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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숲 시목여진] 2차 창작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비숲2]_[나아가다]_2화. 내부고발

by 보리-새우 2020. 10. 18.

*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보리새우입니다.

 본 연재글 '비숲2 그 후_나아가다' 中 2화 & 3화만 정민하 검사를 주인공으로 서술됩니다.  

2화_내부고발: 여진&민하 공조 (#민하 관점 episode_시간 배경 2019.05.15 수요일)


 <2화. 내부고발>

 

 

 

 

       삑-, 교통카드 단말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만, 민하는 앞쪽만 응시하며 홀린 듯 걷는다. 생각 속을 부유 중이다.

       속도를 낸 지하철이 터널의 어둠 속을 꿰뚫을 때, 덜컹거리는 차창에 비치는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리하다. 애써 살짝 웃어본다. 첫 출근 할 때도 이렇게 하얗게 질려서 굳어있었지.

   

       첫 출근날 민하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검찰청에선 늘 찬바람 쌩쌩 불고 엄숙할 줄만 알았더랬다. 그러나 13년 차 까마득한 선배님은 상상했던 모습과 다소 달랐다. 일하는 중 노동요 개념으로 푸념도 하고 수다도 떨고 농담도 하고, 심지어 초코바 같은 걸 꺼내 우물우물 씹어먹곤 하는 형사 1부 서동재 부부장. 편하게 지내도 돼! 권위의식 없는 선배님은 잔뜩 각이 잡혀 있던 민하의 긴장을 풀어줬다. "일이 이렇게 고된데, 한 번씩 피식피식 웃어라도 가면서 살아야지, 안 그래?"  대학 시절 스터디하자고 모여 놓고선 친구들과 만담을 늘어놓았던 것처럼, 그런 즐거움이 있어서 힘든 공부를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아, 직장생활에도 긴장을 풀어도 되는 순간들이 있구나. 민하는 첫 직장에 꽤 수월하게 적응했다.

       실무관님과 계장님도 우리 방은 분위기가 편하다며 은근히 자랑하고 다녔다. 다른 방의 동기들은, 야아, 그래도 그렇게 후배 챙겨주시는 분은 드문데,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른 방에선 안 그렇구나, 그제야 알았다. 선배님은 엉뚱한 데에서 챙겨주려 들기도 했다. 민하의 연애 상담을 해준다기에 혹시 꼰대 기질이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선배의 감각은 놀랍도록 젊었다. 당시 민하는 CC로 시작한 오랜 연인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점쟁이도 아닌 분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상담을 먼저 제안하셨을까. 실제로 선배의 조언은 도움이 됐다. 특히 ‘지독하게 바쁜 와중에도 상대의 서운함을 방지하는 비법’ 이. 이건 분명  선배 본인의 치열한 삶에서 나온 지론일 터였다. 열정적 수강생이 된 민하가 그 비법들을 적극 써먹자 놀랍게도 관계가 점차 회복되었다.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하자 거 보라며 우쭐해하던 선배는 문득, ‘상담을 잘하면 뭐하냐, 내 사랑은 망했는데’ 하며 처음 보는 슬픈 얼굴을 했다. 민하는 그렇게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사용하는 표현들로 보아 낭만 병이 깊어 보였다)’에 관한 얘기까지도 듣게 됐다. 별거 중이며 부인이 좀체 만나주질 않는다는 아픈 얘기까지도 들었다. 선배는 다른 동료들에게 라면 죽어도 안 했을 자기 얘기를 들려준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민하가 그를 편견 없이 대한다는 걸 느껴서 그랬으리라. 그렇게 선배와 후배는 나이 차이와 직위 차이를 뛰어넘은 일종의 우정 내지는 동지의식을 형성했다. '사랑이라는 밑지는 싸움'  앞에서 서로 얘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 주는 ‘전우’로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민하는 서동재라는 사람 자체를 존경했다, 일에 있어서도. 까마득한 13년 차 선배이시다, 하는 필터를 눈에 끼우고 봐서라기보단, 분노할 곳에 분노하는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둔 아버지라 더 그럴까, 뻔뻔한 가해자들을 꾸짖는 목소리가 때론 건너편 검사실까지 들리곤 했다. 또한 그는 현 소년법의 허술한 점을 비판하기도 했고, 한편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재비행률을 낮출 사회적 시스템이 통 미비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너 그  TV 나가신 천종호 선배님 알아? '호통 판사' 그분. 내가 그분처럼 훌륭하게 살 순 없어도, 그분 생각엔 참 동의해. 나도 그래서 자꾸 큰 소리를 내나 봐. 법적 처벌 외에도 반성할 기회를 어떻게든 줘야지 하고."  쉬어버린 목청을 가다듬으며 그런 얘기를 한 날도 있었다.

        민하가 일에 대한 의견을 말하면 서선배님은 꽤 진지하게 경청해줬다. 그럼에도, 들어준다고 해서 의견을 반영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거의 늘. '야, 어떤 사건이든, 파야 할 부분이 따로 있고 조용히 마무리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어. 너 이거 나한테 아주 중요한 거 배우는 거다?'  다정한 말투로 퇴짜 맞고 나올 때면, 선배 말씀대로 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법철학 교수님이라면 사소한 자기허용이 부패의 시작이다, 하고 호통으로 일깨우셨을 텐데. 하지만 13년 차 경력의 선배가 한 말엔 자연스레 어떠한 신빙성이 부여되었고, 민하는 제가 부족하고 뭘 몰라서인가 하곤 입을 다물곤 했다. 마음속에 늘 혼란이 남았지만, 자기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서선배님을 탓해 본 적은 없었다. 혼란은 자신의 몫이었고, 환경을 탓하는 대신 계속 정신 바짝 차리고 걸어야 한다. 이 혼란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지 말고. 생각하는 걸 그만두는 순간 악의 일부가 된다.... 한나 아렌트 저서의 한 구절.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 모두는 성실한, 그것도 매우 성실한 악행자가 될 수 있다'...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서 되풀이되었다. 그 구절을 접했던 법철학 수업이,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집중했던 그 오후가.

 

       지하철이 덜컹, 흔들린다. 앞으로 맨 백팩을 꽉 껴안자 그 안의 봉투가 바스락, 소리를 낸다. 백팩 캔버스 천 너머로 느껴지는 두툼한 봉투의 윤곽. 손끝의 감각에 정신이 바짝 몰린다. 문득 궁금하다, 서선배님께서 알면 뭐라고 하실까,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이게 뭐냐! 야, 너어 그동안 뭘 배운 거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이리 내놔, 나 줘. 너 앞으로 인생 조지고 싶은 건 아니잖아? 이런 거 찌르고 다니는 놈 봤는데, 그러고선 무사하지 못해! 온통 욕먹고 좌천당하고 미운털 아주 제대로 박히는 거야, 길이길이!! 야, 옳은 일 했다고 누가 알아주냐, 응?? 하아... 너 이제 겨우 1년 차다! 내가 뭐랬어? 무조건 버텨서 적어도 부장은 달고 나가는 거야, 한참 남은 것 같지만 십수 년 금방 간다? 너는 부장 달아도 마흔 즈음일 테니 그때 나가도 변호사 하기 딱이야, 응."

       서선배님의 말투와 사고패턴이 너무 익숙해서,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게 뭘 가르쳐주려 해왔는지 알기에, 그전에는 지금 같은 일이 없었음에도 선배의 반응이 선명하게 상상된다... 민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이제 더는 안 된다. 알고도 생각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면 행동해야 한다.

 

       서선배님 실종 수사 과정에서, 민하는 자기가 생각의 의무를 망각해왔음을 깨달았다. 박광수 전 변호사 사망 관련 보도를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실종 수사 도중 그 세 개의 파일에 대해 알릴 생각을 못 한 자기 자신에 대한 가책이 밀려 올라왔다. 별 게 아닌 사건은 없다,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작은 건 줄 어떻게 아느냐 꾸짖는 황검사님 앞에서, 문득 아찔하게 자각했다. 저 사건이랑 연관되어 서선배님이 납치되신 거라면, 그랬는데도 내가 그 연두색 파일 얘기를 안 한 거라면...! 민하는 떨리는 속을 붙들고 곧장 남양주서 교통과에 전화해 봤지만, 그쪽에선 시간이 지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아아.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1년 전에도 비슷한 패턴이었을 것이다. "서검사님, 그날만 블랙박스가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추후 보강 요청할까요?", "야아아, 너 형사부 검사가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시보 때랑은 비교가 안 돼. 너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다간 못 버틴다?"   자기 자리로 돌아온 민하는 갸웃, 하다가 다음 일거리로 넘어갔었을 게다.

       선배가 가르친 방식에 편안히 젖어들었다. 아직 초임인데도 초심을 잃어갔다. '작은 건 묻어두는 거야~ ' 선배가 자주 하는 그 말에, 처음엔 안 되는데... 생각하기도 했지만, 민하는 서서히 그런 마음의 목소리에 둔감해져 갔다. 선배님 말씀대로 융통성도 필요한 거겠지 하는 합리화와 함께. 그렇게 침묵과 무감각에 익숙해진 바람에 연두색 파일에 대해 떠올리지도 못 했던 거다. 만약 정말로 박광수 사건을 덮으려는 자들에 의해 서선배님이 납치되셨던 거라면, 선배님은 민하 자신의 그 침묵 때문에 잘못되셨을 거다. 이걸 계기로 민하는 이제 달라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제 절대로 안 된다. 다시는, 다시는 생각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환승해야 할 때다. 

       천호역. 8호선에서 5호선으로 환승한다. 이쪽 노선은 오랜만이다. 백팩을 꽉 안고 구석에 자리를 잡은 민하는 다른 승객들을 둘러본다. 평일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정말 많다. 제때 퇴근하는 직장인들, 하교하는 대학생들, 어르신들, 아이들. 낑겨 서다 보니 몸은 불편해도, 민하는 북적한 지하철을 싫어하지 않는다. 출근길 지하철에선, 다들 삶의 현장으로 떠나는구나 -나도 그중 하나, 하고 괜스레 희망찬 생각을 해보게 되고, 퇴근길엔, -다들 이렇게 살아가지~- 제이레빗의 노래처럼 살짝 일렁이는 애틋한 마음과 함께 하루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승객 중엔 민하 또래가 많다. 너희 또래에 계속 취업준비하는 사람도 많고 아직 학교에 있는 사람도 많다, 너흰 특별한 젊은이다 하며, 직장에선 젊은 검사들에게 자꾸 무게를 불어넣는다. 그래서일까,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권위의식을 품은 동기들을 많이 봤다. 민하의 생각은 다르다. 무게, 진짜로 필요한 무게는 그딴 게 아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느껴야만 하는 책임감이다. 이분들이 안전한 사회에 살 수 있도록 법집행의 책임을 가진 집행자로서 가져야 하는 책임감. 특권의식에 물든 동기들은 정작 뭔가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되면 초임이라는 사실 뒤에 숨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시민 앞에 가져야 하는 책임감은 분명, 어리다고 초년생이라고 해서 방기해서는 안 될 무게이다.

       연거푸 문이 여닫히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간다. 콩나물시루가 되어버린 객차 안에서 누군가 민하 발을 밟곤 미안합니다, 할 때에도 멍하니 끄덕, 할 뿐이다. 외부 자극은 민하의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정검사님, 할 수 있겠지요? 지긋이 신뢰를 전하시던 한경감님의 맑은 눈빛을 떠올리자 갑자기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도 명료하게 와닿는다. 이 봉투가 뭘 담고 있는지, 이 봉투들을 갖고 내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네 시간 전, 민하는 한경감님과 나란히 백중기 자택 앞 화단에 앉아있었다. 지검 상사들 몰래 와야 했던 민하는 월차를 썼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경감님은 반차를 쓰고 오셨다. "우리가 뭐 못 할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보국장을 설득하지 못한 한경감님은 세곡 따돌림 수사에 비공식적으로만 참여해야만 했다. 다른 일거리 폭탄까지 떠안은 바람에 매일 야근으로 밤새 처리해놓곤 반차를 내서 달려오시곤 했다. 수면부족 상태에서도 경감님의 예리함과 카리스마는 숨겨지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 질러 대던 동두천서장 앞에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냉철하게 대치하던 그 강렬한 모습, 상대를 일갈하며 흔들어놓곤 회유와 설득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는 화술... 노련한 형사의 모습이자 유능한 정보경찰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모습에 민하는 흠모의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유연한 리더십, 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서선배가 심어놓았던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완전히 뒤집히는 계기였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황검사님이 한경감님을 매우 깍듯하게 대하는 이유가 조금 궁금했는데, 이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진이 동안이라 그랬을까, 민하 눈엔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더욱 벌어져 보였다...)

       한경감님의 경우와는 달리, 민하에겐 공식적 수사권한이 주어졌다. 의정부지검에선 백경사 외 지구대원들의 뇌물 사건을 추가수사해야 했는데, 의정부지검 형사1부 부장 심의섭은 해당 사건을 초임 정민하에게 맡기라고 지시했다. 대충 마무리할 생각으로 그랬을 게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초짜인 데에다 '서동재 방 출신'이니 덮으라는 거 덮는 법은 잘 배웠겠지, 하고. 하지만 민하는 그곳에 와 있었다, 백중기의 죄와 더불어 자기 지검 상사들의 죄 또한 밝히기 위해.

         증언과 증거자료를 내놓도록 백중기를 설득 내지는 압박해야만 했다. 정황상 형사1부 심의섭 부장은 백중기로부터 뇌물을 2차 상납받았고, 형사3부 윤해영 부부장은 그 사실을 알고도 은폐함으로써 승진과정에서 특혜를 취했다. 서검사 실종 사건도 맡았던 윤 부부장은, 탁월한 업무능력에 냉철한 성정 그리고 때때로 바른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에 민하가 흠모해오던 선배였다. 실종 수사 과정에서 민하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하긴 했지만, 민하 자신이 부족해서라 받아들였을 뿐 그로 인해 존경심이 바뀌진 않았다. 게다가 위쪽으로 갈수록 드문 여성 선배님이라 롤모델로 생각했는데... 그랬던 선배의 민낯에 민하는 몹시 괴로웠다. 그럼에도 그런 이유로 흔들려선 안 되었다. 아직 정황과 심증일 뿐, 물증을 잡아야만 했다. 백중기가 증거를 인멸하기 전에 어떻게든, 어떻게든 뭐라도 얻어내야만 했다.


        백중기는 둘을 일단 집에 들이긴 했지만 금방 다시 쫓아냈다. '정식으로 소환조사를 하시던지' 말하는 그 얼굴엔 전에 '검사님 선배들이 날 풀어줬는데, 그걸 뒤집겠다고, 그 손으로?' 하던 때의 뻔뻔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한테도 고민할 시간을 줘야지’ 백중기는 가족과 통화하겠다며 잠시 나가 달라 했다. 백경사도 경찰이었으니, 어디까지가 인권침해에 해당하는지를 잘 안다... 그 사이 증거인멸을 할 우려도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나간 둘은 화단 가장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정검사님, 있죠, 민하의 어깨를 톡톡 치는 한경감님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쩍거렸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백경사가 입을 여느냐엔 지금 지구대원들 영향이 아주 클 수 있어요." 민하가 흠칫하고 돌아봤다. 

       "개수대에 그릇이며 수저 개수가 많았어요. 처자식은 처가로 가버려서 혼자 지낸다는 사람이."  "그 말씀은..?" 민하가 눈을 크게 떴다.

       “지구대원들이 이번에 모인 김에 곁에 맴돌며 백경사를 못살게 굴고 있을 가능성, 생각해 봐야 해요, 아주 끈끈하다고 생각하는 관계도 한순간에 일그러질 수 있어. 그전에 끈끈했을수록, 변형되고 나면 더 악랄하고... 대원들 이번에 신상이 제대로 털렸어요. 인터넷상에서 온통 욕먹으면서 다들 실직을 했어. 제정신이 아니고 악에 받쳤을 거예요. 백경사 혼자만 빠져나갔다는 게 이젠, 백중기에겐 죄책감, 대원들에겐 빌미가 되는 거죠. 백중기 계좌내역에 최근 현금 인출한 기록 있었어요?" 

       민하는 미처 생각도 못 했던 부분... 이게 백경사의 입을 열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인가. “네, 있었습니다!” “왜 뽑았대요?” “심문 과정에선 '가족에게 전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가족이면 굳이 현금을 뽑아 전하는 것 말고도 방법이 많겠지?” “!!!”

       음... 경감님은 다시 턱을 짚고 곰곰 생각했다. "탁자 밑에 신경안정제 처방전이 있었어요. 종류로 보아하니 오래 먹었던 약이 아니라, 최근 먹기 시작한 거 같아." 경감님은 눈썰미가 정말이지 맹금류 같다... 민하가 물었다. "그럼 지구대원들 때문에 먹는 걸까요?"  "모르죠. 안정제를 먹을 만한 상황이긴 해요. 납치 살인범으로 의심받아 며칠씩 갇혔고. 처자식도 처가로 가버리고. 송경사님 따돌림이 이슈화되며 신상도 털렸고. 그리고 만약 양심이 남아있다면 죄책감도 들겠죠."


       그때 경감님의 폰이 울어댔다. 이미 복귀 시각을 넘겼다. 더 남은 반차도 없고, 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깨지고 근무지 이탈로 징계를 먹을 상황. 들어가야겠다며 얼굴 가득 미안함을 담던 경감님.

       "혼자서 마저 할 수 있습니다 경감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방금 제가 한 얘기,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에요. 하지만 의외로 돌파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경감님은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멈췄다. 급히 가야 하는 상황인데도 곰곰 망설이다,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다가, 결국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인간 입을 여는 데에 도움이 될 분이 계세요. 그분이 지금 시간이 되실지는 모르지만, 정검사님이 괜찮다고 한다면, 연락을 드려볼게요. 그분께 와달라고 할게요." 영문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름에도, 민하는 한경감님이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하는 마음으로 동의했다. 그제야 경감님은 끄덕, 하더니 황급히 달려가서 시동을 걸었다. 경감님의 뒷모습에 민하의 초조한 눈길이 따라갔다.


       시간이 꽤 흘렀다. 지금 저 집 안의 인간이 usb를 솥에 삶고 있는 건 아니겠지? 폰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거나?... 불안감을 달래 보려 폰으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있던 민하의 시야에 짙은 남색의 구두 한 쌍이 들어와 멈췄다. 강렬한 눈빛의 여성, 아, 이분은... 최빛 전 경찰청 수사혁신단 단장. 아아. 이분이었구나. 폭 고개 숙여 인사하는 민하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혹시 담당 검사님인가요? (백중기 집을 가리키며)"

       "네...의정부지검 형사1부 정민하라고 합니다."  

        "정검사님. 반가워요." 짧은 악수 후 최빛 전 단장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 이제 경찰도 아니고, 수사에 관여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주임 말 듣고 왔어요, (턱짓으로 백중기 집을 가리키며) 설득에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저 사람이 꼭 들었으면 하는 얘기를 전하려고요. 괜찮겠습니까?"

       얼마 후 마침내 문이 다시 열렸다. 누구와 통화한 걸까, 백중기는 더 초췌해져 있었다. 최빛 전 단장을 알아보자마자 백중기의 얼굴은 싹 질려서, 더 나빠질 것도 없는 낮빛이 거의 까매졌다. 그도 그럴 만하다, 납치 살인범으로 의심받을 때 마주쳤던 경찰 윗사람이니.

        단장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대원들 때문이에요?"  한경감님이 가면서 최 전 단장님께 부탁한 게 이거였구나. "진짜로 당신을 괴롭히는 건, 대원들이 찾아와 빨대 꽂고 지랄하는 지금 상황 자체가 아냐. 당신 때문에 걔네가 첨 선 넘었고 그래서 인간 말종이 돼버렸다는 그런 가책이야. 죄책감."  "뭘 알고 하는 소립니까?" 심문받을 때처럼 백중기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을 연방 문질렀다.  "끊어내, 그 놈들. 걔들이 엇나간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 죄책감이 진짜로 백경사 당신 몫일까? 당신이 그쪽으로 이끌었다고? 아무리 끌어들이려 해도 안 그럴 사람은 안 그래. 그 예시가 한여진 주임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서 어떤 술수를 썼는지는 여기서 밤새 말해도 모자라, 그렇게 징하게 끌어들여도 꿈쩍도 안 했어 한주임은."  하아, 단장은 잠시 멈추곤 괴로운 숨을 뱉었다. "상황 탓하고 환경 탓하는 건, 이미 자기가 여건만 주어지면 썩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인 거지. 대원들 다 한참 나이 먹은 성인이죠, 길을 잘못 길을 들어도 그걸 다시 벗어나려는 의지, 실천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고. 그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대원 새끼들, 송경사 죽음에 가책이나 제대로 느끼나? 특히 이대성 그 새끼는 한주임 얘기 들어보니까 언행이 아주 가관이던데?"  

       세게 압박하는 길을 선택하셨나 보다. 옆에 있는 민하는 단장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본인까지 가슴이 떨렸다. 한경감님이 이분으로부터 취조 기법을 배우신 거였나.

       "난 지난해에 이미 당신들 사건 알았어요. 뇌물죄 축소된 정황도, 타살 의혹도."  자리에서 일어난 단장이 백중기에게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정보국엔 온갖 정보가 올라오니 경찰 내부 일은 당연히 손바닥 안이지. 뇌물죄 축소 정황을 포착했을 때 송경사 사망 서류를 다시 읽었어. 읽고서 이상한 점 찾았던 것도 나고, 바로 덮었던 것도 나야. 타살이라도 덮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동두천서장이랑 다를 거 하나도 없었던 거지."  "다 던져버린 지금에야 묻죠, 타살 아닌 거 확실해? 타살의혹점 지금도 열려 있어,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는 안 되겠지만. 그래 지금은 증거가 없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사람으로 살 수 있어? 제정신으로 살 수 있냐고. 송경사 손에 있던 당신 DNA는 뭐야? 대답 안 해?"  민하는 깨달았다: 타살 혐의를 캐는 게 목적이 아니다, 백중기의 죄책감을 극도로 끌어내서 약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다. 송기현 경사가 죽을 만큼 괴로웠다는 것으로부터 격렬한 가책의 감정을 끌어내는 게. 

        "한주임이 그때 나한테 보고했어. '자살이지만 타살'이라고." 

       단장의 전략은 효과를 거뒀다. 이성을 잃은 듯한 백중기는 타살 절대 아니라며 울부짖듯 열변을 토했다.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아니 그 애들이, 지구대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데, 그렇게 힘들게 같이 버텨왔는데, 어떻게 옷을 벗도록 놔둡니까?" "따돌림? 나도 나름 신경 쓰려고 했어요!!! 왜 몰라, 나도 젊을 때 당해 봤어 그런 거, 어느 조직이든 그런 거 없어? 다 이겨내면서 사는 거잖아... 못 버티는 놈이 약한 거지"  마지막 말은 분명 진심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미, 물꼬가 터져버린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민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젠 자기합리화 그만하시죠. 본인도 겪어봤다면 더더욱 멈추셨어야 합니다."  마침내 늘 뻔뻔함과 거짓말로 일관하던 사람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머리를 팔로 감싸고 괴로워하는 동안 단장과 민하는 잠자코 기다렸다.

       단장은 쐐기 박듯 일갈했다. "지금 백경사 당신은 당신 몫 하느냐 기로에 있어요. 잘못된 걸 바로잡는 데에 늦었다는 건 없어. 아무리 늦었다 싶어도 바로잡아야 하고, 바로잡을 수 있어."  백중기는 여전히 얼굴을 묻곤 잠잠했다. 

       민하가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최빛 전 정보부장님은... 스스로 그 높은 직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한경감님을 전과자 만들어  내부고발 막고 그 자리에 계실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다."  단장이 민하 쪽을 돌아봤다. 경감님께 들었습니다, 민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단장은 마지막으로 일갈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 비겁한 겁니다. 그런 이유로 계속 입 닫으면, 하던 대로 하면 결국 그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되는 거야. 그때 당신도 그랬겠지, 이미 이렇게 된 거 대원들 지켜야 한다고. 그게 결국 무고한 송기현 경사를 그렇게 만들었고."  말을 마친 단장은 이제 검사님 턴이야, 하는 눈짓을 보냈다. 이제 민하가 본론을 꺼낼 때였다.

       "왜 저희 지검의 잘못은 덮어 두시죠? 뇌물 수수, 사건 은폐, 공범이잖아요. 윤해영 부부장도, 심의섭 부장도."   백경사가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정확한 이름이 나오는 걸 듣고 당황했는지 안색이 확 질려 있었다.

   

           민하가 조용히 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틀었다. "몰래 녹음한 거라 법적 효력은 없지만, 저희 지검 윤해영 부부장과 심의섭 부장입니다."  녹음 파일 속 두 상사의 대화가 재생되는 사이 민하의 미간에 고통스러운 주름이 잡힌다. 반복해서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상사들의 민낯을 보는 괴로움에."심 부장은 뇌물을 수수했고, 그걸 묻어준 윤 부부장은, 송경사의 뇌물 제보를 직접 받았으면서도 침묵했습니다. 송경사님은 검찰마저도 진실을 묻어버리자 인해 결국 방법이 없다는 절망에 빠지셨습니다." "왜 저희 지검의 문제들은 묻어두세요? 왜 입을 열지 않으시죠? 잘못한 사람 공평하게 다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검에서 진술하실 수 없어서라면 여기서 말씀해 주세요."   

         얼굴이 희게 질려서는 코끝을 자꾸 만지작거리던 백중기는, 거푸 도리질 치며 부인했다. 죄책감으로 얼룩진 얼굴 위에 다시금 떠오르는 뻔뻔한 표정. "젊은 검사님, 참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네" 와중에도 비아냥거렸다. "말단이 위를 찌르는 게 가능하다고 믿어요? 그건 그렇고, 지검 뇌물이라니 진짜 난 모릅니다."  또 말초신경에 피가 부족해진 걸까, 백중기는 손을 문지르며 딴청을 피웠다.

       "선배이기 앞서, 의무를 저버리고 사회를 해한 이들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합당한 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할 겁니다. 백중기 씨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요. 연루된 사람 더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백중기는 계속 시선을 회피했다. 

       "보복성으로 형량 늘릴까 봐, 그래서인가요. 기소권을 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지검 윗선 비리는 입 다무시는 건가요? 그런 거 불가능하게 제가 막을 겁니다. 보복성 형량 증대 같은 건 없어야 하고 없을 겁니다. 심 부장과 윤 부부장도 반드시, 잘못한 만큼 벌을 받을 겁니다."..."백중기 경사님, 이미 나온 뇌물 수수 혐의와 따돌림 관련 혐의만으로도 결국 감옥에 가실 겁니다. 공정하게 딱 해당하는 형량만큼 받고 형 사세요. 정말로 송경사님께 한 잘못, 속죄하고 싶으시잖아요..."

         속죄, 라는 말에 움찔하면서도 여전히 백중기는 도리질했다. "말만 쉽지. 불가능한 일이잖아? 하아... 형량 막 때릴까 봐 무서운 거 맞아요, 그래서 어쩌라고. 사실이 그런데. 그 사람들은 빠져나가서 그 뭐야 변호사 같은 거 하고 잘 먹고 잘 살겠지. 나만 감옥에 오래 썩고." 

     

         민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가능한 일 아닙니다. 한경감님께 제가 지금 바로 갈 겁니다. 백경사님의 진술은 경찰청에서 처음 확보한 게 될 겁니다. 증거들이 의정부지검으로 들어가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게 되겠죠, 하지만 한경감님께 가면 다릅니다. " 

         한동안 잠자코 지켜보던 최빛 단장이 입을 열어 덧붙였다. 특유의 날카롭고 냉정한 목소리. "내가 정보국 전체를 바로 얼마 전까지 책임졌어요,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알아. 수사권싸움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백경사도 알죠, 뭐 당신들도 그 희생양인 셈이지. 지금 당신들이 한 짓들 까발려지며 경찰이 온통 욕을 먹고 있어. 근데 관할지검에서 뇌물을 상납받고 따돌림도 은폐했다? 이건 반격도 아주 제대로 반격할 기횐데 정보국에선 크게 터드릴 겁니다. 언론에선 일제히 보도할 거고. 국민적 여론은 이쯤 되면 큰 압박이고, 검찰에서도 비리검사들 쉴드 절대 못 쳐. 그 사람들, 제대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고."

         남은 힘을 끌어모은 민하는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심부장은 일부러 초임검사에게 맡기고는, 시키는 대로만 할 거라고 속단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저 여기 와 있습니다. 저 제대로 할 겁니다. 갖고 계신 자료. 모두 주세요. 주셔야 합니다."

       백중기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마음을 정했다. 비척비척 걸어 나서는 그를 민하와 단장은 조용히 따라 걸었다. 숨긴 장소를 찾아가는 거겠지. 십여 분쯤 걸었을까, 백중기는 자기 동생 집이라며 한 빌라에 들어가더니 꽁꽁 싸맨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자기 집에 두지 않았던 바람에, 서동재 검사 실종 수색 당시에도 들키지 않았단다. 다시 자택으로 돌아와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기까지, 백중기는 모든 힘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맥이 없었다. "협박하려고 모아놨어요. 만일의 경우에 협박하려고. 근데 그 당시엔 알아서 덮어주길래, 그래서 여태 모아놓기만 하고 꺼내질 않았어요." "언론에 까발려지고 신상 털리고 하니까 이번에 꺼내려고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울컥하는지 백중기는 입을 다문다.  

       "아까 검사님이 물어본 거 맞아요. 예전부터 뇌물 받으면 일정 부분은 심부장한테 줬어요. 몰라 모르긴 몰라도 그 인간 나한테만 받았을 리 없어요. 뭐 유흥가 단속반이 우리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이 근방에 유흥가가 보통 많아?... 걸려도 기소 안 당하려면 보험 드는 거라고, 그래서 바쳤어요. 내가 순진한 줄 아나, 처음부터 다 몰래 녹음해놨어요. 돈 주고받는 것도 몰카로 찍어놓고."  증언 내용을 녹음하는 동시에 자료를 꺼내 보느라 민하의 손이 분주했다. 전승표 전 동두천경찰서장- 백경사-김수항의 3자 대화 녹음파일도 있었다. 뻔뻔한 태도로 송경사 따돌림을 언급하는 김수항, 송경사가 뇌물수수 조사한다고 보고하는 백경사의 목소리, '송경사 쪼아서 조용히 시키라'며 윽박지르는 전승표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한경감님 추리대로 전승표는 그때 이미 다 알았구나... 이 사실을 안 후 전승표를 취조할 때 전승표보다 큰 목소리로 분노를 표출하실 경감님의 모습이 선히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백중기는 송경사의 세컨드폰을 꺼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 증거물 안에는,  윤검사가 송기현경사의 제보(뇌물 관련)받고도 은폐했다는 증거가 남아있었다. 재생을 누르자 흘러나온 윤검사와 송기현경사의 대화에 민하는 귀를 의심했다. 

       
 송경사는 뇌물에 대해서도, 대원들의 비인간적 악행에 대해서도 소상히 말했고, 이들이 아무리 엇나가도 담당경찰서에서 덮어버리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위의 잘못은 입 다물고 밑에선 문제를 제기해도 찍어 누르고. 경찰 스스로 바로잡을 수 없다면, 검찰에서라도 관할서 잘못을 밝혀주세요." "뇌물은 어디까지 아시죠?"  송경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검사가 밝히려는 의지로 듣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내 윤검사는 본색을 드러냈다.  "따돌림 당하고 계신다고요. 그걸 왜 저한테 알리시죠. 어느 조직이나 튀는 사람 주위엔 마찰도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잘 버텨보세요. 뇌물 얘기도 잘 들었는데요, 내가 할 일은 아닙니다. 알 만큼 아는 사람 같은데, 솔직히 말해봅시다, 지검으로 뇌물 바치는 게 한둘일까요? 기소권이라는 무기를 쥔 사람은 윗사람들이에요, 나 같은 사람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 사람들 건드리려고 해봐야 설친 사람만 다쳐요",  할 말을 잃은 송경사의 한숨 소리가 허탈했다. 윤검사는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경사님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못 참겠습니까?  뭐 찔러봐도 별수 없어요. 검찰에 연줄 닿은 인간들은 당연히 기소 안 당하지."  "검찰 쪽에 뭔가 설득해보고 싶으면 연줄부터 만들어보면 어때요?" 이 대목에서 송경사가 폰을 거칠게 집어 들고 뛰쳐나온 듯, 녹음은 이내 끝났다. 

 

         뇌물을 알고도 은폐한 것까진 이미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자랑스럽게 생각한 검찰 선배가, 법관이, 썩어도 이렇게 썩어서, 이 정도까지 도리를 저버리다니. 민하 마음의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고 송기현 경사님은 경찰뿐 아니라 검찰도 이 지경인 작태에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걸까.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민하는 야무진 손놀림으로 증거자료를 꽁꽁 싸 넣고 가방을 꽉 보듬어 안았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민하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잠시 담벼락에 기대야만 했다. 민하가 숨을 고르는 동안 단장은 조금 떨어져 서서 기다려줬다. 

       "저... 최 단장님."  말해보라는 눈빛. "서검사님 구조 때 단장님도 거기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주임이... 내 얘길 했어요?"  단장이 나직하게 묻는다.  한경감님과 단장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 민하는 모르는 두 사람의 내러티브... 그 무게가 아득해서 민하는 고개를 떨궜다. "네... 존경하는 선배님이 있으시다고."

       단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민하는 하려던 얘기를 꺼냈다. 

        "구조 장면을 TV로 볼 때...  그 순간에 저는 저 와글대는 기자들이 구조를 방해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사님이 끌어올려질 때 그 플래시들이 사위를 밝게 비췄습니다" " 저도 모르게, 언론을 성가시고 무분별하고, 때론 과도하게 마녀사냥을 하는 그런 존재로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날, 카메라 라인을 넘어와 일제히 비추던 플래시들이, 개개의 작은 빛이 모여 환한 조명이 되던 그 장면이, 어떤 메타포로써 기억에 새겨진 것 같습니다"

       단장은 고개 돌려 민하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후암동 사건... 당시 연수원에서 최근 사건사례로서 접했습니다. 황검사님에 대해선 그때부터 알았지만 한경감님도 특임 참여한 건 최근에야 알았고요. 그때,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았던 초기에, 언론을 통해 여론이 달구어진 게 상당한 동력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또각, 또각, 탁. 단장은 민하 바로 앞에 다가섰다. 단장의 표정이 미묘했다. 

       "이번에도 꼭 필요할 듯합니다. 은폐를 막으려면 어떻게든 여론을 활용해야... 그때 그 조명처럼요. 이슈화가 없다면 저희 지검 내에선 분명히..."

       확. 단장이 갑자기 다가서며 민하의 양어깨를 잡은 바람에, 민하의 말이 끊겼다. "본인이 힘들어질 건 생각 안 해요? 이슈화가 되면 진실이 밝혀진다, 그 생각만 들고 본인 입장이 어떻게 될진 생각 안 들어요? 정검사가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민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핏기가 가실 정도로 입술을 꽈악 물었지만, 이내 입이 떨어졌다.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순간 단장의 얼굴에 아주 복잡한 표정이 스쳐 갔다.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만두더니, 단장은 어깨를 놓아줬다. 미세하게 끄덕, 하며. "조만간 다시 봅시다." 

       꾸벅, 공손히 묵례하고 돌아선 민하는 종종걸음으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향했다.

 

       서대문역입니다. 안내 음성에 화들짝 놀란 민하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통과해 내린다. 경찰 본청에서 가장 가까운 역. 삑-단말음이 선명히 귀를 자극한다. 평소 아침마다 단말음을 들을 때면 아침잠의 남은 조각이 깔끔히 달아나곤 했다. 지금도 이 날카로운 소리는 여느 때처럼 정신을 명료하게 해 준다. 

       ‘한여진 경감님’으로 저장된 번호를 누르며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민하. 위로 올라올수록 확 따뜻해진 공기에 힘이 풀려 잠시 어지럽다. 부르르 한기를 떨쳐낸 민하는 타박타박 걸어가며 경찰청을 올려다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비스듬함에도 여전히 눈부시고, 저 건물 안엔 한경감님이 계시다. 진실을 향해 함께 나아갈 분이.

 

<2화 끝>

 

내용 중 언급된 '호통 판사' 천종호 판사님에 관해 참고한 링크를 첨부합니다. 알아보면서,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등 판사님께서 쓰신 책들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천종호 부산지법 판사 "판결 때마다 '공동체의 善' 고민하죠" _한국경제, 2020.05.24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20052401831

소년범죄, 엄벌주의 만연… 교화 vs 처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_세계일보, 2020.10.09 http://www.segye.com/newsView/20201008525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