함부로 짐작할 순 없지만... (여진이 시목의 사려깊은 멘트를 인용한다) " 

시목이 미세하게 끄덕거린다.  "왜 사람의 지향점과 특질이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해야만 하나, 성문법처럼 굳건히 그대로일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 제가 실망, 이란 걸 느껴왔었던가 봅니다."

 "검사님도 많이 힘들었겠어... 존경할 수 있는 선배였는데, 실망하는 거..."

 시목이 예의 그 눈빛으로 여진을 조용히 응시한다. 

 "저보다... 경감님은 지금 현재진행형이시잖습니까." 

시목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오롯이 충실한 사람이다. 하여 그는 자신의 과거보다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현재를 생각한다.

둘은 계단 중턱에 다다른다. 단장을 찾아가기 전 그곳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던 때처럼, 여진의 눈길은 멀고 흐린 불빛들 사이를 헤매고 다닌다. 

"난... 아직도 단장님이랑 여태 제대로 얘기 못 해봤거든? 터놓고 얘기하려면 아직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나도 단장님도."... "근데... 정검사님이 그러는 거야. 단장님이 경감님을 높이 사시는 걸 느꼈다고... 그래서 못 참고 막 캐물었어요. 뭐라 하셨는지 너무 궁금해서."... "단장님이 그랬대, 본인이 떳떳하게 이 후배 앞에 있었어야 했다고, 근데 이미 늦었다고." 후우... 여진이 무거운 숨을 뱉는다. "난 모르겠어. 내가 단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내가 표현도 충분히 못 했는데."

여진은 먼 남산을 응시하고, 시목은 여진의 옆얼굴을 응시한다. 골똘히 생각하면서 경청하는 시목. 

"그때 그렇게 결정을 하셔서, 정말 너무 힘들면서도... 안도했어요. 내가 본 단장님다워서. 단장님을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어서." 그 말에 시목이 조용히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나한테 큰 의미를 두셨다는 게, 날 꼭 남아서 일해야 할 사람으로 보셨다는 게... 그게 진짜라면..."  여진이 손끝으로 제 미간을 꾸욱 누른다.

 "그게 너무 무거워. 내가 옆에 없었더라면 그분은 살던 방식대로 계속 살았을까? 높은 곳에서 계속,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치열하게...? 그분이 계속 그러셨다면 괴로웠겠지만... 이렇게 된 것도 괴로움이 절대 덜하지 않아요. 내가 그분 커리어를 끝냈다는 게 너무..." 

시목은 계속 잠자코 여진을 본다... 시목도 같은 종류의 괴로움-에 해당하는 모종의 감정-을 공유한다... 사람들은, 황시목이라는 후배가 없었다면 이창준은 그런 선택 안 했다고들 말한다. ‘이창준이 왜 뛰어내렸는지 알겠네’ 우태하가 (객관적으로 봐도) 무례하고도 불쾌한 그 언행을 했을 때, 시목은 제 속에서 분노에 가까운 뭔가를 느꼈다. 변명의 가치도 없는 몰이해였다. 그러나, 시목이 있었기 때문에 이창준이라는 사람이 그때 죽었다는 그 생각만큼은 시목도 모르는 사이 그의 심중에 괴로움을 가했다. 공감능력 부재, 교감 불능... 일부 사람들은 대쪽같다 여기지만 시목 본인은 결함이라 여기는 요소들, 그로 인해 예외적인 존재인 시목 본인이 존재했기에... 그랬기에 이창준은 그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고는 끝내려 그가 그린 그림... 처음부터 그 그림엔 황시목이 있었다.

  괴물. 망설이지 않고 시목은 이창준을 괴물이랑 칭했다. 시목이 만일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시목의 냉철함만 그대로라면, 그 냉철함은 그가 괴로움에 잠식되지 않도록 방지했을 것이다. 하여 그는 그때도 지금도,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다: 시목의 존재는 어떤... 촉매제였을 뿐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선배님의 그 선택은,  본인 안에 이미 있던 답을 현실로 끄집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지막에라도 바로잡으려는, 타인을 해치고 자신을 망가뜨려서라도 사회에 변화를 남기고 사라지려는 몸부림.

시목이 입을 연다. "그 분 안에 있었을 겁니다. 그 결정 하실 수 있었던 이유요." 

여진이 돌아본다. 

 "최 전 단장님이 본인 의지로 지켜온 고유한 가치들이 있었고, 그걸 지켜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한경감님이 가까이 계셨어도...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빠르든 늦었든, 본모습... 을 되찾으셨겠죠?"  여진이 눈을 크게 뜬다...

"네."  시목이 확신을 주듯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서장이나 지방청 과장 등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시목은 생각한다, 이창준 전 검사장과 달리 최 전 단장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단장님이라면... 다시 시도하실 거라 믿어요. 쉽게 꺾이는 분 아니고. 또 마음먹으면 하는 분이니까." 여진이 약간 힘을 얻은 듯해서, 시목의 얼굴에 미세한 안심의 표정이 떠오른다.

"같이 일한 건 1년 남짓한 시간이지만 사람을 알기엔 충분했어요. 처음엔, 카리스마에 반했어요. 본인이 하는 일에 확신을 늘 갖고 계시고. 정말 매번 부단히 노력하고 다각도로 검증하고. 아니, 사람이 멋진 구석이 계속 나와, 매일 새롭게."   "스스로의 능력에 진짜 확신이 뚜렷하고, 본인이 조직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잰지 너무 잘 아시더라고요. 근거 있는 자신감! 그래서 난 그분 야심도 멋있어 보였어요. 나랑은 다른 타입이시구나 한 번씩 느끼긴 했지만, 사람이 자기랑 똑같아야 존경하나? 나랑 검사님도 안 똑같잖아 그쵸?"

"네." 시목이 끄덕인다.  

"난 내가 사람을 잘 본다고 자신하진 않으려 했어요. 그것도 오만이잖아. 그런데도, 단장님을 계속 들여다보고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니, 내가 단장님을 이제 꽤 잘 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단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걸 옆에서 보면, 이분을 움직이는 동기는 야심뿐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곤 했어요. 직위, 상부 평가, 이런 것만 중시하신다 싶은 거예요. 그 왜 있죠 사극에서라면 절대 귀양 안 가고 요관요직에 따악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은 주도면밀한 야심가 타입."  "그런데, 그러다가 한 번씩 진짜 이분이 드러나는 거예요. 진짜 경찰 모습이. 오히려 평소의 모습이 겉모습 같을 만큼. 신념이 정말 확고한 분이구나. 이분은 진짜구나... 싶어지는 거예요." 시목이 조용히 끄덕인다. 

 "필터를 걷어내고 냉정하게 본다면, 내가 본 기간의 단장님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셨던 게 사실이죠. 근데 난 의심하지조차 않았어요.  단장님 제일 강력한 동기가 야심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선을 넘을 분은 아니라고 확신했어요. 남재익 아들 일, 써먹으려고 일부러 묻어두신 거 알았을 때, 그때 처음으로, 뭔가 어긋났다고 깨달았어요. 근데 결국... 결국 나도 따라 입 다물었어요. 미루면 안 되는 걸 미뤘어요. 단장님 탓 안 해요, 내 선택이었으니까. 진짜 단장님을 존경한다면 그때 입 다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상황이 어떻든 박차고 나오는 거였어."

 "그때... 검사님이랑 둘이 우부장 방에서 나오고... 내가 취해서 단장님 앞에 갔거든? 한바탕 했지. 난 그때. 그분이 우부장 만나고 오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그쪽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그래서 한없이 실망했어요." 

시목이 멈칫, 잠시 고민하더니 묻는다. "그...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진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뇨. 그때 단장님은 이미 결정하셨던 것 같아. 다 밝히기로.”  "그다음 날에 단장님이 직접 모든 걸 자기 입으로 밝히셨을 때, 그때 깨달았어요... 아, 저게 내가 알고 있던 진짜 단장님이다, 그럼 그렇지, 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할 건 꼭 지는 게 원칙인 분이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갈팡질팡하는 건 그분 방식이 아니고. 단장님은 그날 경찰청을 나서기 전에 이미 결심했을 거야, 그걸 발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생각이 많으셨을까. 생각이 많아서 늦게 오셨겠지... 우부장 따위랑 모의하다가 온 게 아니었어요” 

시목이 끄덕거린다. 안도, 에 해당할 법한 그 표정이 보다 뚜렷해졌다. 단장이 여진의 마음에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걸까.

  “혹자는 그래요, 치밀한 사람답게 상황을 다 분석해보고 그런 거라고. 그렇게 밝히는 게 차선이다 하고. 검사님이랑 난 반드시 박광수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거였고, 전 정보국장은 단장님을 물고 늘어질 거였으니, 스스로 밝혀야 본인을 지킨다고... 아녜요, 난 아닌 걸 알아요. 진짜 주도면밀한 그 분 모습대로라면, 내가 봐온 그 ‘겉모습’대로라면... 당연히 날 감방에 넣어서라도 자리를 보존하셨겠지, 계속 위로 위로 가셨겠지.” 

“저도... 동의합니다. 최빛 전 단장이 어떤 분인지 말씀하시는... 경감님의 안목을 믿으니까요.” 

  여진이 시목을 돌아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빛만 주고받는다. 위로... 이게 최고의 위로가 아니면 뭘까. 황검사님은 왜 본인이 위로가 되어주질 못한다고 생각할까. 고마워요, 여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일견 슬퍼 보이기도 하는 미소가 잔잔히 떠오른다.  

시목이 덧붙인다. “경찰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일이기도 하셨을 겁니다. 우부장의 증거조작, 최부장이 아니셨다면, 결국 묻혔을 겁니다. 우태하가 죗값을 치르게 하려면, 그리고 이런 일이 또 없게 하려면... 그런 의도도 분명 있으셨을 겁니다.” “한경감님께서 보신 최단장께서라면... 서동재 검사가 목숨 잃을 뻔한 일 앞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겁니다.”

 여진은 서검사 구조 현장을 떠올린다. ‘이 현장까지 오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말은 여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었고, 동시에, 단장님이 여진 마음속 소리를 듣길 바라서 나온 말이었다. 단장님은 참경찰인데 왜 본질을 벗어나서 걷고 계실까, 분명 가장 처음 통영 사망자 집에 가신 건 단장님 아니셨나. 그 예리하고 치밀한 분이 어째서 어긋난 걸 놓치셨나. 수사권조정, 권력, 승진, 그런 본질에서 벗어난 동기가 그토록, 그렇게까지 강하셨나. 그래서 그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때 단장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게다가 이 와중에 퍼포먼스로 정복 입고 오신 건가 싶어서... 여진은 그 짧은 순간에 단장님에게 실망했다... 바로 그때 서검사가 발견되었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더는 곰곰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진은 이제야 깨닫는다: 단장님도 같은 생각이셨겠구나. 단장님의 침묵으로 한 생명이 꺼질 뻔했던 일. 그게 단장님 자기반성의 계기 중 하나였을까...

 

“나보고 막 끌어주겠다고, 이거 입 다물면 이번엔 본인이 날 끌어주겠다고 그래서, 내가 진짜 폭발했거든요. 근데... 이젠 알아요. 단장님이, 내가... 내가 흔들릴까 봐 그러셨던 거였어, 일부로 비열한 모습 냉혹한 모습 보여줘서 내가 진짜 일말의 기대도 다 버리도록”  “ ‘니가 나 끌어내리는 일은 없어’ 그러셨어요. 그때 난 그게, 어떻게든 이 자리 쥐고 하던 방식대로 할 거야, 그런 소리로 들려서, 너무 실망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뒤돌아 떠나버렸어... 근데 이젠 알아요, 나는 나 스스로 끝낸다, 네가 끝내는 거 아니다... 그런 말씀이었겠죠. 아까 검사님이 한 말도 그런 뜻이죠? 답은 단장님 안에 있었다고 한 거."

맞습니다... 시목이 눈빛으로 답한다.

시목은 그 빈 법정에서 이창준 검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넌 나를 여기 세울 수 없어, 죽어도”

시목의 시선은 잠시간 황망히 허공을 헤매고, 눈꺼풀은 빠르게 깜박인다. 그러나 이내 그의 시선은 다시 원래 자리로 -여진의 옆얼굴로- 돌아온다. 

 그때 그 접견실에서처럼, 한경감님의 큰 눈이 붉다. 경감님이 천천히 슬픔을 흘려보낼 동안 시목은 잠자코 옆을 지킨다. 곱게 접은 여행용 티슈를 건네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문득 시목은 난간에 기대어있는 경감님의 팔꿈치를 -팔꿈치만- 조심스럽게 톡, 톡 토닥이기 시작한다. 통영살인법 취조 중 끓어오르던 그녀를 진정시켰을 때처럼.

  "아 참! 그거 꺼내 봐요!"  여진이 문득 테이크아웃 봉지를 떠올린다. 캐모마일티 두 잔은 이미 식어버렸다. 여진은 새하얀 머그잔 두 개를 꺼내더니, 노오란 찻물을 쪼로록 담아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1분 15초... 시목은 유심히 지켜본다. 

 "이런 방법도 있군요." 시목은 여태 음료가 식으면 식은 대로 그냥 먹어왔을 뿐이다.

 여진이 털털 웃는다. "뭐든지 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죠." 시목이 조용히 끄덕인다.

 

따끈한 차를 손에 쥐고, 여진은 다시금 곰곰 생각한다. "어쩌면 이제... 단장님이랑 얘기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제대로 얘기를 나눠봐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 전 단장께도... 필요한 일일 겁니다."  그 말에, 여진이 찻잔에서 눈을 떼곤 시목을 본다.  

 "경찰로 어떻게든 복귀하실 가능성이 높겠죠, 아니, 어느 길을 가시더라도, 경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건, 그분에게 야심을 넘어선 동기를 부여할 겁니다. 본질적 가치에 더 집중하도록요."  

최단장께 경감님이 큰 의미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괴로움이 아닌 희망으로 여기시면 좋겠습니다... 

시목이 덧붙인다. "상하 관계와는 무관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은 쌍방향이니까요. 경감님은 분명... 가장 좋은 종류의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분입니다." 

"내가요? 음.... 검사님이야말로. 검사님, 선배들한테 좋은 영향 미쳐오신 걸 거예요. 남들이 뭐라 하든."  

그 말에 시목의 얼굴에 다소 복잡한 표현이 떠오른다. 여진이 얼른 말을 이어나간다. "그전번에... 서검사 병동에서 강원철 전 지검장님을 만났거든요. 검사님을 막 칭찬하면서, 본인이 황시목이한테 참 고마워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강 지검장이 제 얘기를 하셨어요?"

    "네. 한동안 스스로 눈을 가리고 계셨대요. 이런 건 적당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대. 이 위치에선 이게 당연한 거지 하고 그런 걸 내면화할 뻔하셨대. 그래서 검사님이 직언을 해준 게 지나고 보면 참 고마우시대요. 이 자식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말하는 건 참 싹퉁머리 없는 와중에, 그 내용 하나하나가 확확 꽂혀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줬다고요." 시목의 표정이 퍽 부드러워진다. 눈으로만 살짝 웃는 듯 뭔가를 회상하는 듯... "오늘 잘 만나 뵙고 왔어요?" "네. 편안해 보이시더라구요" "가만있자, 우리도 이제 편안하게 쉬어야지. 졸리지 않아요?" 

  뜨거운 캐모마일 차의 효과일까. 대화에 몰두하느라 여태 피곤을 잊었던 두 사람은, 이제야 비로소 졸린 눈을 한다. 잘 자요, 미닫이를 도로록 닫기 전 여진이 다정히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시목이 소파와 담요를 가리키며 살짝 목례한다. 여진이 후후후 소리 내 웃는다. 여진이 이만큼 진심으로 편안한 웃음을 띄우는 건 꽤 오랜만이다... 오늘 밤은 정말, 완전 푹 잘 수 있겠다아, 여진이 중얼거린다.

 

 

 

 

 

<5화 끝> 

 


https://bori-shrimp.tistory.com/  티스토리 블로그에도 연재됩니다. Daum/Naver/Google에서 '비숲2 나아가다'를 검색하셔도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공유하실 때엔 출처를 남겨주시고 댓글 한 번씩만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보리새우 드림. 


 

<비밀의 숲 2 대본집> _이수연 작가님_ 작가의 말 中

    "황시목 역의 조승우 배우님은 저한텐 그때의 표정이 제일 깊게 각인됐습니다. 구치소 정보국장 앞에서 여진에게 향해지던 옆얼굴이요. 사실 조승우 배우님이야 나오는 모든 장면이 명연기인지라 하나만 꼽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여기서는 좀 각별했어요."

   "시목이는 누군가를 취조하거나 조사할 때 굉장히 면밀히 관찰하는 사람이라서 상대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는데 여기선 중요한 흑막이 드러나는 부분임에도 여진이가 상처받겠구나, 깨닫는 순간 여진이만 보잫아요. 실체적 진실을 최우선으로 해온 사람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는 것, 사람으로서 시목이가 여진이를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매우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캡쳐 사진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e_p2xwiS9Rw&t=1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