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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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밤 열한 시 무렵 /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과장실
보고를 마친 강력계장은 칼같은 동작으로, 그러나 애매한 깊이로 묵례하더니 재빨리 나가버린다. 빛의 예리한 시선이 나가는 계장 뒷모습을 따라간다.
강력계장은 나이가 빛보다 네댓 살쯤 많은 데다 이 지역에서 오래 일해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일 처리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속도와 완성도 측면에서 이번 사건처리가 퍽 훌륭했으므로 방금은 칭찬을 해야 했던 타이밍이었나. 그러나 이곳에서 빛은 웬만해서는 칭찬도 질타도 지양한다.
이곳에서 빛은 휘하 사람들과의 사이에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해왔다. 사람을 많이 겪다 보면 관계의 초반부에 이미 앞날에 대한 예감이 뚜렷해지곤 한다. 어떠한 종류의 유대감도 형성되지 못한 채 남은 임기가 마무리되리란 건 이미 명백하다.
부임한 지 반년이 되어가나 여즉 텃세란 게 뚜렷하다. 서열은 확실하게 해놓으려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했고 이는 나름 성공했으나,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계장들과 광수대장, 그 밑의 팀장들은 빛이 그들의 상사임은 인지할지언정 빛을 리더로 여기지는 않는다. 항명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은근한 무시가 저변에 깔려 있다. 감춰져 있던 적대감이 한 번씩 툭툭 드러나기도 한다. 빛은 크게 개의친 않으나 매번 뒷맛이 비리다.
존경이나 인정을 기대할 만큼 염치가 없을 순 없다. 빛이 무슨 일로 강등되었는지에 관한 소문은 빛이 부임하기 전부터 이미 파다했다. 한편 형사과 특유의 치우친 성비와 그로부터 기인한 특유의 문화는 경찰 인생 내내 겪었으므로 특별할 것도 없다. 질리는 기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지만.
총명하고 빛나는 한 아이로부터 과분한 존경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한여진은 전승표가 빛에게 경칭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상대의 계급이 저보다 더 높은 것도 아랑곳 않고 벌컥 험악하게 화를 냈다고.
내 죄과가 들통나지 않았더라면 난 계속 네 존경을 받는 선배일 수 있었으려나. 그랬대도 은폐와 기만 속에서 관계는 위태로웠겠지.
애초에 내가 그따위 줄 없이 내 능력껏 올라왔던 거라면. 그렇게 올라와서 너를 만난 거였더라면.
역사엔 if가 없다지만, 그러나 빛은 되풀이하여 그 if를 가정하며 후회한다. 매번 괴로워한다.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어, 그때 내가 달리 어떻게 해야 했는데, 그런 합리화로 눈을 가려왔으나 여진의 앞에선 더는 허위에 기댈 수 없었다. 남양주 서장으로 머물렀어야 했어,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형사과 업무로 구르고 또 굴러서 마침내 한 경찰서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벅찼던가. 그 자릴 차버리고 정보국을 향했다.
높이높이 올라와 정보심의관 자리를 꿰찬 덕에 더 뛰어난 사람이 되기라도 한 줄 알았던가. 현장에서 아예 벗어나 높은 곳에서 이것저것 주무르니 발전인 줄 알았던가. 결국은 퇴보였다. 여진 덕분에 그걸 깨달았다.
여진의 상사가 아니게 된 지 8개월이나 흘렀지만, 그간 직접 본 건 두 번 뿐이지만, 그 명백한 분리에도 불구하고 빛은 여진을 항상 생각했다.
갈팡질팡 흐르는 생각에도 그걸 관통하는 축이란 게 있다면, 내도록 한여진이 바로 그 축이었다. 생각의 축, 중심, 어쩌면 지지대.
일에 빠져들면 상념을 잊을 수 있다. 형사과는 어디든 일이 많고 전부터 알았듯 부산청은 형사과 업무강도가 특히 높은 편이다. 경정 시절 이쪽 광수대를 거쳤으니 낯설 건 없다.
과장 업무야 주로 결재업무라곤 하지만 빛은 필요할 때면 직접 나가서 지휘한다. 이골이 날 만큼 해왔으니 현장 일은 몸이 기억한다. 몸을 사리지 않는 건 속죄의 의미이기도 하다.
현장을 그리워했던 넌 정보국에 남았고, 현장을 지긋지긋해했던 난 현장에 돌아왔구나.
나서서 밝힘으로써 우태하를 잡아넣으라고, 그걸 경찰로서의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라고 설득하던 황시목 검사 앞에서 빛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날 잘 모르는군요. '마지막'이라고 어떻게 확신해?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난 어떻게든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 올곧음을 비웃지는 않았다. 원칙에 대한 황검사의 믿음은 여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무거운 책임을 진 자리에서 원칙을 어긴 이에게 여죄가 있어선 안 된다는 그 믿음.
빛이 속한 조직은 그 믿음이 엷었으므로 빛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해임 대신 강등이란 징계가 내려졌고 무급 정직 3개월 동안 빛은 학교를 다니듯 꼬박꼬박 중앙지검에 나가 조사를 받았다. 용의자로서 심문받고 나오노라면 매번 울화가 치밀었다. 15년 넘게 빛은 취조하는 쪽이었지, 취조당하는 쪽이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 빛이 담담해지려고 애쓰는 사이 석 달이 흘렀다.
여진은 한 번씩 불쑥불쑥 카톡 메시지로 업무 근황을 들려주곤 했다. 빛이 복직한 후부턴 '선배님은 무슨 일 하고 계시냐'며 물어오기도 했다. 빛은 그 호칭에 매번 잠시 멍해지곤 한다. 선배. 내가 너에게 선배일 자격이 있을까 과연.
빛은 퇴근하려고 집어 들었던 외투를 책상에 툭 떨군다. 생각난 김에 톡방을 열어본다. 한여진 주임. 2주쯤 전 간단히 안부 주고받은 게 마지막이다. 그때 여진은 새로 맡은 업무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열심히 해보려 한다며 파이팅 넘치는 이모티콘을 이어서 보내왔다. 무슨 생쥔지 고양인지 모르겠으나 암튼 한여진이를 꼭 닮은 이모티콘. 빛은 망설이다가 카카오톡 기본 제공 이모티콘 중 최대한 느낌이 닮은 걸 골라서 보냈다. 보내놓고 본인도 모르게 오랜만에 픽 웃는다.
여진이 빛을 믿던 시절의 유대감은 되찾을 수 없다. 여진과 다시 회복해온 관계는 새롭게 형성된 관계일 뿐 그때의 것을 되돌릴 순 없다. 그렇지만,
이 정도라도 이게 어디인가. 경찰로서 다시 일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아직 기회가 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네 앞에 설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데에.
오늘따라 상념에 깊이 잠겼던 빛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흠칫 놀란다. 이제 가야만 할 시간이다.
빛은 외투를 휙 집어 들고 달리듯 과장실 문을 향하지만, 과장실을 나서면 보는 눈이 많으므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품위 있게 걷는다. 번거롭고 귀찮지만 나름의 위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쪽저쪽에서 척척 올려붙이는 경례에 무심히 답하노라면 빛의 머릿속에 플래시백되는 이미지가 있다. 빛이 정보국을 떠나던 날 유일하게 경례하지 않던 여진. 그 눈빛. 빛은 매번 심호흡을 해야만 한다.
# 크리스마스 이브 11:30PM / 부산 연제구 연산동 연제스카이독서실.
눈에 익은 독서실 직원이 빛에게 인사를 건넨다. 직원과 빛은 피로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동병상련이다.
"따님 책상에 신호 넣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독서실 직원이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직원은 딸 자리 스탠드 불빛이 깜박거리도록 할 테고, 그러면 딸은 짐을 챙겨 나올 것이다. 빛은 문가에 서서 잠자코 기다린다.
이 시간에 데리러 오는 건 되풀이되는 일상이다. 늦어지겠다 싶으면 딸은 빛에게 문자를 남긴다.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으므로. 경찰 딸 아니랄까 봐 규칙 준수엔 늘 철저하다.
이렇게 데리러 와서 딸에게 무슨 말을 해주는 게 정답일까? 오늘 고생 많았어, 공부 열심히 하니 장하다, 쉬어가면서 했지? 여태 꺼내 봤던 말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딸은 매번 뚱한 표정으로 집이나 빨리 가자, 중얼거리곤 했다.
정직으로 집에 머물던 3개월 동안 빛은 죄책감 때문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엄마가 될 기회를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직 사춘기가 안 온 아들은 그래도 챙겨주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원하는 바가 워낙 뚜렷하고 솔직하니. 그러나 딸은 다르다. 딸은 원래 엄마에게든 아빠에게든 뭔가를 먼저 요구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딸이 원하는 걸 어떻게든 찾아내려, 예민하게 감지해내려 애썼다. 살살 꼬셔 데리고 나가서 어벤져스 영화를 보여준다거나, 친구들이랑 놀고 늦게 들어올 때 차를 끌고 마중 나간다거나.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조그만 위안 내지는 속죄의 의미를 부여하며. 딸의 사춘기 들어 처음으로 딸과 엄마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딸은 빛의 도움을 거부한다. 빛의 정직이 끝나갈 무렵부터 딸은 엄마를 밀어냈다. 빛은 딸을 달래보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빛은 한동안 기러기 엄마였다. 딸과 아들은 남편과 함께 서울에 남았다. 아이들은 각각 중학교와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었다. 한창 친구관계에 예민한 시기, 마지막 학기를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학기를 마치는 동안 엄마는 아이들을 챙겨주지 못했다.
아들은 기회 될 때마다 아빠랑 같이 부산에 내려오곤 했으나 딸은 친구들이랑 주말 일정이 있다며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만 보는 딸은 매번 입이 댓 발 나와 있었고, 도통 누그러지질 않았다. 딸은 엄마를 서먹해했다.
2학기가 끝나자마자 빛과 남편은 서울 집을 정리했다. 남편은 인천 소재인 직장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었고 이젠 남편이 기러기 아빠가 될 차례였다.
몇 달의 공백은 당초의 예상보다 컸다. 동생과 아빠랑만 지낸 몇 달 동안 딸은 무척 독립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편에게도 유독 바쁜 한 해였던 데다 빛의 남편은 빛만큼 예민하지 못하여, 딸이 요구하지 않으면 뭘 해줘야 할지를 뚜렷이 모른다. 딸은 바쁜 아빠를 괴롭히지 않으려 웬만한 건 혼자 처리했으리라...
그간의 공백을 메우려 노력하기엔 현재 빛의 업무량이 너무 많다. 굳이 비교할 건 없지만 정보심의관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건 없다. 진퇴양난에 빛은 종종 몸이 두 개였더라면, 하는 쓸데없는 말까지 중얼거리곤 한다.
다른 학생들이 비척비척 걸어 나올 때마다 빛은 흠칫 유리문 쪽을 살핀다. 십여 분이 지나도록 딸은 감감무소식이다.
"저... 딸이 자는 것 같아서요, 제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도 될까요?"
원칙상 안 되겠지만 독서실 상무는 매번 끄덕여 허용해준다. 빛은 발소리를 죽여 열람실에 들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딸은 곤히 잠들어 있다.
공시생들, 고등학생들 틈에 유독 눈에 띄는 앳된 예비 고1.
빛이 안쓰러운 얼굴로 작은 한숨을 쉰다.
공부라곤 죽어라고 싫어하던 애가 부산에 내려오고부턴 전례없이 독하게 공부를 한다. 예비 고1 방학에 공부를 충분히 시킬 생각이긴 했지만, 독서실에 종일 시간을 보낼 거라곤 기대도 해 본 적 없다. 딸이 왜 이러는 걸까. ...빛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엄마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것 같기도 해서 빛은 마음이 복잡하다.
빛은 딸을 살살 흔들며 딸 눈앞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딸, 가자." 빛이 입 모양으로 말하자 딸이 눈을 찌푸린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잠꼬대를 하려다가, 여기가 독서실인 걸 깨닫곤 제 손으로 입을 꼬옥 막는다. 괜히 엄마를 한번 째릿하더니 서둘러 가방을 챙긴다.
차 옆좌석에서 딸은 말이 없다. 늘 그렇듯 과묵하다. 이번에도, 빛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뻔한 말을 꺼낸다.
"내일 휴일인데 일찍 끝내고 쉬지 그랬어."
딸의 반응은 평소와 비슷하다. 적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빛은 심경 복잡한 표정으로 딸 옆얼굴을 살핀다.
#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무렵 / 부산 연제구 연산경동A 1204호
현관엔 눈에 익은 구두 한 쌍이 단정히 세워져 있다.
부루퉁하던 딸 표정이 조금 풀린다. "아빠 왔네? 새벽에 온댔잖아?"
빛이 눈을 반짝이며 속삭인다.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혔나 보지. 근데 조용한 거 보니까 자나?"
빛은 매번 딸에게 메인 화장실의 샤워부스를 양보하고 본인은 작은 화장실에서 씻는다. 딸이 방으로 쏙 들어가서 머리를 말리는 동안 빛은 벽 너머로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잠시 기대어 쉬곤 한다.
똑똑, 노크하자 1분여 만에 문이 슬쩍 열린다. 딸이 문틈으로 엄마를 빤히 본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빛은 한 아름 가득 안아 든 이불과 베개를 슬쩍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는다.
"딸, 엄마 좀 재워 줘." 빛은 한껏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딸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뜬금없이 이게 뭐야? 하듯.
"그게, 준수가 아빠 옆에 찰싹 붙어서 자고 있어."
"...걔 어린애야 진짜."
"어린애지 그럼." 빛이 씩 웃는다. 너도 아직 어린애야, 이 말 했다간 큰일 난다. 그랬다간 국물도 없다.
빛이 이번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엄마 거실에서 자게 냅둘 거야?"
"거실도 안 춥잖아. 알아서 잘해봐요."
아니, 이게 유전인가. 내가 부하들한테 쓰는 말투랑 어째서 판박이인 거지? 빛이 속으로 기함한다.
엄마는 무력으로 밀고 들어가려 시도해보고 딸은 완강히 밀어낸다. 모녀가 승강이하는 사이 분침은 시침에 겹친다. 어느새 자정이네.
"딸, 메리크리스마스야."
"그래도 안 돼."
"통행료 줘도?"
"뭔지 들어나 보자."
빛이 이불 뭉치 안에 숨겨놨던 작은 꾸러미를 꺼내 내민다.
내용물은 마블 공식 굿즈와 피규어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어벤져스 캐릭터를 알아내느라 진을 뺐다. 결국 바쁜 여진에게 SOS까지 쳐야 했다. 내용물이 뭔지 알아볼 수 있도록 포장 위에는 마블 로고가 박힌 씰까지 구해 붙여뒀다.
빛은 딸의 반응을 살핀다. 놀라고 들뜬 게 눈에 보인다. 그러나 딸은 한껏 점잖은 척하려 애쓰고 있다.
"인혜야."
"...응?"
딸의 눈은 선물상자에 고정되어 있고 손은 본인도 모르게 상자 쪽으로 슬슬 다가오는 중이다. 다가올까 말까 고민하는 고양이 같다.
"있잖아, 너 나이 곱절인 아주 멋진 언니야가 하나 있는데, 걔는 서른 넘었는데도 이런 거 보면 깩 소리치면서 환장하더라. 그니까 엄마 말은, 좋아하는 거에 솔직하다고 어른스럽지 않은 건 절대 아냐."
요즘 다 컸다고 온몸으로 외쳐대는 걸 엄마가 어찌 모르겠니. 그래도 좋아하는 거 앞에선 예전처럼 꺅꺅거리면 엄마가 마음이 더 편하겠다.
딸이 엄마를 빤히 보며 눈을 깜박거린다.
"좋아하는 게 많은 게 행복한 거야. 일만 공부만 하고 취미가 없으면, 쉬어가야 할 때 힘들어. 인생을 살다 보면 쉬어가야 할 때도 있거든... 그니까,"
빛이 문득 말을 멈추고 씩 웃는다. 딸은 지금 엄마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표정이다.
"어여 가서 뜯어봐."
딸이 고양이가 먹이 낚아채듯 선물을 휙 받아들고는 책상으로 도르르 달려간다. 마블 로고 씰을 조심스레 떼어내서 스탠드에 붙여놓더니, 포장지를 뜯는 손길이 급하다. 피규어의 자태에 조그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저게 그리도 좋을까, 빛이 피식 웃는다.
딸이 피규어를 여러 각도로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느라 바쁜 사이 빛은 슬슬 방 안으로 들어와서 바닥에 이불을 살살 깔아놓는다.
딸이 피규어를 책상 안쪽에 모셔놓고 돌아설 때쯤 빛은 베개에 시트까지 잠자리를 완성해놓고 털썩 앉아 말똥말똥 뻔뻔한 표정으로 딸을 올려다본다. 딸은 빛을 쫓아내지 않고 그대로 둔다. 선물이 통했다.
딸이 말없이 불을 끄고 제 침대로 쏙 들어간다. 스마트폰 액정 불빛이 환하다. 눈 나빠져, 잔소리가 혀끝까지 밀려 올라온다. 이 순간마저 잔소리하고 싶진 않은데. 같이 시간도 못 보내면서 매번 전화기 너머에서 잔소리만 하는 존재가 엄마였다, 이 아이에겐.
자아, 30초만 기다려보자. 그러고도 안 끄면 잔소리해야지. 빛이 머릿속으로 초침을 돌리기 시작한다. 20초쯤에 딸이 폰을 끈다. 빛은 안도하여 살짝 웃는다. 다행이다, 잔소리 안 해도 돼서.
"잘 자, 딸."
"...엄마."
"음?"
"우리 내일 뭐 해?"
"으음, 우리 내일 저녁 외식 해! 점심땐 아빠가 맛있는 거 해주실 거야, 아까 보니까 냉장고에 베이컨 해동해 놓았더라."
"엄마 설마 내일 일하러 가?"
"...오전 근무만 해. 그니까... 오후에 일찍 들어올 거야."
"..."
"미안해, 엄마가 늘 ㅁ-."
"미안하단 말 그만하라니까."
"...인혜야."
"따지고 보면 이게 미안할 일이야? 엄만 엄마 일 하는 건데."
딸 목소리가 건조하다. 빛은 입술을 꼬옥 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인혜야, 자니?"
"아니."
"혹시 엄마가 하나만 물어봐도 돼?"
"..."
"니가 먼저 나서서 독서실이며 학원 끊어달라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
"몇 달 새 진짜 어른스러워졌구나 싶어서 엄만 기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해. 근데..."
"..."
"벌써부터 너무 스스롤 옥죄는 것 같아서 엄만 걱정이 된다. 맨날 앉아만 있기보단 한 번씩..."
"놀고 싶어도 못 놀아, 나가서 같이 놀 친구가 없어. 다 서울에 두고 왔는데."
"...그래서 공부를 하는 거야? 너 공부하는 거 늘 싫어했잖아."
"그래서 엄마가 맨날 잔소리했지."
"...엄마가 너 일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싫어서 원천봉쇄하는 거니?"
"아니라곤 말 못 하겠어. 근데 그게 다는 아냐, 나 그렇게까지 유치하진 않아."
"응?"
"다 이유가 있고 계획이 있다고. 나도 지금 공부하는 거 재밌어서 이러는 거 아냐. 예습하는 거 자꾸 막히고 짜증나. 근데 나 성적 잘 받아야 해 고등학교 가면."
"...?!"
"나 어떻게든 서울로 갈 거야 대학. 서울에 뿌리 내리고 오래오래 살 거야."
"...!"
빛이 말을 잃는다.
"난 맨날 엄마 따라 옮겨 다니면서 고향 없이 자랐잖아. 이젠 뿌리 좀 내리고 싶어. 그리고 그 뿌리 서울에 내리고 싶은 거고."
빛의 미간이 조여든다. 미안하다 말하고 싶은데 딸은 일찌감치부터 그 말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엄마랑 멀어지는 연습 하는 거야?"
목소리가 메어든 걸 딸에게도 들켰으리라.
"..."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이번엔 딸이 침묵을 깬다.
"...엄마, 있잖아."
"응, 인혜야."
"엄마 정직 먹어서 집에 있는 거, 난 좋았어. ...아닌 척 했는데 좋았어."
"...!"
"공부하란 잔소리도 전화로 듣는 것보다 옆에서 듣는 게 낫더라. 엄마가 옆에서 나란히 공부한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아 놓고선 딱 잡아떼는 것도 좋았고, 엄마랑 첨으로 맛집 여기저기 가 본 것도 좋았어. 엄마랑 영화관 간 것도 몇 년 만인지 암튼 좋았어."
딸이 작은 목소리로 독백하듯 중얼거리는 동안 빛은 미간을 힘껏 누른다. 괴어든 눈물을 감춰주는 어둠이 고맙다.
"...그 석 달이 끝나는 게 아쉬웠어. 내가 이기적인 거 아는데 암튼 아쉬웠어."
"엄마도 아쉬웠어... 엄마가 놓친 게 얼마나 많은지 후회도 많이 됐어. 진작부터 그렇게 같이 뭐라도 해야 했구나, 그런 생각에 진짜 많이 미안했어, 엄마가."
"3개월이라도 없었던 것보단 낫지. 쉰 건 엄마 자의가 아니래도 나랑 놀아준 건 엄마 자의였잖아."
빛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딸의 목소리엔 가시가 빠져 있다. 빛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딸 쪽을 올려다본다. 딸이 팔베개를 하고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쳐든 엷은 불빛이 보드라운 얼굴을 비춘다. 암순응 완료된 시선끼리 서로 마주친다.
"적어도 나 더 나이 먹기 전에 추억 많이 쌓았잖아?"
"...!"
"엄마,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럼."
"엄마 5년 내에 진급 못 하면 경찰 아예 그만둬야 하지."
"..."
"맞지."
"...어떻게 알았어?"
"계급정년 구글에 검색하면 다 나와."
"...그래, 맞아. 엄마한테 남은 시간 4년 반이야."
"엄마 그만두기 싫지."
"...맞아. 엄마 못 그만둬."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잖아."
"...맞아."
"있잖아, 그냥 이제 나든 준수든 웬만큼 컸잖아. 너무 맨날 엄마가 잘못한 것처럼 그러지 마. 나도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암튼 너무 미안해하기만 하지 말라고. 앞으로 몇 년이 엄마 인생에 많이 중요한 거잖아."
빛이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훔친다. 딸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려준다.
진정되고 나자 빛이 나직이 속삭인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
"딸, 엄마가 침대로 올라가도 돼?"
"...내가 내려갈게." 딸이 중얼거리더니 스르르 내려와 빛의 이불 속으로 쏙 들어온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딸을 품에 안아본다. 빛은 이불을 둘러주고는 딸을 꼭 꼭, 감싸 안는다. 아이가 숨이 막힌다며 투덜거리자 그제야 살짝 팔의 힘을 푼다.
그렇게 가시를 세우고 엄마를 밀어내더니, 지금만큼은 어리고 보드라운 꼬맹이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 딸이 빛의 품을 파고든다.
아직 어린애야. 아직 이렇게 어린 애가 엄마 품을 벌써부터 떠나겠다고...
빛은 다시 울지 않으려 기를 쓴다. 고양이 같은 딸내미는 축축해지면 싫어할 게 뻔하니.
빛은 딸 어깨를 느릿느릿 토닥인다. 딸 숨소리가 점점 일정해지기 시작한다. 잠이 몰려오나 보다.
"인혜야."
"응?"
딸이 잠에 취해서 꼬물거린다.
"엄마 적어도 3년은 여기 있을 거야. 꼭 그럴게. 어떻게든."
"..."
"부산에서 3년만큼은 확실히 머물 거야. 네겐 고등학교 3년, 준수한텐 중학교 3년이겠지. 새로 사귈 친구들과 관계맺기를 하고 이곳에 적응하고 그 동안만큼은 절대로 이사할 일 없어. 약속할게."
"진짜지?"
"그럼."
"믿어볼게."
"우리 그 3년만큼은 같이 추억으로 남겨보자. ...느지막이 엄마 차 타고 집 오는 그 시간만이라도 얘기 많이 들려줘. 그날 뭐 느꼈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엄마한테 말해줘."
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딸은 이내 눈을 포옥 감고 베개에 뺨을 깊숙이 묻는다.
빛은 딸의 마알간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딸은 빛을 닮아 미간을 자주 찌푸리는 탓에 벌써부터 11자 주름이 꽤 뚜렷하다. 그러나 잘 때만큼은 온순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딸이 문득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든다. 할 말이 생각난 듯.
"으음... 있잖아, 엄마도 그래도 돼... 엄마도 그날 있었던 일 얘기해도 된다고."
그걸 마지막으로 딸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오늘 하루가 꽤 고단했을 게다.
애써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른다. 빛은 딸을 깨울까 봐 입을 막고 조용히 운다.
혼자 잠들게 해서, 혼자 숙제하게 해서 미안해, 그 말을 수천 수만 번 되풀이하는 사이 아이는 결국 다 커 버렸다.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빛의 말은 혼잣말이다.
언제 이렇게 다 커 버렸니... 혼자 크게 해서 미안해
벌써부터 이렇게 철들게 해서 미안해
<외전_ 최빛 형사과장 편> 끝
*비숲 7화 이연재 회장이 보던 최빛 부장 신상파일에 빛의 남편(허인구), 딸(허인혜), 아들 (허준수)의 이름이 있더라구요! 그렇게까지 사찰하는 게 참 무서웠는데... 덕분에 빛 가족들 이름을 알았네요.
비숲2 대본집에서 작가님이 최빛 전 단장에 대해 '나중에 잠잠해지면 지방 경찰서장쯤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라고 써주신 데에 희망을 얻고, 빛의 징계가 (사직이나 해임이 아닌) 강등처분에 그쳤기를 바라보기로 했답니다.
빛이 강등되면 총경인데, 총경에 해당되는 자리는 "경찰서 서장/ 지방경찰청 또는 본청 과장" 이라고 합니다. 비숲2 극중 서검사 구출 현장에서 빛이 '이런 거 질리도록 했다' 고 말하길래, 빛의 과거 긴 경력은 형사과에서 다져져 왔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강등되어서 형사과에 배치되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빛이 복직을 하더라도 '계급정년'이 문제라구요. 남양주서장(총경:계급정년 11년)에서 정보심의관(경무관: 계급정년 6년)에 올랐다가 강등당해서 다시 총경으로 돌아온 상황인데,
'징계로 인하여 강등된 경찰공무원의 계급정년은 강등된 계급의 계급정년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강등되기 전 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의 계급정년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계급정년을 산정할 때에는 강등되기 전 계급의 근무연수와 강등 이후의 근무연수를 합산한다' (강등된 경찰공무원의 계급정년 산정)
2018년 봄~2019년 봄 빛은 경무관으로서 이미 근무년수 1년을 썼으니 총경이 된 빛에게 남은 시간은 5년 뿐입니다. 작중 시점이 12월이니 빛은 약 4년 반 내에 경무관으로 진급하지 못하면 경찰로서의 커리어를 끝마쳐야만 하는 거죠...
남양주서장(총경)에 머물렀다면 (총경은 계급정년이 11년이니)시한이 7, 8년쯤은 남아있었을 텐데요. 결국은 잘못된 선택으로- '끌어주기'로- 승진했었던 바람에 계급정년에 발목을 잡히게 된 거네요.
이걸 모를 리 없는 여진은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을까요... 우리 최빛 전 단장님, 꼭 열심히 해서, 이번엔 오롯이 능력만으로 다시 경무관 되어주세요...! '단장님 능력으로 충분히 올 수 있었다' 는 여진 말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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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새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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