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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4화. 그리움, 그리고 반가움>
시간 배경 2019.05.18 토요일_이창준 전 수석 기일
민하가 끓여준 누룽지를 먹는 동안에도, 여진과 시목은 아직 잠에 반쯤 취한 상태다. 둘 다 평소같지 않게 느리고 나른한 말투에다가, 말할 때마다 자꾸 버퍼링이 걸린다.
"나도 이제... 나이먹었나 봐..." "경감님은... 아직, 젊으세요..." "어허! 이십대... 를 앞에 놓고 무슨...정검사님은...괜찮아요? 와아... 하나도 안 부었어! 역시 이십 대..."
그러면서도 둘은, 뜨거운 누룽지를 후후 불어가며 야무지게 잘 먹는다. 먹는 중 자꾸 아구구 소리 내며 기지개 켜는 한경감님, 뒷목이 뻐근한지 연방 문지르는 황검사님. 이 둘의 예상치 못한 귀여움에, 민하는 누룽지 냄비 너머에서 자꾸만 배시시 미소 짓는다.
황검사님이 그릇과 수저를 꼼꼼히 씻어놓는 동안, 잠이 다 깨신 듯한 경감님은 쓱쓱 활달한 몸놀림으로 담요와 이불을 개키신다. 엇 제가 하겠습니다- 민하가 식탁을 닦다 말고 달려가서 거든다. 뭐랄까, 편안한 동아리 선배들이랑 엠티 온 기분이 든다. 민하는 충전기에 꽂아둔 폰을 만지작거린다... 이 평화로운 기분을 조금만 더 오래 붙들고 싶어서, 밀린 연락 확인하는 걸 보류하고만 싶다... 그러나 결국, 직장에서 연락이 왔었을까 걱정에 폰을 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곧 민하는 근무지 변경 공지 문자를 발견한다. "저... 지검에서 짐을 빼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주...로 전보 발령이네요..." 민하가 담담히 말한다. 설거지를 멈추고 돌아보는 황검사님, 얼굴 가득 걱정을 담는 한경감님. "괜찮겠어요..?" "네! 지금도 혼자 지내고 있어서요, 큰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본가와 더 멀어지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여진은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목도 같은 생각인 듯, 둘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세하게 끄덕, 한다. "정검사님!! 어디 가시든 잘 하실 거예요. 저랑 황검사님이 꼬옥 보러 갈게요. 그쵸 황검사님?" "네." 시목이 끄덕, 동의한다.
"언제부터 제주지검으로 출근해요?" "다음 주 수요일부터입니다." "어유, 나흘 말미밖에 안 주네... 아참! 짐 꽤 많을 텐데! 이럴 때 제가 쓰는 업체 있어요, 짐 날라주는 업체. 명함 보내놓을게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하죠? 태워다줄게요. 같이 타고 가요!"
한경감님 본인도 주말근무해야 하는 와중에도 정검사에게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으신가 보다, 하고 시목은 생각한다. "잘 들어가세요. 저는 그럼." 시목은 꾸벅 묵례하곤 바로 문을 나선다, 여진과 민하의 출근 준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목이 사우나에서 씻는 건 거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른 시간이라 한적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시목은 머리를 깔끔히 감고 말리고 다듬는다. 사우나의 드라이 빗이 평소 쓰던 것과 다르게 생겨서 곤란했지만 어찌저찌 단정해졌다. 다려서 차에 싣고 왔던 정장을 갖춰 입곤 길을 나선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많다... 오전엔 김사현 부장을, 오후엔 서동재 검사를 만난다. 저녁은 강원철 전 지검장님, 서검사와 셋이서 하기로 했다. 약속을 하루에 이처럼 많이 잡는 일은 시목으로선 아주 드물다...
** ** **
대검 법제단 집무실, 떠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 익숙한 이곳. 똑똑, 시목이 문을 두드린다.
평검사 한 명, 부부장급 한 명으로 법제단을 충원했다고 들었다. 시목이 쓰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새 평검사 단원이 분명하다. 낯이 익다-통영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세진 검사임을 알아보고, 시목은 시목 나름으로는 꽤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묵례한다. 국회의원 비리 수사 중 외압을 받았을 때, 이를 라디오 방송에 나가 밝힌 바람에 좌천되었던 사람. 검경협의회 준비 회의에서 시목이 해당 사건을 언급한 덕분에 김사현 부장은 김검사에 관해 알게 되었고, 최근 그녀를 법제단으로 불러들였다. 차장이 걔 물의 일으켰던 애 아니냐, 평검사 잘못 뽑았다가 또 사달 낼 일 있어?하며 못마땅해했을 때 김부장은 '법제단의 이미지를 위해서'라 둘러댔다. 진짜 이유는 뭐였을까.
다른 한 명은 잠시 나갔는지 자리에 없다. 류시영, 명패의 이름을 보고 시목의 미간이 좁아진다. 류시영 부부장... 동부지검, 그 이전엔 성남지청. 통영사건 재벌 커플이 하루 만에 불기소처분되었을 때, 류시영은 의의를 제기하려던 시목의 연락을 깨끗이 무시해버렸다. 또한 류시영은 남재익 아들 채용특혜 사건 수사에 외압을 반영한 정황이 있다. 이에 관해 물으려 찾아갔을 때도 피해버렸었지... 우태하 조사 과정에서 채용비리건 외압 문제 또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류시영은 2018년 채용비리건 성남지청 송치 당시 주임이었음에도, 용케도 빠져나갔다. 불기소처분이 내려진 2019년엔 이미 본인 소관이 아니었다는 게 1차적 이유였지만, 사실상 김사현 부장이 방패가 되어준 셈이었다... 지연, 학연이 겹친 데다 성남지청에서 직속 상사였던 김부장은, 류시영이 곤란해질 것 같자 냉큼 데려다 법제단에 앉혔던 것. 채용비리건을 넘겨받았던 성남지청 후배 혼자서만 여론의 뭇매를 맞을 동안, 류시영은 조용히 빠져나와 대검으로 옮겨와 있었다. 성남지청 형사2부... 그런 내막으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걸까... 심증을 확보한 시목이 미간을 찌푸린다.
똑똑, 노크하곤 꽤 오랜만에 김부장 방에 들어서는 시목. 묵례하는 무덤덤한 얼굴에서 약간의 반가움을 읽어낸 김부장은 싱글싱글 기분 좋게 웃는다. "오랜만이다, 야. 인사하러 올 줄도 다 알고." 김부장이 활짝 웃으며 어깨를 툭, 친다. 시목은 살짝 당황한다. 순수하게 인사만 드리러 온 줄 아시는 건가. 시목이 상사를 찾아가는 건 항상 물어볼 게 있어서거나 해야 할 말이 있어서이지, 인사가 목적인 경우는 절대 없다 - 아, 예외는 있다: 강원철 전 동부지검장님껜 그저 얼굴 뵈러 찾아갔었다... 현직이실 땐 용건이 있어야 찾아갔지만.
"지낼 만하냐? 음식은 입에 맞고?" "네." "강원도 음식 슴슴하지? 나도 거기 있어 봤다." "네..."
"본론이 뭐냐?" 사현은 이제 시목을 꽤 잘 안다. 이놈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시목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의정부지검 비리, 부장급에서 끝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뇌물 공급원도 세곡지구대 한 곳이 아니고요. 마저 밝히셔야 합니다."
사현은 이마를 짚는다. "그 부장 하나 잡는 것만 해도... 하아... 이걸 갖고 정보국 그것들이 얼마나 징하게 물고 늘어지는지 알아? 증거목록 확보한 지 며칠 됐다고 그새 보도를 쫙 뿌렸어"
"언론플레이 말씀이시라면... 법제단에서도 똑같이 했는데요." "그래, 맞아. 세곡 따돌림 밝힌 거 한여진 주임은 옳은 일 한 거고, 우리 법제단에선 그걸 이용했어. 그래 봤자 뭐 정보국이 반격했지만." 사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여 묻는다. "세곡 때문에... 한주임 고생 꽤 했지?" 시목은 그 말엔 대답 없이, 사현을 똑바로 볼 뿐이다. "여론을 달구어 사건진행을 촉진하는 것, 언론의 순기능입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실행되는 언론플레이는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것, 아시잖습니까."
사현은 안경을 벗어 유리를 닦으며 중얼거린다. "야아 너도 참 그대로구나. 뭐, 당연한 거지만." 시목은 눈을 깜박이며 부장을 빤히 응시한다, 손은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다시 안경을 쓴 사현이 허리를 쭈욱 편다. "그래! 네 말 알겠다. 먹잇감 던져주는 형국이 되더라도, 뇌물 받은 놈은 남김없이 다 잡아야지." 시목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부장 구속영장을 결재받을 때도 함께 차장 앞으로 달려가 설득하던 김부장님이 아닌가.
"됐냐?" 김부장이 묻자 시목은 꾸벅 묵례만 할 뿐 덤덤한 표정이다. 사현은 문득 눈앞의 황시목이가 참 얄밉다. 이 무뚝뚝한 놈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이놈 눈에 좋은 선배인지가 스스로 자꾸만 궁금해지는 거지? 허허 참. 애증의 황시목이다.
"새 단원들을 뽑으셨다고요. 류시영 검사는... 채용 비리 덮은 일, 어떠한 책임도 안 집니까." 이놈이 와서 하려던 말이 한가지가 아니었구만. 일단 앉아라, 사현은 여태 서 있던 시목에게 의자를 권한다.
"2018년 당시, 외압을 끼친 쪽이 있다면 받은 쪽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 외압에 조금도 맞서지 않은 사람의 잘못, 그건 묻혀버리는 겁니까." 사현이 한숨을 쉰다. "이시끼는 외압에 약한 것 뿐 글러 먹은 놈은 아냐. 애 옷 벗게 놔둬? 직속 후배 좀 챙기자 나도."
"우태하 전 부장이 류시영 부부장에게 외압 끼친 것, 당시에 김부장님께서도 아셨습니까?"
사현이 성을 낸다. "이 새끼 오랜만에 오더니만 날 취조하네? 나 그때는 몰랐다!! 알았으면 어쩔래?? 어??"
"죄송합니다." "어라? 사과하네? 내가 알았으면서 여태 모른 척 했다,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아닙니다."
시목이 말을 이어간다. "본래의 자리에서 책임지도록 하는 대신 이렇게 다른 곳으로 데려오신 것은, 특혜인 동시에, 류검사가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뺏는 처사이셨습니다. 이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인맥에 의한 인사발령은 검찰 조직의 고질적 문제로 가장 비판받는 점 중 하나잖습니까. 법제단이기에 더더욱 공정한 인사를 거쳐야 한다- 김부장님께서도 그런 생각이신 줄 알았습니다." "야, 나도 여기 인맥으로 왔다." "부장님께서 그렇게 오신 게 떳떳하지 않으시다면, 지금 같은 인사는 더더욱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야아!!!!!"
김부장의 고함소리에, 부장실 밖에 있던 김검사 및 류검사가 흠칫한다. 류검사도 마침 집무실로 돌아온 참이다. '어쩔래??' '야 이놈아!!' 같은 큰 소리만 들려올 뿐 말 내용은 잘 안 들린다. 평소 온화하신 김부장님이 고함을 친다는 것 자체가 두 검사에겐 당황스러울 따름인데, 계장&실무관님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익숙하다는 표정들이다. 저 사람 여기서 일할 적에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부장실 문고리가 덜컥 열리자 두 검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화 안 내시던 분이 화내면 무서운데... 그러나 예상 밖으로, 김부장은 온화하고 편안한 표정이다. 무덤덤한 표정의 황시목 검사가 따라 나온다. 무슨 대화를 나눴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시목을 소개한 후, 김부장은 두 단원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나눠준다. 류검사는 꽤나 충격받았는지 포커페이스가 깨진다. '검찰 비리 보강조사라니, 도대체 저 인간이 뭐길래 부장님께서 이런 의견을 반영하신 걸까' 류검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반면, 김검사는 의정부지검 보강조사 지시사항을 꼼꼼히 새겨듣고는, 자신이 할 일을 체크하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용무를 마쳤으니 무뚝뚝 꾸벅하고 나서는 시목을, "야 이놈아 점심은!" 사현이 점심이나 같이 하고 가자고 불러세운다. 그렇게 시목은 법제단 사람들과 같이 식당을 향한다. 류시영이 김부장 눈을 피해 은근슬쩍 기싸움을 시도해오는 게 느껴지지만,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시목은 그저 대충 무시한다. 부장님 앞이라 한껏 참지만 끓어오르는 류시영, 그러건 말건 아무 신경 안 쓰는 황시목. '김부장님이 정말 다 밝히실까... 차장의 명령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실 수 있을까', 시목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다. 와중에 메뉴는 곱창전골이어서, 시목은 천천히 대충 먹는 시늉만 한다. "입맛이 없냐? 어허 참... 잘 좀 먹고 다니지." 사현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혀를 끌끌 찬다. 한편, 과묵한 성격으로 알려진 김검사는 그저 묵묵히 먹는 중이다. 김부장도 상황이 어떻든 늘 밥을 아주 맛있게 잘 먹는데, 두 명의 김씨는 이 점에서 닮은 듯하다...
어차피 법제단도 바빠서 빨리 먹고 바로 들어가야 했기에, 식사가 끝나자마자 시목은 바로 인사하고 돌아선다. 그 때 사현이 불러세운다. "너는 언제 가보기로 했냐.... 이창준 선배 계신 곳에? 오늘이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미안함이 표정에 드러난다. "네. 이른 오후에 서동재 검사와 같이 가기로 해서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꾸벅, 시목은 다시 묵례하고 돌아선다. 사현의 눈길이 시목 뒷모습을 따라간다... 휴우... 저놈 무뚝뚝한 데다 골치 아픈 놈이지. 그런데 왜 자꾸 잘해주고 싶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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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서검사는 참 오랜만에 본다. 이젠 반깁스로 바꾼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휘적휘적 싱겁게 흔드는 서검사. 회복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검소한 차림새에 딱히 꾸미지 않은 듯 왁스 없이 내려온 머리.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진 걸까, 아니면 오늘이라서... 이 날이라서, 광내고 나올 수가 없었던 걸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4월 말쯤인가, 서검사가 많이 회복해서 대화도 가능해졌을 즈음 시목과 여진은 같이 병문안을 갔었다. 조용히 얼굴만 보고 가려 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서검사의 친어머님과 이모님들 등 집안 분들이 여럿 와계셨다. 복도 초입에서 마주친 노부인들은, 시목과 여진이 누구인지 유안에게 듣자마자 은인이라며 손을 꼬옥 잡고 마음 깊이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둘은 거푸 고개를 숙이며, 아닙니다. 저희가 더 일찍 찾았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거듭했고, 유안이 "바쁘실 텐데 이제 놔드려요~~ 애들아빠 만나보고 가셔야죠!!" 해준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서검사가 회복 중인 1인실을 조용했다. 하필 그는 자고 있었다. "아유, 회복엔 잠이 중요하죠. 건강 되찾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여진이 유안 손을 꼭 잡고 토닥이는 동안, 시목은 조용히 서검사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주무시네요. 깨우지 마시지요" 하곤 이내 자리를 떴었다.
그때 동재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된 꿈 중 하나였다. 이창준 전 수석님과 황시목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다. 현실과 꿈, 회상이 혼재된 몽롱한 상태였다. "동재야, 넌 아직 기회가 있어. 이 길로 오지 마..." 그 말씀에 어쩌면 자긴 영영 부응하지 못할 거란 죄책감, 끝까지 믿으신 건 황시목 뿐인 거냐며 그분을 원망하고픈 마음, 너는 어떻게 그렇게 늘 쓸데없이 올곧기만 하냐고 애꿎은 황시목을 탓하고픈 마음... "그이는 서검사도 참 많이 아꼈어요. 그 후배는 본인이 알아서 참 잘 사는데, 근데 왠지 마음이 쓰인다고... 잠깐 멀리할 순 있어도 완전히 눈밖에 둘 순 없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연재 회장의 목소리가 불러일으킨, 그리움이라는 그 고통... 그는 그렇게 온통 들끓는 여러 감정들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꿈속 황시목이 아니라 진짜 황시목이 바로 옆에 와 있음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시목이 방문했던 바로 그 오후였다. 어떠한 힘이 동재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지만, 동재는 한사코 거부했다. 아직은, 아직은 계속 그 들끓는 혼란 속에 머물고 싶었다. 현실로 돌아올 준비가 덜 되었던가 보다...
몸은 괜찮으시냐, 담백하게 안부 묻는 시목의 얼굴에 못 보던 표정이 살짝 드러난다. 황시목이가 반가워하면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햐아 내가 죽다 살아나니까 이런 걸 다 보네, 생각하며 동재는 피식 웃는다. "보다시피!" 동재는 이제 반깁스로 바꾼 팔을 흔들어 보인다. "운전도 내가 해서 왔다. 내가 누구냐. 나 서동재야."
시목은 서검사가 가리키는 주차장 쪽을 돌아본다. "저... 지난 주에, 서울추모공원에서 나가시는 차 봤습니다. 약간 차이로 엇갈렸나 봅니다." 동재가 아픈 표정을 짓는다. 영검사를 떠올릴 때마다 착잡하다... 이렇게 참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때론 예상치도 못하고 막을 수도 없는 일들도 있는 거라 해도... 나는 결국 이렇게 살았는데, 영검사도 어떻게든 살았더라면. "하아, 너도 갔었구나... 그래. 그럼 그때 마주쳤으면 좋을 뻔했네. 얼마 만이냐."
동재는 자기가 아프지 않다는 걸 강조한다. 역시 서동재 자존심은 어디 안 갔다. "햐아 참, 난생처음 병원 신세 한참을 지는 게 나는 왠지 자존심 상하더라? 난 이제 멀쩡하다, 곧 업무복귀도 한다 하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이놈의 뼈는 왜 붙는 데에 몇 주씩이나 걸리냐 참. 그래도 나 빨리 회복했다? 의사들도 놀라더라." 병원에 오래 있는 게 왜 자존심 상할 일인가요,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아야죠. 잠자코 듣던 시목이 조용히 말을 꺼낸다. "저도... 한 때 병원에 꽤 오래 있었습니다." 시목이 자기 수술 얘기를 들려주자, 당황한 동재는 그답지 않게 삐걱거린다. '나한텐 영영 말 안 할 줄 알았더니...' "야아... 그걸 어떻게 이제야 말해주냐."
"수술 사실은 아셨던 것 같은데요." (동재가 옆 회의실에서 대화 엿듣곤 하던 일들을, 시목은 빠짐없이 기억한다...) "아니 그, 내막은 몰랐지...! 야, 말해줘서 고맙다. 후유증은 없었어? 힘들지 않았냐?" 실종된 서검사를 찾는 동안 겪은 두 번의 이명을 떠올리지만, 시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젠 괜찮습니다." "너도 참... 진작에 말하지. 내가 이해심이 얼마나 넓은 선밴데." 하지만 동재도 시목도 안다, 수술 사실을 알고 배려하는 것과는 별개로, 물과 기름 같은 둘은 서로의 살아가는 방식을 영영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그럼에도, 지금은 둘의 오래된 인연이 한층 나은 것으로 바뀔 타이밍이 분명하다...
서검사 성격상, 납치사건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건 분명 싫어할 게다. 죽을 뻔했던 일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라도, 겉으로는 그걸 절대 드러내지 않는 게 서동재의 방식이리라. 그럼에도... 시목은 서검사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정검사나 방 사람들에게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통영건을 살인으로 의심하신 걸요." 시목이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꼭 해야만 하는 말이다. "위험 요소가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셔야 합니다... 앞으론요." 평소 대하는 말투로 직언을 하지만, 분명 걱정, 이다. 동재는 그걸 느낀다...
얼마 전 동재는 용산서에도 인사하러 갔었다. 이전엔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죽을 뻔했다 살아돌아온 사람이 고맙다고 용산까지 찾아온 마당에 어찌 눈을 흘길까, 형사들은 모여들어 박수치며 반겨주었다. 그 날 최윤수 팀장이 말해줬다, 황검사가 걱정 많이 했다고. "아니 막 그 똑똑한 사람이 그걸 모르겠어요? 경찰차에 장비 있는 거? 근데 앞뒤 재지도 않고 벽돌로 막 쾅쾅쾅 치더라니까... "
"고맙다." 동재가 시목 눈을 들여다본다. "고맙다 황프로." 은인이 황시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한 번 와락 껴안을 테지만, 황시목에게 그러면 아주 싫어하리라. 은인을 괴롭히면 안 되지, 생각하며 동재는 대신 악수를 청한다. 시목은 그를 말간 얼굴로 마주보더니, 내밀어진 손을 잠시간 마주잡는다.
고맙다 말하는 동재에게, 시목은 더 일찍 찾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사과로 응답한다. "더 미리, 진작에 그 가능성을 검증해봤어야 했습니다... 서검사님께서 그러셨듯 곧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제 수사방식이 결국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때라도 찾은 건 정민하 검사 공이 컸습니다. 인계받은 중학생 학폭 건을 언급한 덕분에 통영건을 다시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사소한 거라며 선배에게 쓴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검증해보려 저에게까지 들고 오더군요."
동재가 잠자코 생각에 잠긴다. 그 얘기 들었어... 민하도 은인이다. "정민하 얘, 내가 사소한 건 입 다물어라 그것부터 가르쳤다... 너는 가르쳐도 씨알도 절대 안 먹힐 애였지만 민하 얘는 다를 줄 알았어. 적당히 줄도 타고 무난하게 잘 살았으면 해서 그랬다. 그런데도 계속 꼼꼼하게 하나하나 신경을 쓰더라... 만약 내가 가르친 것 때문에 민하가, 학폭 얘기도 사소한 거니까 하고 입 다물었었더라면... 나도 참, 인과응보다... 뭐, 그랬어도 니가 어떻게든 찾아냈겠지만..." 시목은 잠자코 듣는다.
"지금 지검에서 민하가 비리 찌르고는 욕 먹고 있는 거. 난 일 터지고서야 알았다... 민하 걔는 쭉쭉 무난하게 올라갈 줄 알았는데. 참...걔도 너랑 한경감이랑 같은 과였구나. 한 길 사람 속은 몰라, 다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거지..." 한탄에 담겨나오는 걱정.
"내가 수습을 한둘 키워봤냐. 근데 제일 친한 게 민하야. 융통성도 있고 선배대접도 잘하고." 동재는 융통성도 없고 선배대접도 안 하던 시목에게 남은 뒤끝을 지금 자기가 무심결에 드러냈음을 깨닫는다. '햐아 나도 참, 이제 은인인 얘인데 차암.' 정작 시목은 별 뜻 없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응, 여러 가지로 상담도 해주고, 직장에서 알아야 하는 것도 꼼꼼하게 알려주고, 아주 선배 노릇 제대로 해온 줄 알았다... 나름 같이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난 좋은 선배가 아니었겠다 싶다아." 후우... 동재가 한숨으로 말끝을 맺는다.
선배, 선배... 선배란 어떻게 정의될까. 이끌어주는 사람? 계속 나아가란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사람, 또는 그런 존재로 마음속에 남는 사람?
"선배님." 시목은 2년 전 이날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그 말을 생각한다. 세 음절을 속삭이듯 조용히 발음해본다. 이창준 선배님. 그가 잠든 곳 앞에서 두 명의 후배는 오랫동안 묵념한다. 각자의 꿈에 나왔던 그를, 회상 속의 그를 생각하고,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무엇을 말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한참 만에 밖으로 나온 둘은 사람 없는 쪽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동재다. "내가 법대 왜 갔을 거 같냐? 내가 첨에 검사 해야겠다 한 게 왜일 거 같아?" 넌 이거 모르지? 할 때의 동재 특유의 표정이 나온다. 시목은 사실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 왜였습니까?"
동재가 처음으로 시목 앞에 자기 얘기를 꺼내놓는다... 자기 삶을 가득 채운 갈증과 치열함, 그 치열함이 향하는 방향에 대해 얘기해보려는 참이다. 죽었다 살아나서 생긴 변화가 무엇인지도. 이건 동재로선 아주 특별한 일이다: 동재는 좀처럼 자기 삶 얘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한동안은 유안에게도.
"처가에서 무시 안 당하려고 그랬다. 검사 된 덕분에 장가들었어. 지방에서 사업하는 장인장모님, 변호사는 돈만 주면 일 하는 사람 취급해도, 검사만큼은 대단한 줄 아셨어. 그래서였다."
"내가 뒷돈 챙긴 걸로 비싼 거 해드릴수록 장인장모가 날 인정하길래, 첨엔 그게 꽤 좋았는데, 점점, 기업가며 어디 사장이며 하는 인간들이 나한테 굽신거리는 데에 취해가더라. 이젠 나 장인장모 같은 사람들보다 위에 있구나, 하고 기분이 좋았어. 유안이는 그런 거 몰랐다. 내가 숨겼어."
"유안인 내가 공부하는걸 10년 넘게 기다려줬다. 내가 늘 열심히 사는 데에 반했다고 했어. 자긴 편안히 흘러가듯 살아왔는데, 그와 달리 난 매 순간을 노력한다고, 그래서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한다고. 그런데 내가 열심히 살다 보니 비리 뭐 그런 걸 열심히 하고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알리냐, 지독하게도 철저히 숨겼다. 숨기는 게 있다 보니 자꾸만 멀어지더라, 오해가 쌓였어. 그런데도 난 온통 싸돌아다니느라 집에 잘 안 들어갔고. 그러다가 그때... 그때 결국 들켰지. 그래서 지난 2년간 별거했다. 유안이가 진짜 크게 실망했어, 헤어지려고 했고... 너 나중에 결혼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배우자한테 거짓말만큼은 하지 마라." 동재가 금방 덧붙인다, "아니 뭐래, 니가 그럴 리는 없겠구나."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뜻인데, 시목은 결혼을 할 리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동재가 말에서 가시를 아예 다 빼놓고 말하니, 그게 오히려 적응이 안 되는 시목.
"나 그때 말이지, 그때, 진짜 정신 번쩍 차렸다고 생각했어. 근데 관성이란 게 무섭더라... 그 일들 겪고도... 그러고도 나는 계속 멀쩡할 거라 생각했어. 왜 그랬을까... 한순간에 허망하게 떠날 수도 있는 게 사람 인생이란 걸 받아들이기 싫었어, 그래서 더 아득바득 살게 되더라. 유안이랑 관계 회복하는 걸 최우선으로도 해보고도 싶었는데 자꾸 좌절되고. 또 아예 예전 방식대로 살자 하니 지검장님이 날 아동·청소년 담당으로 보내버리셔서 뭘 챙겨보려야 챙길 것도 없고. 어떻게든 날 입증하고 싶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내가 좀 제대로 살았구나 싶을 줄 알았어. 그래서 그렇게 가고 싶었다, 대검." 시목은 여전히 잠자코 듣지만,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서검사 눈을 마주 본다.
"지금은... 그냥 살아 돌아온 게 너무 소중하다. 정신을 다 차리고 보니까, 상황이 차암 그런 거야, 내가 하려던 일이 한순간에 다 어그러지고, 참 황당하기도 하고 답답하고 화나는 게 마땅한 상황인데. 근데 그 울분이 별로 안 들더라. 살았다는 게 너무 다행이어서, 유안이를 되찾아서, 유안이가 나를... 되찾아서. 이제 내가 열심히 사는 방향은 유안이랑 애들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어... 애들이 아빠 얼굴을 잘 못 보고 자랐다. 십수년이 그렇게 흘렀어..." "그래도 뭐, 나 아직 명예욕 못 버렸다? 열심히 일하다가 납치까지 당한 열혈 검사 이미지도 생겼겠다, 이제 대검에서 불러라도 줬으면 좋겠다 정말로. 아니 글쎄, 김사현 부장님이 병문안 오셔서는, 고민은 해 보신다더라. 근데 예전 같으면 그게 제일 큰 관심사였을 텐데, 온통 신경이 거기로 쏠렸을 텐데, 이제 뭔가 달라. 우선순위가 분명히 변했어. 어쩌면 제일 처음의 그 우선순위로 돌아온 거야, 유안이. 뭐 죽었다 살아 돌아왔는데 당연한 건가. 게다가 난 애초에 옳은 법관이어야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난 영영, 그런 게 먼저일 순 없어.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되는 게 제일 중요해 지금은. 암튼 뭐... 결국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 너무 진부하냐."
"아뇨, 진부하지 않습니다." 꽤 몰두해서 진지하게 듣던 시목이 답한다. “ '사랑' 이... 우선순위도 바꾸는군요.” 동재는 웃으면서 시목을 본다. 아주 편한 너털웃음. 시목은 서검사가 이렇게 편하게 웃는 걸 처음 본다.
사랑이란 감정이... 대신 살인도 가능하게 만든다고요? 과거 한경감님께 -그땐 한경위님이셨지...-여쭤본 일이 있었다. 사건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정보였다. 사랑이란 걸 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시목에겐 레퍼런스가 하나도 없었다. 형사3부, 즉 강력사건 담당 검사로 한참 일해온 시목은 질투, 분노, 원망...범죄의 동기가 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익숙히 봐왔지만 긍정적인 감정은 늘 낯설었다. 사랑이란 게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렇게 멍하니 멀건 얼굴로 한경감님께 여쭤봤었지. 그 사랑이란 걸 하는 사람이 가까이도 있었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서동재 검사, 사랑.
털털털 웃다 말고 동재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한다. "야아 너 근데. 왜 이렇게 핼쑥하냐. 너 배고프지! 가만있자, 빵 따위론 안 되겠고, 밥 먹자 밥. 든든한 걸로."
시목이 갸웃하며 시계를 본다. 오후 네 시 부근이다. "지검장님이랑 이른 저녁 먹기로 했잖습니까."
동재가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검장님이 잡으신 걸로 매운탕 끓여주신댔다... 지검장님 낚시 하시는 거 본 적 있지?" "네. 같이 끓여 먹고 가라셨는데, 그러려면 그날 안에 못 가겠더라고요."
황시목이가 우스개에 장단도 맞추네? 동재는 껄껄 호탕하게 웃는다. 내가 황시목 이놈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너 근데 언제 올라왔어. 오늘 오전?" "어젯밤에 왔습니다." "잠은?" 시목은 대답 대신 그저 말똥하게 바라본다. "야, 피곤할 텐데 내 차 같이 타자. 잠 부족할 때 운전하면 위험해." 동재가 제안한다. '수면부족이 위험한 줄을 아는 놈이 수습 때 그렇게 맨날 애 밤을 새우게 했을까, 허 참.' 하실 강원철 전 지검장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시목은 웬일로, 알겠다며 조수석을 향한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동재 차는 안 탔을 시목이다. 둘의 관계가 이미 꽤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걸까.
자신이 회복하려면 양질의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며, 동재는 갈비탕 집을 찾는다. 사실 집에서 점심을 제대로 먹고 나왔던 동재는, 음식이 나오자 시목에게 연방 제 고기를 보태준다. 시목은 당황해하지만 돌려주기가 더 어색해서 그냥 먹는다. 늦은 시간이라 식당은 한산하지만, ‘서동재 검사’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이들이 몇 있다. 동재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들을 맞이하고는, 심지어 멋들어진 필체로 사인까지 해준다...
** ** **
곧바로 강원철 전 지검장을 찾아간 둘은 한참 얘기를 나눈다. 고즈넉한 호수 주위엔 녹음이 우거졌고, 기울어가는 오후 햇빛은 부드럽고 따스하다. 판을 키우셨는지 저번보다 낚싯대 개수가 늘었는데도, 어망은 거의 텅 비어있다. 동재가 몰래 갸웃, 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목과 시선을 시선을 교환한다. 시목도 살짝 갸웃거린다.
해가 저물어가자 강 전 지검장은 주섬주섬 버너와 냄비, 매운탕 재료들을 꺼낸다. "자아 기대해라, 잊지 못할 맛을 보여주마." 지검장은 익숙한 솜씨로 요리를 시작하고, 그 옆에서 동재는 벌써 모기가 있다며, 제가 모기 다 잡겠다며 이리저리 설친다. 흐흥 그놈 참 껄껄- 지검장이 즐거워한다. 시목은 피곤이 몰려와서 눈을 깜박이지만 졸립진 않다. 시목은 문득 지금 편안하다고 느낀다... 그리고는... 오늘 추모한 그 사람의 웃음소리를 떠올린다. 시목이 갓 수습이던 시절, 이창준 부부장검사는 시목과 다른 수습 한 명을 종종 지검 앞 매운탕집이며 매운 찌개집에 데려갔다. 밥 한 끼 사치도 없을 만큼 참 소탈한 사람이었다. 일에 임하는 자세는 늘 빈틈없이 올곧았고, 눈빛은 상대를 찌를 듯 맑고 깨끗했다. 변해가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고부터, 시목은 자기도 모르게 매운 음식을 잘 안 먹었다. 누가 먹이면 모를까, 스스로 찾아 먹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원철 당시 부장님은 종종 얼-큰한 국물이 땡긴다며 매운탕집에 부하들을 끌고 가곤 했다...
시목은 후후 불어가며 매운탕을 먹는다. 매운맛 마니아 지검장님이 양념을 어찌나 세게 했던지, 먹다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다. 동재는 신나서 떠드느라 통 안 먹다가 핀잔을 듣는다. “야야 서동재야. 거어 원기 회복하려면 많이 먹어야지. 쏘가리 먹어라 쏘가리.” 예상과 달리 냄비 안엔 통통한 물고기들이 그득하다. 이 중 지검장님이 직접 낚으신 지분은 몇 퍼센트일까. 일단 커다란 고기들은 아닌 게 확실하다. 아마, 지검장님이 한 번씩 건져 밥에 얹어주시는 쪼꼬미들이 본인 수확인가보다.
식사를 마치고 시목이 자연스레 뒷정리를 맡는다. 서검사와 지검장님이 산책하는 사이, 오늘의 두 번째 설거지를 재빨리 끝내놓은 시목은 여진에게 연락한다. "얼마나 피곤하겠어. 재워줄게요, 맘 놓고 쉬고 가요. 이따 본청 앞에서 봅시다 응?" 시목은 잠시 고민한다. "저어... 숙소 알아봐 놓았습니다." "에헤이! 숙소 방 빌릴 돈으로 대신 맛있는 거나 사 먹읍시다. 오전에 봤잖아요, 미닫이 이편저편으로 공간이 얼마나 넓은데!! 그리고 소파 되게 편해요." 시목은 여전히 저어한다. "왜 뭐야 전에 통영 시절에도 자고 갔자나요! 옥탑방에서!" "그으. 그때는 평상이었잖습니까." 추울까 봐 평상 위에 전기담요에 미니 텐트까지 잔뜩 부산을 떨며 설치해주곤, 결국 평상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얘기하다가 밤을 새웠더랬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여진이 깔깔 웃는다.
"그 뭐야, 우리 집 소파, 피로를 풀어주는데 좋다고 엄청 광고해서 얼마 전에 샀어요. 삶의 질이 확! 올라갔어." 여진이 너스레 떨며 설득한다, 실제로 그 소파는 굉장히 편해서, 여진은 침대보다 소파에서 자는 일이 더 많다. "편하게 푹 쉬고 가요." 시목은 잠시 더 고민하다가 끄덕거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는 무슨! 쓰읍!"
해는 한참 전에 저물었고, 동재가 아무리 설쳐도 못 잡을 만큼 모기도 많아졌다. 모닥불도 이제 사그라든다. 원철이 기지개를 켠다. "자아-나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지, 가서 쉬어라!!"
"서동재야. 넌 싸돌아댕기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하지, 왜 자꾸 오냐, 응?" "아유, 어떻게 안 옵니까" 동재가 아양을 떨고, 원철은 기분 좋게 털털 웃는다.
"황시목아, 너는 바로 원주로 가냐?" 그저 멀뚱, 하는 시목. 본인에 대해 뭘 물어보면 잘 대답 안 하는 시목에게 익숙한지라, 원철은 답을 기대하진 않고 바로 다른 말을 이어서 하는 편이다. "그래 빨리 가서 좀 쉬어라. 야, 저눔보다 니가 더 회복이 필요해 보인다야. 아주 그냥 눈밑이 시커매."
옆에서 동재가 지나가는 말처럼 읊조린다. "어디 보자... 내일은 일요일..." 데굴데굴 큰 눈을 굴리는 서검사. 뭔가를 궁금해하는 듯한 서검사 표정이 시목에겐 살짝 불길하게 느껴진다. 지금 경감님과 만나는 걸 알면 시끄러울 것 같다... 이따가 서검사가 태워준다 나서면 곤란하게 생겼다. "저어 서검사님. 근처 읍내까지만 태워다 주시면,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어떻게 그러냐~~! 야, 당연히 내가 태워줘야지. 아까 거기 주차장에서 너 차부터 챙겨야겠네? 가는 동안 좀 자라!! "
"음.....(시목은 더 귀찮아질까봐 바로 동의한다) 네, 감사합니다."
인사 잘 하는 국민학교 모범생들처럼 나란히 깍듯하게 인사하고 떠나는 녀석들, 원철은 정말 담임선생님처럼 흐뭇한 얼굴로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기지개를 쭈욱 편다.
흔들리는 조수석에서, 시목은 원철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가 동부지검을 떠난 일을 생각하다가, 올해 있었던 일들을 생각한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원주로 가기 전 꾸었던 서부지검 꿈에 대해서도 생각하다가... 문득 서검사 쪽을 돌아본다. 서검사도 생각이 많은지 웬일로 아주 조용하다. 진지한 표정에 또렷한 눈가, 적당히 살이 붙어 건강미를 되찾은 건장한 팔뚝. 서검사가 건강해진 걸 보고 시목은 ‘안심’이란 걸 하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시목은 다시 상념으로 돌아온다. 오늘, 그분이 그렇게 된 지 2년인 오늘이라는 날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념들 사이를 헤매고 다닌다. 어느 기억 자락을 붙들고, 어쩌면 놓고 싶지 않은 어떤 장면들을 꼬옥 쥐고는 돌이켜본다... 그러다가 어느 즈음에 고개를 슬쩍 떨군다. 까무룩 잠들어버린다. 한경감님 차가 아니라면 남의 차 타는 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시목이 이렇게 잠에 빠져들다니. 너무 피곤해서일까. 이제야 비로소 서동재라는 사람에게 경계를 풀어서이기도 하리라...
야, 야, 툭툭 치는 서검사의 음성에 흠칫 깬 시목은, 일시 정지했다가 이내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차는 멈춰 있다. 내가 잠들었구나... "감사합니다." 대충 꾸벅하고 가방을 챙겨 내리는 시목의 뒤로 동재가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시목은 내리자마자 여기가 추모공원 주차장이 아닌, 경찰청 앞 보도임을 깨닫는다.
황당해하는 황시목의 눈빛! 아주 흔치 않은 저 표정!! 동재는 내적 환호성을 지르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한다. "아 내가, 서울 생활을 안 하다 보니 자꾸 길이 헷갈리네. 그 뭐야, 서울 사는 사람한테 태워달라 해라." 빙글거리는 말투, 신이 나서 죽겠다는 표정. "또 보자아~~" 서검사는 유쾌하게 외치며 쌩 떠나버린다. 덩그러니 남겨진 시목은 잠에서 깨려는 듯 머리를 가볍게 흔든다. 자꾸만 갸우뚱, 하는 시목.
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본청 건물을 올려다본다. 한경감님도 무척 피곤하실 게다. 밤을 그렇게 새고도 종일 일하셨으니... 반나절 내내 서검사와 있었던 나보다도 훨씬 힘드시겠지.
10시는 넘어야 퇴근한다고 하셨으니 아직 좀 남았다. 시목은 잠시 고민하더니, 근처 테이크아웃 디저트집을 검색한다. 미간을 살짝 찌푸려가며 한 곳을 정하고는, 타박타박 그곳을 향한다.
한경감님은 깨물면 바삭, 소리가 나는 타르트를 좋아하신다. 허브티도. 푹 쉬어야 하는 밤이니, 캐모마일이 좋겠지.
<4화 끝>
https://bori-shrimp.postype.com/ 포스타입에도 연재됩니다. Daum에서 '비숲2 나아가다'를 검색하셔도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공유하실 때엔 출처를 남겨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보리새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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