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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숲 시목여진] 2차 창작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비숲2 시목여진]_[Chamomile]_2화. 늦은 밤, 조그만 포장마차에서

by 보리-새우 2020. 11. 20.

*비밀의 숲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Postype에서 읽기: bori-shrimp.postype.com/post/8386686


2화. <늦은 밤, 조그만 포장마차에서>

 

https://youtu.be/3dTugvzECp8

  

 

 

시목은 새벽에 문득 깼으나, 다시 잠을 청하지 않았다. 그는 창 앞에 서서 칠흑 같던 어둠이 서서히 걷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어슴푸레 동이 터 와서 마침내는 아침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목은 이따금 방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여본다. 아직 잠잠한 걸 보면 경감님은 늦게까지 곤히 주무시나 보다. 많이 피곤하셨을 게 분명하다.

 

  

 

 

어젯밤, 한경감님의 두 눈은 한껏 반짝반짝 빛을 발하였으나 눈 밑으론 그림자가 퀭했고, 시목은 그로부터 수면부족과 피로를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최근에 야근을 몇 번이나 하신 걸까? 시목더런 밥 잘 챙기라시던 분이 본인은 도통 잠을 안 챙긴다.

 

시목은 침대를 권했지만, 경감님은 극구 반대했다. `에이! 검사님도 울 집 오면 거실에서 잤잖아!!` 난 여기서 잡니다아- 하는 선언과 함께 경감님은 담요를 번데기처럼 둘둘 말고는 소파를 점거해버렸다. 담요 속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일순 잦아들기에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경감님은 웃다 말고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오죽 피곤하셨으면….

 

시목에겐 난감한 순간이었다. 경감님 의사를 존중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딱딱한 소파에서 주무시게 둘 순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은 연식이 오래된 탓에 거실엔 밤이면 외풍이 든다…. 시목은 고민 끝에, 경감님+담요 뭉치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올려 본인의 침대로 옮겼다.

 

생수와 숙취해소 음료를 잔뜩 사다가 머리맡 탁자에 도열시켜 놓았다. 따끈한 보리차 보온병도 곁에 두고, 같이 사온 세면도구들은 새 수건, 편한 옷가지와 함께 눈에 띄는 곳에 두었다. 본인이 쓰던 수건, 칫솔 등은 싸악 걷어다가 치워놓고, 바닥엔 이미 먼지 한 톨 없음에도 괜히 한 번 더 싹 닦아놓았다.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시목은 담요 누에고치 속의 경감님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온통 둘둘 제대로 말아놓으신 통에 이마까지만 겨우 보였다…. 다소 숨이 막히시리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그는 담요를 살살 풀어놓았다. 혹여 잠을 깨울까 저어되었으나, 경감님은 깨는 대신 살짝 뒤척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 앞에, 시목은 흠칫 놀라듯 멈춰 버렸다. 주무시는 분을 이렇게 보면 결례겠구나, 싶어 그는 그대로 조용히 방을 나섰다.

 

시목은 잠깐 스쳤던 장면도 사진처럼 선연히 기억한다. 본업에서 참으로 유용한 기능이다…. 그가 촉을 한껏 세운 상황일수록, 시목의 뇌는 영상을 자세히 저장한다. 방금 본 경감님의 잠든 얼굴은 어째서 그토록 자세히 저장된 걸까. 사건 현장도 비리 자료도 아닌데, 어째서 가장 작은 디테일까지 모두 기록된 걸까. 무의식이 관여한 건가…. 평화롭게 내려앉은 눈꺼풀, 눈가의 작은 주름, 입가에 담긴 미소까지…, 결례라 할지라도 이 이미지를 지울 도리는 없다. 

… 꿈을 꾸느라 웃으셨던 걸까? 경감님은 분명 다채롭고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분이다. 

경감님의 잠이 평화로워 보여서 다행이었다. 시목에게 집이란 늘 혼자만의 적막한 공간이었는데, 지금 한 사람이 -무려 경감님이- 그런 시목의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 이 사실이 문득 몹시 놀라웠다.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까지, 어쩐지 경감님의 고른 숨소리가 귀에 선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거실에서 짧게 잤음에도, 왜인지 시목은 머리가 아주 맑다고 느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시목의 표정 또한 맑고 부드럽다. 그는 제 손에 고이 들린 한 장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다.

 

 

 

"짠 - 선물! 기차에서 그려서 쪼금 흔들렸어요, 그래도, 뭐." 포장마차에 앉자마자 경감님은 품에서 경찰 노트를 꺼내 한 장을 부욱 뜯어냈다. 시목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서는, 구겨지는 게 싫어서 조심스럽게 쥐고 들여다보았다. 얼마만의 `선물`인가.

 

이번엔 만년필을 쓰셨는지, 새까만 잉크가 종이에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군데군데 살짝 번진 투박한 곡선들…. 큼직하게 그려진 형상은 한 사람의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동글동글한 눈과 얼굴, 짧은 머리카락.

 

"경감님이시네요." "오오! 알아보시네! 실제랑 딱 닮았다는 뜻이죠? 완전 똑같지!"

 

시목은 그림을 들어 경감님 얼굴 옆에 나란히 놓고 번갈아 보았다. "…." 그가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꼬옥 다물어버리자, 경감님이 째릿 노려봤다.

 

"선물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며 시목은 자신도 모르게 꽤 활짝 웃고 있었나 보다. 경감님이 째려보는 걸 그만두고 씨익 웃었다. "웃는 게 예뻐서 봐 드리는 거야-" 하며.

  

 

"나, 요즘은 그림을 진짜 가끔 그려요. 그러니까 그거 특별한 거야"

 "요즘은 그림 안 그리십니까?" 그때의 질문에 대해,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답이 돌아오려는 참이다. 

 

 평소대로 소주부터 한 잔씩 나눈 후, 경감님은 생각에 잠길 때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시목은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여 경청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자 한껏 집중해서.

 

"난 있죠, 본청으로 옮길 때….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난 항상 형사가 되고 싶었어요. 강력팀에 있었던 8개월, 다사다난했지만 가장 나 자신일 수 있었어요. 근데, 계급 하나 오른 게 뭐라고, 본청으로 파견 보내겠대 날. 처음엔 말도 안 된다 생각했어요, 아직 형사 일 배울 게 한참 남았는데."

 

"그치만 결국…. 내 선택이었어요. 계급 상관없이 용산서에서 따악 버티고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었어. 근데도 본청을 택한 거니까."

 

"서장 잡아넣은 사람이라는 꼬리표 말고 내 능력을 잣대로 날 봐주는 곳에 가고 싶었던 것도 있죠. 근데 그것보다도, 기회가 주어진 김에 중앙 행정을 경험해야겠다 싶었어요. 지금 정책들에 바꿀 점이 얼마나 많은질 현장에서 매일 느꼈거든요. 그래서 정책개발부서로 들어갔죠."

 

"애초에 수사권조정 일로 불려간 거라, 가자마자 바로 그쪽으로 투입됐어요. 그렇게 6개월쯤 됐을 때. 최빛 선배님이 오셨죠, 수사혁신단이 꾸려졌고. 그분 덕분에, 행정경찰의 존재 이유를 비로소 피부로 느꼈어요. 효율성을 책임지고, 더 나은 조직을 만드는 거. 어느 순간부턴… 내가 수사 뿐 아니라 행정업무에서도 의미를 꽤 느낀단 걸 알았어요."

 

경감님이 갑자기 포슬포슬 웃었다. "그때 난요, 내 안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을 부분은 어디까지고, 변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진가, 그걸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실험을 좀 해봤지. 나 그래서 덕질 취미까지 바꿨다? 함 들어봐요."

 

"만화책들은 본가에 데려다 놓고 한동안은 일부러 그 빈자리를 느꼈어요. 그러다가 마블이 훅 하고 눈에 들어온 거야. 반해 버렸지." 마블이면 대리석, 변성암의 한 종류…? 시목이 알아듣지 못하자, 경감님은 예상했다는 듯 껄껄 웃으며 폰으로 자신의 `최애`들을 보여줬다. 시목의 눈엔, 날아다닐 줄도 아는 형형색색 희한한 인물들보다도, 열광적인 경감님 표정이 훨씬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를 이토록 선명하게 아시는구나…. 시목에게 경감님은 늘 새로운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익숙함 속에서 매번 놀라운 뭔가를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참 벅찬 일이다. 바닷가에 사는 풍경 사진가는 매일 다른 일출의 색채로부터 경이를 느끼고, 평생 식물을 탐구하던 학자는 작은 기공의 현미경 사진 하나에도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그런 벅찬 느낌을 맛본다. 시목의 삶에선, 그런 경험은 오롯이 경감님으로부터 온다. 시목 마음속에서 그 경이가 어떤 형태, 어떤 감각인지는 시목 본인만이 알겠지만.

 

"와- 내가 그 실험을 안 했더라면, 요 친구들을 모르고 살았겠어, 차암. 앗, 그렇다고 얘네랑 예전 최애들이랑 비교하진 않아요. 걔네들도 다아 이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경감님은 본인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더니,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시목을 휙 돌아봤다. "내가 요즘 그림 잘 안 그리는 건요,"

 

"…그건 나도 모르게 생긴 또 다른 변화 같아요. 요샌 웬만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 그림 안 그리거든. 내가 전보다 차가워졌다, 그런 말도 듣는데. 음…. 사람을 대할 때 전보다 마음을 쉽게 안 여는 건 맞아요."

 

 

  

 "난 내내,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전엔 늘…. 내가 누구인지에 관해 확신에 차 있었거든. 그때의 내가 부러웠어요."

 

시목은 턱을 괴고 경감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느꼈던 것 그대로였다: 그가 본 올봄의 경감님은 내적 갈등 한가운데에 있었다. 경찰 시계가 찍힌 걸 시목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던 그 날 이후, 경감님이 내가 변했어- 하는 자괴감을 겪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결국, 가장 믿던 상사의 부정을 남김없이 세상에 드러낸 후에야, 경감님은 그 자괴감을 떨쳐 버린 것 같았다. "난 타협할 수 없어요-." 말하던 때로부터 본인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믿음을 일부나마 되찾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것도 그래서였을까…. "나 하나도 안 변했죠?" 경감님은 본인이 예전 버전 그대로라고 스스롤 확신시키려 했고, 또한 시목의 동의를 원했다. 하나도 안 변하셨습니다- 경감님이 당장 듣고 싶었던 건 분명 그 말이었을 것임에도, 시목은 그게 정답이 아니란 걸 알았다. 하여 그는 긍정도 부정도 보류했다. 섣부른 위로를 한답시고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시목이 소주잔들을 새로 채우는 동안 김 모락모락 오르는 우동이 나왔다. 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경감님은 얘기를 이어갔다. "내가 앞으로 어떤 경찰이 되고 싶은지 알려고 여기 온 게 맞나? 어쩌면 난 그저 `객관적으로 더 좋은 자리`에 앉아서 안일함에 물들어버린 거 아닌가? 용산서 동료들이 다쳐 가며 고생하는 사이에 난…. 팀장님이 욕하시던 `행정 한다는 것들`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건가. 그런 생각을 했죠."

 우동 국물 첫술 뜨는 것도 미뤄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시목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닌 것 아시잖습니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시죠…?" "네. 이젠 그 생각은 벗어났어." 경감님이 안심시키듯 웃었다. "어어, 검사님 왜 안 드셔. 따뜻할 때 드세요!"

 

 

"그래서 현장을 떠났습니까?" "요즘은 그림 안 그리십니까?" "행정경찰을 원했던 거 아닙니까?" "나중으로 미루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 호수에 돌을 던진 게 아니었구나. 호수가 아니라, 이미 급류였구나. 경감님이 잠잠한 호수처럼 고민 없이 환경에 젖어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입체적으로, 역동적으로 그 고민의 시기를 보내셨을 줄은 몰랐다. 시목은 총리 특임을 마치고 되돌아가고 경감님은 본청으로 옮긴 후, 연락은 무척 뜸해졌다... 시목은 바쁘실 테니 방해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하여 그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가끔 경감님이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검경협의회 동안, 가까운 곳에 와서야 비로소 시목은 경감님의 고민을 목도했다. 그녀의 괴로움이 읽힐 때마다, 시목은 그로선 참 드문 후회라는 걸 했다. 먼 곳에 있는 만큼 종종 먼저 연락해 볼걸. 힘든 걸 선뜻 꺼내놓는 타입이 아니신 만큼, 먼저 물어볼걸. 고민이 있으시냐고. 그래서였다, 원주로 떠난 후 시목이 늘 먼저 연락하는 쪽이 된 건. 일터에서도 점심시간이면 PC 카톡 창을 열어 타닥타닥 안부를 물었고, 일찍 퇴근한다 하신 주말이면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이젠요, 변해온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래야 내가 있는 이곳의 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잖아. 내가 본청에 남기로 한 거, 검사님한테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하고 난 괜찮다고 우기기만 했죠? 이제야 쭉 얘기했네…." 경감님은 눈을 빛내며 새로 맡게 된 팀 얘기를 들려줬다. 오롯이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매달려보고 싶다고. 정보국에서 내 쓰임을 증명해보고 싶다고.

 

"다만 스스로 제대로 감시하기로 했어요…. 변해선 안 되는 부분까지 변해버리면…. 안 되잖아."

 

"그런 일도, 그럴 일도, 없을 겁니다." 말끝을 꾸욱 누르며, 시목은 눈빛 지긋이 확신을 전했다.

 

"... 난 그 말이 진짜 좋아요. 특임 때도 들었는데." 경감님이 찡한 표정으로 활짝 웃더니, 몸을 쑤욱 기울여 눈을 맞췄다. "있잖아, 검사님은 날 어떻게 그렇게 믿어요?"

 

경감님을 향한 신뢰에 이유가 또는 배경이 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할 시기는 벌써 한참 전에 지나지 않았나. 신뢰라…. 시목은 바짝 가까이 다가온 경감님 눈을 그저 잠자코 바라보았다. 눈가에 엷은 미소를 담으며.

 이미 이토록 빛을 발하는 분인데, 내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이 그 사실에 무엇을 더 보태랴? 그런데도 당신이 내 신뢰를 확인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그저 행동으로 보여드릴 수밖에- 시목의 눈빛을 번역해본다면 이쯤 되리라. 때론 말보다 시선이 효과적이다: 진심을 오롯이 담아 경감님을 응시하면, 경감님은 시목이 뭘 느끼는지를-본인에게도 모호했던 걸- 놀랍게도 바로 캐치하시는 경우가 많았으니.

 

눈싸움 아닌 눈싸움이 이어졌다 - 두 사람은 부드럽고 단단한 눈빛으로 한참을 서로에게 묶였다. 마침내 경감님이 나지막이 웃었다. "오케이. 날 그렇게 믿어서 고마워요. 나 인생 제대로 살았나 보다…. 자긍심이 드네."

 

"있잖아, 그래도요, 앞으로 뭔가 아니다 싶으면 꼬옥 직언해 줘요. 그런 거 완전 잘하시잖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당시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검사님한테 말을 못했어. 그리고 이렇게 털어놓는 게 익숙하질 않았어요. 이제야 술술 말을 잘하게 됐네, 검사님 덕분이야."

 

"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치, 진짜 몰라서 물어요?"

 

"...."

 

"...나, 이제야 검사님한테 진짜로 몽땅 다 털어놓은 것 같아." 경감님이 후련한 듯 털털 웃으면서 기지개를 쭈욱 폈다.

 

시목은 테이블 앞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경감님은 절 믿으시나요."

 

경감님은 방금 후루룩 머금은 우동으로 볼이 볼록한 채 단호하게 끄덕이셨다. "믿죠, 그럼." 경감님이 본인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야."

 

 결국 시목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이 놀라운 사람이 자신을 가장 끝까지-가장 깊숙이까지 받아들였음을 깨닫고 말았다. 이건 무슨 감각일까, 목울대에서 낯선 시큰거림이 느껴졌다.

 

말이 쉬이 안 나와서, 그는 그저 눈만 도르르 굴렸다….

 

"전엔 그러셨잖습니까. 안 믿으신다고." 시목은 눈에 익은 그 왓칭유 제스처를 따라 해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신다고."

 

경감님이 털털털 웃었다. "그걸 여태 기억해요? 이젠 믿지, 충분히 지켜봤으니까."

 

"근데 이건 계속 지켜보는 중이야: 밥 잘 챙겨 드시나, 건강은 잘 챙기시나." 경감님이 야무지게 딱 째려보는 눈빛까지 완벽하게 왓칭유 제스처를 재연해 보이자, 시목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감님은 기쁜 듯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웃었다! 이거 해서 실패해 본 적이 없다니까-."

 

 

 

 

 

"내 안목을 믿고 왔다, 그러셨다면서." 

 

"...우리 단장님한테 기대를 걸어 본 거잖아. 내 안목 하나 믿고, 시도해 본 거잖아."

 

시목은 경감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오늘 최 전 단장을 만나고 오셨다고 했으니.

 

 "우리 단장님은 그 기댈 저버리지 않으신 거고."

 

"고마워요." 경감님이 나지막이 말하더니,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고마워요." "그때 단장님한테 가 줘서…. 단장님한테 그걸 알려줘서."

 "제가 아니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 아시잖습니까, 최 전 단장께서 하신 결정인걸요." 시목은 경감님의 상처를 의식하여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시목답지 않게 직접적 표현을 피하면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거잖아요. 우리 둘 다 그런 타입 아냐?"

 "...그렇죠."

 "검사님 아니었으면, 그 과정에서 오해도 상처도 훨씬 깊었을 거예요. 단장님이랑 나 사이에." "단…. 선배님이 그러시더라. 내가 그 위협 받은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둘이 부딪혔다면…. 그건 생각하기도 싫다고."

 

시목은 잠자코 소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최단장을 방문하던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경감님이 고맙다고 하시는 걸 듣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이후 경감님이 최단장을 더이상 오해하지 않는다 말했을 때 시목은 그저 안도했다. 본인이 뭔가를 했다며 어필하는 건 시목으로선 절대로 하지 않을 종류의 일이었다. 시목은 그저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우부장은 최 전 단장께 그걸 알릴 생각이 없었고, 최단장은 아셔야 했습니다…. 전 경감님이 최부장께 대책을 요구하지 않으시리란 걸 알았구요."

 

"울 단장님도 대단하시죠…. 그동안 붙잡아왔던 것들을 확 놓아버리는 용기를 냈으니까. 근데 검사님이 한 일은 사실의 전달 그 훨씬 이상이었어요. 단장님이 그러셨어, 황검사가 한경감 안목을 믿고 왔다 그 말을 하는데, 그 눈빛을 보노라니 갑자기 머릿속이 확 맑아졌다고. 너무 명백한 결론이 갑자기 보였다고, 잡음이 사라진 것처럼."

 이건 시목에겐 몹시 놀라운 이야기였다. 경감님을 자신이 얼마나 신뢰하는지가 보였을 때 최 전 단장이 느낀 바가 컸고, 그게 결정의 과정을 단축시켰다니…? 

사람의 결정에는 결국 감정이 관여하며 감정과 이성은 완전히 별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상보적이다…. 시목은 최근에 읽은 책 내용을 떠올린다. 애초에 시목이 그날 찾아간 것 자체가 유대감에 기초한 판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경감님과 최단장 사이의 유대감 뿐 아니라,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경감님과 시목 본인 사이의 유대감에. 경감님을 너무나 믿어서, 경감님이 믿는 사람을 믿어보기로 했으니….

 

"나를 그렇게 깊이 알고, 걱정하고, 생각해줘서, 내가 직접은 절대 못 할 걸 알고 움직여준 거잖아….  고마워요, 정말…많이. 난 어떻게 생각지도 못했을까, 그걸."

 

"내 상황 때문에, 검사님으로선 안 하던 종류의 일까지 하게 된 거잖아. 근데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래요…. 대신에, 이 얘기를 꼭 해야겠어, 검사님이 위험하면 나도 반드시 옆에 있습니다. 알죠?"

 

경감님은 자연스럽게 손을 쭈욱 뻗어 시목의 한쪽 손을 꼭 쥐었다. "위험할 때 아니라도…. 어떤 식으로든 힘들 때, 고민이 있을 때, 뭐 어느 때라도."

 경감님은 지압하듯 시목의 손을 조몰락거렸다. 손힘이 강했다. 시목은 곧은 시선을 마주하다가 한참 만에 다른 손을 조심스럽게 그 위에 얹었다…. 그렇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시목은 맞잡은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그가 위기에 처한다면 경감님은 그를 혼자 두지 않으리란 게, 이젠 어쩌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사실로서- 어쩌면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굳건한 사실로서- 뚜렷해졌다.

 

시목은 이명의 고통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굳건히 지탱해주던 경감님의 팔힘을 떠올렸다…. 어떤 원리였을까, 그 단단한 손길을 느꼈을 때 이명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음을 억누르느라 머리를 무릎 깊숙이 묻었지만, 내내 시목은 바로 옆에 경감님이 있음을 느꼈다. 마치 구명정을 움켜쥐듯 시목은 그 존재가 주는 위로를 붙들고 버텼다…. 고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이번엔 눈이 조금 따갑고 시큰거렸다. 이건 어떤 감각일까. 아주 오랜만에 섭취한 알코올은, 감각을 둔화시키기는커녕 증폭시키는 것만 같았다.

 한저녁 내내 새롭게 겪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뭔가가 넘쳐버릴 것도 같았으나…. 동시에, 이런 순간조차도 본인이 감정을 선명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목은 씁쓸하게 삼켰다. 본인의 결함에 대한 인식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내가 보통과 같았던들, 저녁의 특별함을 훨씬 더 강렬히 느끼고, 또 그 느낌을 또 말과 표정으로 표현해냈을 텐데. 그로써 경감님의 역동적 에너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아주머니가 포장마차를 정리하실 시각이 되었을 때, 경감님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시목의 집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남짓이었기에 차는 텅 빈 주차장에 버려두고 걸어가기로 일찌감치부터 의논해 두었다. 그러나 경감님은 걸을 상황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분이 테이블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놓고 나자 비로소 피로와 취기가 훅 몰려온 듯했다. 대리운전도 택시도 부르기 어려웠다. 앱을 켜 보았지만, 밤엔 워낙 인적이 없는 동네라 한참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시목은 고민 끝에, 테이블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등을 내밀었다.

 시목의 어린 시절 기억 저편엔, 젊은 아버지에게 업혀 병원을 향하던 장면이 있다. 딱 한 컷짜리 흐린 흑백사진 같은 단편적 기억이다. 부모님이 갈라서시기 전이었을 게다. 뛰느라 아버지의 등이 흔들리고 있었고, 등이 넓었고,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어린 시목은 아마도 든든한 보호를,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느낌은 사라졌다. 수술 이후부터는 그 장면을 떠올려봐도 느낌을 되살릴 순 없었다.

 그 느낌을 기억하진 못해도, 적어도 경감님이 편안함을 느끼시게 할 자신은 있었다. 업는다는 건, 다른 이가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일 때 자청해서 탈것이 되어주는 일, 상호 간의 신뢰와 친밀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이 제안을 받아들이실까…. 시목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기다리며 몸을 돌려 올려다봤다. "가시죠." 그 말에 경감님이 졸린 눈을 가늘게 떴는데, 시목을 보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시목은 설득하듯 눈을 깜박거렸다. 경감님은 예상외로 냉큼 업히셨다. "실례하겠습니다아-" 하고 팔을 쭈욱 뻗어 시목 목에 단단히 감으며. 경감님은 이내 다시 잠에 취하여 고개를 시목 어깨 위에 툭 떨궜다.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오오, 넓어…. 든든해.

 

시목이 두 사람분 가방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포장마차 아주머님이 다가와 뭔가를 쓱 내미셨다. "따끈한 보리차예요. 이거 보온통은 담에 올 때 돌려주시고." 경감님을 업은 탓에 사양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주머니는 씩 웃으며 보온통을 가방에 쏙 넣어주셨다. 아주머니 입가엔 아주 흐뭇한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젊은 사람들끼리 와서 깔깔 웃고 그러니까 너무 좋으네, 나도 젊어지는 것 같았어요. 같이 또 오셔요, 덤 듬뿍 드릴게."

"아이고, 주무시는 모습도 곱네. 처음 본 분이지만 정말 내가 반했어." 아주머니는 경감님이 아주 마음에 드신 듯했다. 음식을 즐겁게 먹는 경감님 모습에, 아주머니는 기분 좋은 듯 일부러 근처에 오셔서 맛있으시냐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경감님은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아주머니는 흐뭇해하며 공짜로 따끈한 튀김까지 만들어 주셨다….

 

시목은 경감님의 쾌활함이 새삼 놀라웠다. 어묵에 쑥갓까지 인심 좋게 듬뿍 든 우동 앞에서 경감님은 무척 기뻐했다. "와아- 여기 완전 제대로네!" 음식 앞에서 순수하게 즐거워하시는 그 모습이 시목에겐 늘 새롭다. 시목으로선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부분들로부터 경감님은 선명한 기쁨을 찾아낸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재능인가. 그리고…. 그런 그녀와 함께 있는 덕분에 그 즐거움의 표현들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공명해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시목은 경감님의 체온을 느끼며 한 걸음씩 조심히 내디뎠다. 무거워서가 아니라, 혹여나 뭘 잘못 밟아서 함께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중요한 한 사람이 내 등에 업혀 있으므로...

 시목의 사고회로 속에는, `경감님=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본인 중심의 인식보다는, 경감님이라는 사람 자체가 세상 속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시목이 다섯 살이나 어린 그녀를 항상 깍듯이 공대하는 것도, 시목의 핸드폰 연락처 중 유일하게 `님`이 붙은 연락처가 `한여진 경감님`인 것도 그래서이리라.

 그 존재는 마치 등불과도 같다. 뜨겁고 차가운 감정을 누구보다 선연히 느끼면서도 그에 휘둘리지 않는 놀라운 사람, 한여진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온 건지를 매번의 행동에서 선명히 보여주는 사람. 이 사람 앞엔 평가의 기준이나 신뢰의 근거를 들먹이는 것이 모독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 경감님이 괜찮지 않음을 알았을 때, 그 강한 사람이 흔들리고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시목은 공무원 인생 처음으로, 근무지가 수도권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늘 아무리 멀어도 아무 불평 없이 잠자코 갔던 시목인데. 

경감님이 본인 얘기를 꼭꼭 꿍쳐놓기만 했을 때, 그걸 탓하지 않았다. 시목도 본인 얘기는 절대 안 하고 살아왔으니... 그러나 걱정되었다. 하여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경감님은 역시 놀라운 사람이다. 경감님은 한 걸음씩 크게 내디디며 씩씩하게 극복해나가고 있다, 어주 능동적으로. 경감님답다... 경감님은, 흔들리면서도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더 강해지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구나.

 그 극복의 과정에서 경감님은 시목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끌어당겼다. 다른 누구한테도 안 할 거라는 본인 얘기들을 시목에게 들려주었으며, 그토록 확신에 찬 눈빛으로 신뢰를 말했고, 또한 신뢰의 표현으로서 이렇게 편안하게 업혀 잠들어 있다…. 이 일련의 사실들은 시목에겐 일렁거리는 어떠한 낯선 감각으로 다가온다.

 

시목은 이 일렁거리는 감각이 -시목은 의식적으로 감정 대신 감각이라는 말을 쓴다- 자신을 서서히 흔들어 놓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시목은 그를 평소 생각의 궤적에서 옮겨놓으려는 외부의 개입이 있다면 우선 피하고 보았다. 원래 살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관성 탓이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주는 한경감님-당시 한경위님-에게 `선물 하지 마요` 하고 무안을 드렸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목은 흔들리는 김에 스스로를 더 흔들어보고 싶다.

경감님은 정상 비정상이 어딨냐고 늘 말해준다. 그게 그렇게 딱 나뉘는 게 아니라고, 사람들이 차암 다양하다 보니까 스펙트럼이 있는 거라고. 감정이 없다고 단정 짓지 말라고…. 경감님 말에 기대어 시목은, 이젠 자기 안의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가능성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한다. 이젠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걸었기에, 집에 가기까지 평소보다 배는 오래 걸렸다. 경감님은 중간중간 잠깐씩 깨어나서 말을 걸어왔다. 경감님이 취하신 건 처음 봤다…. 주사가 그래도 참 점잖으셨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들을 아주 느리고 나직하게 중얼중얼 이어나가는 게 주사였으니.

 

취해서 하시는 말씀들이라는 게 퍽 난해했다. 경감님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했고, 검사님은 그 차이를 아시느냐 묻길래 일단 글쎄요, 하고 답했다. "선을 그어놓을 필요가 없어요, 그쵸? 다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잖아. 결국, 그럼 미리 정해놓을 수가 없지…." "그렇습니까." 시목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었다.

 

시목은 특유의 비상한 기억력으로, 경감님이 취해서 하는 말 한 자 한 자 빠짐없이 모두 기록해놓고 있었다…. 업혀 있는 경감님 목소리의 부드러운 진동은 어깨로 직접 전달되었고, 왜일까, 시목은 그 난해한 말들의 의미를 어쩌면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늦은 초여름 그믐밤의 독특한 분위기와 맞물려 기억 속에 남았다. 달이 없어 사위는 유독 어두웠고, 골목 어느 켠에선 고양이들이 나지막이 가르랑거렸다. 집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이십여 분 동안, 시목은 오감을 열어놓고 자신이 느끼는 것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해 보고자 했다. 이 감각들을 기억해야, 경감님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단서를 잡을 것 같아서.

 

 

  

경감님을 침대에 잘 모셔다 놓고 나서 잠들기까지도, 한참 전에 시작한 그 일렁거림은 좀처럼 옅어지질 않았다.

 

 

 

 

밤도 새벽도 아닌 시간에 시목은 혼자였다.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시야는 흐렸다. 눈앞엔 높은 벽이 있었다.

바로 그 너머에 어둡지 않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저곳엔 햇빛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러나 시목은 알았다, 색채가 없다고 해서 벽 이쪽 편에서 흐르는 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걸어가려는 방향이 있는 한…. 고향이 없는 그에겐 어쩌면 이곳이 고향이었다.

그는 깊숙이 숨을 머금고 내쉬길 여러 번 반복하다가, 눈을 꼭 감고 촉을 곤두세웠다. 어두운 곳에서 다음 행선지를 찾으려면 피부로 주위를 느껴야 하므로.

 

그는 문득 낯선 온기를 느꼈다. 온기가 어느 곳에서 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는 그저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발견해본 적도 없었던 문고리가, 조그만 문이 눈에 띄었다. 시목은 홀린 듯 천천히 그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경감님이 뛰어와 정답게 팔을 둘렀다. 그녀의 생동하는 에너지는 흐리고 어두운 주위와 대조되었다. 맞잡은 손이 더없이 따뜻한 걸 알았을 때 시목은 비로소 온기의 원천을 알았다. 경감님은 평소처럼 눈을 크게 뜨며 싱긋 웃었다.

 

이거 같이 열어 볼까. 궁금하잖아요- 시목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귀에 대고 말하는 나직한 낮은 목소리. 시목은 그녀를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함께 웃었다. 이유 없이 편안한 웃음이 밀려 올라와서. 어쩐 일일까, 잠깐 사이에 사위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어쩌면 이 벽 안과 밖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목이 침착하게 문고리를 쥐자 경감님이 그 위에 따스한 손을 겹쳤다. 준비 됐어요? 하나, 둘 셋... 경감님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시목은 눈을 꼬옥 감았다가 뜸과 동시에 문고리를 힘껏 돌렸고 -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시목이 꿈을 꾸는 일은 아주 드물다…. 어젯밤엔 어째서였을까. 무슨 의미였을까.

 

경감님은 해몽에 능하시다. 덕분에 시목은 예전에 본인이 꾼 꿈들의 의미를 안다.

영검사가 그렇게 되었을 때…, 시목은 쓰러져 꾼 꿈속에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엉엉 목놓아 울었다. 두려워하고 슬퍼했다. 특검 때문에 서울에 지내던 17년도 하반기, 긴 얘기 끝에 시목이 그 꿈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현실에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랬을 거야." 경감님은 천천히 그를 토닥이며 대신 눈물을 흘려주었다.

대검 차장실에서 항명하고 나온 날 밤엔 서부지검 꿈을 꾸었다. 경감님에게 그 꿈 얘기를 들려드리고 난 한 달쯤 후인가, 경감님은 문득 그 얘기를 다시 꺼냈다. "검사님을 이해해주질 않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외로움을 훅 느꼈을 거야. 그래서 그분들 모두가…. 문득 그리웠을 거야." 경감님이 시목 대신 아픈 표정을 지었다.

 

 시목에겐 늘 실체적 진실이 우선이었기에, 이전의 그는 설혹 꿈을 꾼다 하더라도 그에 의미를 부여하질 않았다. 오히려 꿈을 꾼 후의 뒤숭숭한 감각이 마뜩잖아, 일부러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꿈은 무의식에 귀를 기울일 기회, 드물고 귀한 기회임을 이젠 안다. 이젠 무의식을, 그 안에 묻혀버린 것들을 그저 무시해버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꼭 붙들고는, 그로써 제 흐릿한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알아나가고 싶다.

시목은 셀프 해몽을 시도해본다. 꿈속의 짤막한 말들로부터, 어젯밤의 긴 대화로부터, 그리고 경감님이 귓가에 불어넣은 난해한 말들로부터 단서를 수집해본다. 그러나 쉽진 않다.

 

 

 

   

문고리가 도르륵 돌아가더니, 경감님이 수건 걸친 머리를 쏙 내민다. 시목은 공손하게 꾸벅 묵례한다. 경감님은 덜 마른 단발머리를 톨톨 편하게 털면서 활짝 웃는다…. "이야- 오늘 햇볕 좋네. 잘 잤어요?"

 

 

  시목은 문득 깨닫는다. 유일한 열쇠는 이분에게 있다.

 

   

시목은 조금 멍해져서는 살짝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해가며 실내화를 가져와 권한다. "어우, 고맙습니다아-" 경감님은 잠이 덜 깬 듯 헐겁게 웃으며 꾸벅 묵례한다.

 

"해장국 드시러 가실래요? 바로 저깁니다." 시목이 창밖으로 보이는 상가 건물을 가리켜 보인다. "와, 이 집 입지 좋네! 여기 살면 밥을 할 필요가 없겠어."

 

두 사람은 가볍고 편한 여름옷 차림으로 휘적휘적 집을 나선다. 조그만 식당 한켠에 자리잡을 때까지도 두 사람 다 멍한 표정이다. 한 사람은 잠이 덜 깬 탓에, 다른 한 사람은 잠을 너무 일찍 깬 탓에. 후룩후룩 해장국 편하게 떠먹는 소리만 오간다.

 

 

  

크고 입체적인 구름 덩이들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는 초여름 날씨다. 기단이 바뀐 걸까, 어제만 해도 뿌옇던 연무가 싹 걷혀나가 공기는 아주 맑고, 바람까지 불어 퍽 상쾌하다. "좀 걸을까요?" 시목은 제안해본다.

 

"바닷가 걸어요! 바다 보고 싶다. 완전 오랜만에."

바다…? 시목은 눈을 깜박인다.

"바다 함 가봤어요? 강원도에 둥지 트신 김에?"

"...아뇨."

"설마 아직 한 번도?"

"...네."

 

다른 누군가가 바다에 가자 제안했더라면, 원주는 내륙이며 동해와는 결코 지척이 아니다, 고속도로에서 허비할 서너 시간이면 판례집 하나는 정독하겠다, 근처에서 운동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런 생각으로 단칼에 거절했을 터이지만, 경감님이 가고 싶으시다지 않은가. 경감님이 지척이라면 지척인 거다. 

 

  

시목은 차 쪽을 가리켜 보인다. 

"...안 가십니까?"

 

 

 

 

 

<Chamomile 2화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준히 방문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기쁩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공감 부탁드릴게요! 감상하며 어떠셨는지 알 길이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