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특임팀 모임 (시간 배경 2019.05.11, 시목이 원주로 내려간 지 약 한 달 흐른 시점)
은수 기일 직전 주말 토요일, 특임팀 사람들이 모이기로 한 날. 함께 서울로 올라온 시목과 호섭, 화순에서 상경한 영, 전날의 악착같은 야근으로 시간을 낸 여진, 조금 말라서인지 그전보다 진지해 보이는 정본까지. 함께 올 수 없는 윤과장도 마음으로는 애도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납골당 주차장에서 만난 이들은 들어가기 전 잠시 환담을 나눈다. 호섭은 검사님 운전 잘 하시더라, 하며 푹 잤다고 기지개를 켠다. 일체가 된 듯 목베개를 그대로 끼우고 내린 호섭을 영이 놀려댄다. 인사 나누는 와중에, 시목은 방금 들어오며 스쳐 지나간 차 한 대를 골똘히 떠올린다. 이곳을 방문한 후 나가는 서검사와 스친 게 분명하다. 차종도 차종이거니와 차량번호가 확실했다.
은수를 기리는 곳... 액자 속 활짝 피어난 그 미소 주위엔 시간이 멈추어 있다. 방문한 이들의 시간도 잠시간 함께 멈춘다. 묵념이 끝나곤 지친 듯 조용히 걸어 나가는 사람들. 정본도 굳이 분위기를 띄우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밥이 들어가자 다들 기운이 조금씩 난다. 2년이 벌써 흘렀네, 햐아. 서로 근황도 묻고, 왜케 야위셨어요, 건강 좀 챙기라며 서로를 타박하기도 한다. 함께이던 시절 에피소드들도 툭툭 튀어나온다.
술은 사람들의 생각을 말로 녹여낸다. 작년 이맘때 모였을 적엔 상실의 무게를 그저 조용히 공유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을 좀 더 열어 공유한다. 작년보다 조금은 더 밝아진 분위기는 익숙해져서 또는 잊어서가 아니다. 이젠 극복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할 때니까.
눈가가 살짝 부은 여진은 오늘따라 조용하다. 시목이 원주로 내려가기 전보다도, 여진의 직장 내 상황은 더 나빠졌다.
세곡지구대 따돌림 수사를 정민하검사에게 맡기며 시목은 메모를 남겼었다, '경찰청에선 덮으려고 할 겁니다.' 여진은 '덮으려는 경찰청'의 일원이 아니었다. 여진을 너무나 믿기에, 시목은 물어보지 않고도 그걸 알았다.
여진은 곧장 민하와 공조했고, 일주일여 만에 따돌림 사실의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해 민하에게 넘겼다. 검찰 측에서 이걸 경찰 이미지를 깎아내릴 호재로 여긴 탓에 따돌림 사건은 적극 이슈화되었고, 여진은 최빛 부장 일에 이어 또다시 경찰을 욕보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살짝 누그러들었던 정보국 사람들의 따돌림은 다시 심해졌다...
'한여진 주임. 최부장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새 정보국장은 부임 첫날 여진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최빛 단장을 몰아냈다는 이유로 여진을 박해하던 정보국 사람들에게, 그건 충격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최 전 단장님이 한주임을 미워하기는커녕 챙겨달라 부탁했다니, 하고. 단장님은 거기까지 생각하신 걸까... 새 정보국장님은 퇴근 전 여진만 살짝 불렀다. '최부장이 그러더군. 한주임이 특혜같은 건 줘도 안 받을 거다, 그러니 딱 한 가지만 챙겨달라고, 불합리한 따돌림만은 막아달라고'
새 정보국장님은 세곡지구대 재수사 승인을 요청하는 여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그러나 그는, 옳은 일이기는 하나 '지금 상황에선' 지지해줄 순 없다며, 기다리라는 말로 그 요청을 기각했다. 여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국장은 말이 없었다... 여진은 계속 반차를 내고 수사에 비공식적으로 참여했다. 계속 그럴 수 있었던 건, 국장님이 묵인해줘서였을까. 새 정보국장에게 그 이상을 바랄 순 없었다. 밀린 업무가 과중한 상황에서 국장으로선 여진이 부담스러운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라도 여진을 용납하고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리라. 이후 정보국 사람들이 살벌한 시선을 쏟아낼 때, 국장은 '그래도 이게 원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며 여진을 두둔했다. 그러나 국장의 눈길이 어찌 항상 모든 곳에 미칠까, 사람들은 죄지은 자들보다도 그걸 드러낸 여진을 더 큰 죄인 취급하며 밀어낸다.
지금 여진이 겪는 따돌림을 시목은 오랫동안 겪어왔으나, 시목은 여진이 겪는 고통의 크기를 감히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무디고 잠잠한 탓에 그저 조용히 그 세월을 보냈던 시목 본인은 어쩌면 운이 좋은 것일지도. 경감님은 사람 속의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 경감님이기에 그들의 몰이해와 잔인함은 몹시 괴로우리라. 그 고통의 감각은 시목이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다...
힘들 땐 말해요, 그랬던 건 한경감님이면서. 경감님 본인은 지금의 그 무거운 외로움과 아픔을 조용히 혼자서만 떠매고 있다. 강하지만 넓진 않은 그녀의 어깨에. 경감님에게 말하고 싶다. 고통을 묻어두지만 말고,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달라고, 털어놓아 달라고. 그녀가 털어놓을 때 시목 본인이 어떤 도움이 될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원주로 내려가기 전 만났을 때, 경감님이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게 보였다. 그때 그녀를 조용히 들여다보던 시목의 마음은 걱정이었다, 시목은 자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원주에 가서도 걱정, 이라는 그 '다른 마음'은 시목의 마음에 자주 피어올랐고, 그럴 때면 고민이 여러 갈래로 뻗치곤 했다. 다른 이들도 시목 본인에 대해 그런 걸 느껴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랬기에, 시목은 지금 함께 있는 이들 -같이 상실을 겪은 사람들- 에게 여태 한 번도 자기 얘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심중의 자책감에 대해 털어놓기로 한다. 시목으로선 전혀 익숙지 않은 종류의 대화임에도, 막상 한번 시작하자 실타래가 생각보단 수월하게 풀려나온다. 2년 전 당시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동안, 그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을 거쳤기에, 무디고 모호해서 어려웠던 감정들이 이젠 스스로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그 일부는 여전히 수면 저 밑 깊숙한 무의식 속에만 남아있겠지만.
시목은 이제야 깨닫는다, 사람들이 어떠한 종류의 오해를 해왔다는 것을... 정본이 엉겁결에 그걸 일깨워주고 말았다 (즉각 장건에게 옆구리를 찔렸지만). 당혹감으로 잠시 멈췄던 시목은 자신이 은수와 그런 관계가 아니었음을 느릿느릿 설명한다. 이어서... 은수를 믿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죄책감을 얘기한다. '간접적인 일이라도 맡겼어야, 뭐라도 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억울함을 풀어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개인적 원한 때문에 사건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해도, 일을 맡기기엔 의혹점이 남아있었더라도,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어야 했다... 사건 밖으로 밀어내는 이유가 은수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걸, 차라리 직접 터놓고 얘기했어야 했다' ... 시목의 자책은 여러 겹의 후회로 표현된다.
시목은 좀처럼 뒤를 돌아보거나 먼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 없다. 그저 현재를 묵묵히 사는 사람이다. 아마도 시목이 후회하는 유일한 시간은 은수가 떠나기 전, 그때 뿐이리라. 더 존중하고 더 귀 기울였어야 했다, 할 수 있을 때... 그랬어야 했다.
2년 전 그때 그 장례식장에서 폭발하듯 화내던 시목, 작년 이날엔 정말 조용했던 시목. 지금 이렇게 눈이 조금 빨간 상태로 조곤조곤 얘기하는 시목. 다르면서 같은, 시목의 애도 방식.
다들 숙연하다. 정본은 문득, 내 곁에 사람이라곤 없을 거야 평생, 하던 시목을 떠올린다. 시목이 지금은 사람들 속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픈 걸 혼자서 삭이면 더 아파... 시목은 이런 미안함을 품고서 힘들었겠구나. 얘기해줘서 이제야 알았네.
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황검사 옆얼굴을 응시한다. 감정을 혼자만 꿍쳐두지 않고 이렇게 풀어내는 그가 대견해서, 눈물이 더 난다.
"간단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게요." "간단하죠. 한 순간에 갈리니까...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 대화를 나눴을 때처럼 여진의 눈빛은 이미 아득하다.
문득 주위를 보면,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또는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진지하게 듣고 있는 특임팀 사람들. 너무 소중한 이 사람들. 아, 문득, 어느 기억이 가슴을 죄어온다. 그 사진 속 2년 전 어느 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처럼, 그때처럼, 영검사님도 여기서 함께 웃고 있다면...
영검사님의 '한 순간'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찰나의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것이라면, 그때만큼은 삶 쪽으로 갈렸더라면. 욱신, 가슴이 아파 와서 여진은 소주를 벌컥 들이켠다.
팀으로 일한 적이 없기에 영은수라는 사람을 잘 몰랐음에도, 왜인지 그날 저녁 그 환한 미소 뒷편으로 깊이 모를 외로움이 읽혀서 여진은 마음이 찌릿했었다. 그래서 황검사더러 영검사님한테 좀 잘해줘요, 핀잔을 주기도 했다...
집과 지검을 오간 기록밖에 없던 그 황량한 교통내역 앞에서 여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영검사님에겐 사람들 속에서 편안히 웃고 떠드는 게 얼마나 오랜만이었을까. 그래서 그 저녁을 그토록 즐거워했던 걸까. 스물 여섯, 그 한창 나이에 친구 하나 안 만나고...
그렇게 모든 걸 그 쏟아부었는데, 그렇게 아프게 힘들게 살았는데, 진실이 밝혀지는 걸 영검사님은 끝내 보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살았던들, 이젠 그런 집착과 원한일랑 내려놓고 씩씩하게 나아가고 있을 텐데.
여진은 눈을 지긋이 감는다.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영검사님도 자책으로 남는 거 안 바랄 거예요. 우리 자책 말고 애정으로 기억합시다', 같은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불필요한 말이고, 진부한 말이다. 여진 자신도 이토록 짙은 미안함이 남는데, 시목은 어떨까.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은 필연적으로 남겨진 이의 가슴에 가책을 남긴다. 형사 생활 하면서 안타까운 사고를 접할 때마다 여진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유독 마음이 쏠렸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은, 자신이 원인제공을 안 했음에도 끝없이 자신을 탓하곤 한다. 그대 탓이 아니에요, 한다고 그들의 자책이 끝나던가.
여진은 뻔한 말 대신 지금 꼭 하고픈 말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나 요즘... 생각이 많았어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내 선택들이 옳았나." 사람들이 돌아본다. 걱정을 담은 젖은 눈빛들을 마주하며 여진은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낀다.
"근데, 오늘이 지나면 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진은 끄덕여 보인다.
"살고 죽는 거 한순간에 갈리지만" (여기서 여진은 목이 메어 잠시 멈출 수밖에 없다) "그 한순간에 피해자들을 살리는 경찰이 되어야지."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일도 없게 하고..." (여진은 얼마 전 만난 윤과장의 어두운 얼굴을 생각하며 덧붙인다)
여진의 결연한 눈빛, 그만큼 강한 다짐. 여진은 선서하듯 한쪽 손을 든다. "우리 경찰이 더 나은 시스템을 갖추도록 매일 힘쓰겠습니다!" 옆에서 건이 따라 일어나서 손을 든다. 특유의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저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진은 우는 듯 웃는 듯 눈물 고인 눈으로 건을 째려보며 툭 친다. "짱형사님, 우선 어깨부터 잘 나아요, 요전번에 다친 거. 에?"
건은 어깨를 들어 과장스럽게 으쓱거려보인다. "에이, 그거 다 나아가요!!
사람들이 픽, 웃으며 분위기가 조금은 더 밝아진다.
여진은 속으로 읊조린다. 지금을 사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거지. 힘있게 끄덕이며 시목을 돌아보자, 시목도 살짝 끄덕이며 지긋이 눈을 맞춘다.
단발을 힘차게 흔들며 눈물도 같이 털어낸 여진은 시목 쪽으로 몸을 쑤욱 기울인다. -아 참 내일도 세곡 건 탐문조사 갈 거예요, 끝나고는 정검사랑 만날 텐데. 늦은 오후쯤. 혹시 같이 보실래요? 끄덕, 눈으로 대답하며 여진 옆에 가까이 다가앉는 시목. 세곡 따돌림 수사 진행 상황을 들을 기회다. 주변을 둘러보니, 호섭&영은 오랜만에 만난 절친답게 근황 얘기 나눌 게 산더미일 듯하고, 장건&정본은 아마 결혼과 삶이라는 심오한 주제로 넘어가려는 건지 표정들이 심각하다. 한동안은 이렇게 둘씩 둘씩 이야기에 빠져들 분위기네. 자연스럽게 서로 머리를 가까이 맞댄 여진과 시목은 한참을 대화한다. 술은 잘 줄지 않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진은 일 관련 전화가 걸려와서 잠시 밖에 나갔고, 호섭도 아내와 통화 중이다. 이젠 2차도 슬슬 파해야 할 분위기다. "이제 나이 먹으니 예전 같지 않아, 너무 달리진 맙시다" 하며 자리를 정리하려는 건.
영은 "벌써 무슨 나이 타령!" 하더니 이내, ‘아’하는 입 모양을 만든다. ‘그쵸 그러실 만해요~~' 하며 놀리는 듯한 표정. 건은 약 오른 얼굴을 하고, 영은 "저랑 한경감님은 아직 젊그등요?" 하며 깐족거린다.
곰곰 생각하는 표정의 시목이 끼어든다. "그....젊고 늙은 거 기준이 있습니까?"
영의 미소가 짓궂게 변한다. "검사님 모르셨어요? 요즘은 그 기준이 딱 서른다섯! 그래서 검사님은 이제... 여기 두 분도...(정본과 건을 돌아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절레절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주억거리는 시목.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본은 이내 실실 웃으며 영에게 눈짓한다. '저 눈치 있죠?' 하고 자랑하듯. 영은 끄덕 하고 응답해주며 속으로 칭찬한다. '김정본씨 꽤 발전했다야'. 예전 같으면 ‘그런 기준이 어딨어요? 첨 듣는데’ 하고 초를 쳤을 텐데.
한강 변 계단에 둘러앉아 사이다 마시고 메로나 까먹는 게 3차다. 술은 점차 깨는데도, 왠지 시목은, '취한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생각한다. 부드럽게 울리는 경감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먼 곳에 지내던 과거의 동료들은 이렇게 옹기종기 가까이 모여앉아 있다. 물 건너의 먼 불빛들은 어쩐지 약간 흐릿하고 부드럽게 빛난다.
아이들 잠들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건이 가장 먼저 주섬주섬 일어선다. 자리를 뜨기 전, 건은 재밌는 얘기 들려줄 게 생각나서 슬슬 웃는다.
"있죠, 전기혁 이 쉬끼는 이제 자포자기 했나봐요. 우태하 그 인간이 구워삶으려 한 정황 다 들키고 나니까 그냥 뭐, 혼자 뒤집어쓰면 안되겠다 싶은가 봐. 조사 받을 때마다 온갖 얘기를 그냥 술술 해. 필요 없는 얘기도 막 하고 무슨 만담장이야." 사건 관련 얘기가 나오자 시목과 여진은 주의깊게 귀기울인다.
"아 근데 이쉬끼가 자꾸 황검사님 욕을 하데요?" 건이 덧붙이자 여진이 허공을 째릿한다. "아니 왜? 곱게 진술이나 할 것이지 지가 뭔 욕을 한대."
"아니 지가 나름 사기 전과범인데, 자기보다 사기를 잘 친대. 그 뭐야 연극을 두 번이나 했다고 막 그러던데?" 그 말에 시목이 눈을 깜박거리고, 여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응?) 연극?!!"
"그 뭐야 차 번호판 갖고 그거. 그렇게 한 번." "아하." 여진이 씩 웃는다.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뭐야, 되게 썩어빠진 검사인 척하고 연극을 했어요."
"???!!" 여진과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장면이 차마 상상되질 않아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건은 짓궂은 웃음을 담는다.
"연기 잘 하시데요, 내가 봤지. 아니 팀장님이랑 나랑 전기혁쉬끼를 취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검사님이 들어와서 그러는 거야. ‘두 분 나가시죠’ 이렇게 서서 되게 고압적으로." 건이 당시 시목의 포즈를 재현해 보인다. "아니, 이 사람이 황검사님 맞나 싶었어요, 우리 팀장님도 막 자존심 상해 하시고. 근데 난, 이 형사의 촉이란 게 있지. 뭔가 의도한 바가 있겠다 싶은 거야, 그래서 잠자코 팀장님 챙겨서 나갔어요."
"그때 죄송했습니다." 시목이 잠자코 꾸벅 사과한다. "아니 뭘 또 사과를 하고 그래요. 그날도 끝난 담에 사과했으면서. 고놈한테 답을 끌어내려면 연기를 해야 했다면서요."
건이 궁금한 듯 묻는다. "그럼 취조실 안에선 뭘 어떻게 한 거예요? 카메라도 꺼놓으신 바람에 녹화본 돌려볼 수도 없고." "그... 증거조작을 기소하면 내부적으로 저한테 피해가 오느냐 물어보고, 전 그걸 피하려 하니 검찰 내에 연줄이 있으면 미리 말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지만, 여진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요올~~~ 우리 검사님, 못 하시는 게 없어!"
건이 갑자기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며 여진을 돌아본다. "경감님. '연극인' 하면 아주, 예술인 중의 예술인이지. 알죠?"
그 말뜻을 캐치할 수 있는 건 여진뿐이다. 용산서 시절 여진은, '한경위는 누구 안 사귀냐'는 얘기만 나오면 매번, '난 예술인 만날 겁니다아, 두고 보세요오-' 하고 너스레 떨고 했다. 여진은 다시 입을 딱 벌리며 건을 째려본다. 건이 계속 슬슬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자, 여진은 건을 사정없이 꼬집으며 등을 떠민다. "어허 짱형사님! 울 조카들이 기다린다면서! 빨랑 들어가요 어여 어여!!" 건이 킥킥대는 이유를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갸우뚱 궁금해한다.
다정히 어깨동무한 영과 여진은 여진 집을, 택시를 잡은 시목과 호섭, 정본은 정본 집을 향한다.
크게 놀랍진 않게도 정본은 여태 독신이었는데, 올가을에 드디어 결혼할 거란다. 가는 길 내내 정본은 결혼 준비 얘기를 펼쳐놓으며 웃기도 하고 수줍어하기도 하지만, 졸린 호섭과 시목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두 손님은 도착해서 씻자마자 이불 안으로 잠겨든다. 제법 푹신하고 편한 잠자리, 한편 잠도 없는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정본. "아내 될 사람이 골라준 이불이에요. 편하죠?" 호섭이 웅얼거린다. "으응, 그분이 대단하시네, 이불도 고를 줄 아시고, 눈치도 고칠 줄 아시고."
정자세로 누워 양손 배에 가지런히 올린 시목은 이미 잠든 듯, 숨소리가 쌔근쌔근 일정하다. 내일 이른 아침 영장관을 찾아뵈려면 지금 자둬야 한다.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은 것은, 아마 대화엔 꽤 긴 시간이 들 것이기에...
씩 웃으면서 불을 꺼주는 정본. 이미 둘 다 곯아떨어졌는데도, 깨울까 봐 걱정되는지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방을 나간다.
<'나아가다' 1화 끝>
bori-shrimp.postype.com/ 포스타입에도 연재됩니다. Daum/Naver/Gooogle에서 '비숲2 나아가다'를 검색하셔도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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