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 끝마다 당신이 있다면
시간 배경 2019년 추석 _ 9월 13일(금)
미완성 상태로 묵혀뒀던 회차들을 쪼로록 발행했더니 작중 계절이 초여름, 한여름을 거쳐 어느새 가을까지 왔네요. 요즘 날씨가 추운 탓에, 글 쓰면서 햇살 뜨겁던 계절이 그리워지더라구요.
날씨는 춥더라도 따뜻한 날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Chamomile 1화부터: http://bori-shrimp.tistory.com/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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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긴 하루 끝에>
추석 당일 저녁. 귀경길은 벌써 막힌다. 서울에 들어서기 한참 전부터 거북이걸음이다. 여진은 피로를 떨치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본다. 백미러를 보니 눈이 살짝 부어 있다. 운전해서 오는 내내 심경이 복잡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그 시간들의 흔적이 결국 눈가에 남은 걸까. 주책맞기도 하지, 여진이 중얼거린다.
여진은 문득 뒷머리가 쑤시는 걸 느낀다. 머리칼을 단정히 고정했던 반머리핀을 빼내 뒷좌석으로 던져버린다. 이걸 여태 하고 있었다니. 단발을 탈탈 털어 흐트러트리곤 뒤로 거칠게 쓸어넘긴다.
지금 만나러 가는 그 사람이 몹시 고프다. 그 사람은 본인 때문에 여진이 가족과 보내야 할 시간을 할애하는 것 아니냐 걱정했다. 천만의 말씀. 만나면 알려줘야지, 지금 내게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원래 난 명절에 집 가는 거 싫어해요,"
이번 연휴를 계획하던 통화에서, 여진은 이런 말을 했다. "명절엔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고,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너무 많이 들어. 그래서 갑갑하거든... 짼 적이 많아요. 마침 직업이 명절에도 바쁜 직업이니까."
각자의 과거에 대해선 딱히 묻거나 얘기하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여진은 말이 나온 김에 스스럼없이 들려줬다.
"형사가 되기로 한 내 결정을 지금까지도 용납하지 못하신 분들이라고 하면... 딱 전달이 되려나."
여진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얘기를 간결히 풀어놓았다. "... 만화 읽고 그림 그리는 게 뭐, 내 나름의 숨구멍이었죠."
여진의 마음 한켠에는 기대가 남아있다. 부모님이 언젠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거란 기대. 그걸 아예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여진은 소통을 시도해보았으나, ... 음. 이런 일에 성공과 실패를 굳이 나눌 수 있을까. 그저 뒷맛이 씁쓸할 뿐이다. 큰맘 먹고 간 건데. 유튜브로 전 부치는 법 공부까지 해갔는데. 산적이며 온갖 전 진짜 열심히 부쳤는데. 그렇다고 이 허무감을 부모님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차례가 한창일 때, 여진은 어머니 얼굴을 자꾸만 몰래 살폈다. 여진은 명절마다 스트레스 받으시던 젊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이젠 다르다... 완벽주의는 여전하지만, 초조함이 있던 자리를 이젠 여유와 권위가 차지했다. 아들딸과 조카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포지션이 엄마께 잘 어울리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머님과 숙모할머님들 말씀에 따라야 했던 예전 역할은 엄마께 맞는 옷이 아니었고, 명절 끝무렵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시곤 했다.
차례가 끝나고, 여진은 베란다에서 바람 쐬시는 어머니에게 접근했다. 여유로워 보이시는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다가서보고 싶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어렵지만, 여진이 그토록 이해를 갈구하는 건 사실 어머니 쪽이다.
"공기 좋다, 그쵸 엄마."
"음."
"엄마 건강은 어때요, 다 괜찮으신 거죠?."
"그럼. 그건 그렇고 너 안색이 좋구나."
"오, 그쵸! 요새 저 일찍 자고 건강하게 먹거든요. 체중도 늘었다?"
"그래. 대충 먹으면 몸 상한다고 그랬지 엄마가."
"흐흠." 여진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먹고 싶어도 못 먹었겠지, 형사과에선."
"엄마." 여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진은 어머니 굳은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본청으로 아예 옮긴 거, 아빠도 엄마도 그 얘기 첨 들었을 때 참 많이 기뻤다. 다행이다 싶었고. 알고 있지?"
"...네."
"이제야 네가 철이 드는가 보다, 싶더라."
"..."
"여진아."
"응, 엄마."
"형사과를 꼭 가야 했니."
부모 뜻을 거듭 거스르고 결국 강력계를 향했던 여진을, 어머니는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다.
"... ...죄송해요."
"아직도 미련 남은 건 아니지?"
"..."
"그냥 아니라고 대답 좀 하렴."
"..."
"거기 여자는 너 말곤 아무도 없었지? 너한테 기회라곤 주어질 수 없는 곳이잖아."
"...꾸준히 일하면-"
"...꾸준히 한다고 기회가 오는 게 아니야. 사기업보단 덜하겠지만, 공무라고 다르지 않아. 알잖니."
어머니껜 평생 일해오신 직장에서 쌓인 한이 있다. 정년을 코앞에 두고서야 처음으로 한 학교의 총책임자가 되셨으니. 그렇게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 교장 임기를 채우시는 중이다. 소식 들었을 때 축하드리는 심경이 복잡했었다. 진작 되었어야 하는데, 하는 어머니의 씁쓸함을 알기에, 입을 떼기가 참 어려웠지...
"일은 잘 하고 있니. 새 상사들 신뢰는 얻었고? 첫 업무평가점수는 언제 나오지?"
딸과 판박이인 어머니 커다란 눈이 여진을 훑었다. 평가내리는 듯한 냉정하고 고압적인 태도. 여진은 힘주어 지어 보이는 미소 뒤편으로 섭섭한 표정을 감췄다. 부하 교사들에게 그러시는 건 알겠는데, 가끔씩만 보는 딸에게도 그러셔야 하나요. 매번 괜히 원망해보게 된다, 오래 전 어머니 품을 거부하고 뛰쳐나가 버린 건 여진 본인이면서도.
올봄 본청에서 겪은 일들은, 터놓고 말씀드리질 못할 것 같다. 아마도 영영.
상사의 죄과를 직접 드러낸 여진의 결정을 아셨더라면, 분명 화를 내셨을 게다. 또 다른 '불필요한 위험'을 자청한 여진에 대해. 한동안 지독했던 따돌림에 대해서 아셨다면 더더욱 화내셨을 테고. 어머니 방식의 걱정이란 걸 알지만, 여진은 그걸 괴로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사실 어릴 적부터 힘든 일일수록 혼자서 해결하는 게 익숙해진 여진이다. 여진에게 부모님은... 책임감을 가르쳐준 분들이었지만, 쉽게 기댈 수 있는 분들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형사... 오죽 위험하니. 처음부터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
여진이 숙였던 고개를 흠칫 들었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여진의 시선은 심하게 흔들렸다. 차가운 어머니에게 익숙해서일까, 어머니의 엄격하지만 서글서글한 큰 눈에서 애정이 읽힐 때면 여진은 와락 약해지곤 한다.
"경찰은 여자가 할 일 아니란 말, 네가 싫어하는 것 알아."
"...엄마."
"네가 아들이었어도, 말렸을 거다. 정도는 달랐겠지만. 칼 휘두르는 놈들 잡는 거, 누군간 해야 하는 일인 것 알지만 난 내 자식은 그 일을 안 했으면 좋겠어, 그게 부모 마음이다."
너도 교단을 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니, 어머니가 이미 수천 번쯤은 하셨던 그 말을 나직이 흘리며 베란다를 떠나셨다. 혼자 남겨진 여진은 입술을 힘주어 꾸욱 깨물었다.
용산서 시절 옥탑방까지 찾아와주신 어머니를 바람맞힌 일이 있었다, 터지고 긁힌 얼굴 상처를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엄마, 미안해요. 근데 난 이렇게 살아야 해...', 그날 강력계 당직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여진은 수없이 그렇게 되뇌었다.
부모님 몰래 경찰대에 지원하고 그걸 결국 들켰을 때, 어머니와의 관계에 뚜렷한 균열이 생겼다. 꽤 극성맞았던 사춘기를 거치면서도 유지해왔던 유대감이, 그때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합격으로 여진이 몹시 괴로워하던 때, 좌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던 여진의 꿈을 어머니는 더없이 매몰차게 부정했다. 균열은 콰르릉 소리를 내며 속절없이 커져버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몰이해가 준 고통을 여진은 아직도 선연히 기억한다.
여진 쪽에서 모든 지원을 끊은 건 경찰대를 재수하면서부터였다. 팔자에 없던 고학생이 될 각오로 가출했다. 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며 공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의견은 충돌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진의 진로에 있어서만큼은 두 분 생각이 똑같았다. 그리고 두 분은 완고한 게 참 닮으셨다, 짐보따리 떠메고 나가는 딸을 쳐다보지도 않으셨으니. 붙들어보려는 시도조차도 없었다. 버린 자식 취급하는 것으로 딸 마음을 바꿔 보려 하셨던 걸까. 그러나 여진에겐 전혀 통하질 않았다. 뻣뻣한 여동생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부모님 사이를 이어보겠다고 오빠가 꽤 고생을 했다. 그 고생엔 성과가 없었지만.
코흘리개들 과외를 해가며 학원비를 벌었다. 다니던 헬스장 대신 공립 운동장에서 뛰었고, 유도 도장은 강사 보조를 하는 조건으로 계속 다니며 단을 높였다... 그렇게 이 악물고 입시를 준비했다. 이 정도 힘들다고 지금 나가떨어진다면 형사가 될 자격이 없는 거다, 여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오빠가 과외로 벌어서 나눠준 생활비가 꽤 요긴했다. 여진은 임관 직후부터 그 돈을 매달 갚아나갔다. 이자를 아주아주 넉넉히 쳐서. 은혜 입은 까치의 심정이었다... 자비로운 오라버님은 여진이 학교 다닐 동안 상환 유예를 허용해주기까지 했으니.
흔한 용돈 한 번 못 받은 것은 섭섭하지 않았다. 제 시기에 독립한 셈이라 생각했다. 섭섭했던 건 부모님의 냉랭함 뿐이었다. 입교식도 안 와 주실 줄은. 학교생활 내내 여진은 방학이면 외갓집에만 뻔질나게 찾아갔고, 본가에는 명절 때만 무뚝뚝한 얼굴을 비췄다. 불효자였지. 외할머니는 달관하신 듯 털털 웃으셨다.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 그거 아니? 니 고집이 니 엄마랑 똑같어, 니 엄마 고집은 날 닮았고.
부모님은 임관식 땐 그래도 와 주셨다. 사진 찍자고 붙들어 세워 놓고는 형사과는 절대 안 된다고 거듭 엄포를 놓으시긴 했지만. 그 후로 한 해 두 해 흐르며 여진도 부모님도 점점 누그러졌다. 여진은 제 돈으로 선물을 사며 뿌듯해했고, 집밥을 먹을 때면 몹시 즐거워했다. 어릴 적처럼 살살 웃으며 애교를 부려대기도 했다. 그러나 여진이 용산서 강력계로 옮겼을 때 불화는 결국 재발했고, 여진은 문제의 본질이 그대로란 걸 아프게 깨달아야만 했다.
웃으며 서로를 대할 때조차도,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매번 느끼고 만다.
"거실로 들어와. 아버지랑은 얘기 안 할 참이니?" 어머니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진은 눈을 쓱 문질러 약해졌던 흔적을 지우고 결연히 거실로 향했다.
"본청에 있으면 승진하기 좋다지. 본청 하면 예전부터 최고 엘리트야, 경찰대 나왔어도 못 가는 놈들도 수두룩한걸." 아버지는 근처에 앉은 친척들이 듣도록 목소리 볼륨을 평소보다 키우셨다. 그러자 작은아버지들이 돌아보며 맞장구 치듯 덕담들을 건네셨다. 여진은 표정을 감추고 빈 얼굴에 미소를 덧씌웠다.
...부모님을 완고한 분들, 보수적 사고방식에 물든 분들로 치부하게 되는 게 늘 괴롭다. 평생 공무에 힘써오시며 와중에 우리를 길러내기까지 하신 분들인데, 난 왜 자꾸 이분들을 평가하고 이분들에게 실망하고, 그러길 반복하는 걸까.
더 괴로운 건 따로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의 형태가 철저히 부정당하는 것이, 변하지 않을 내 고유의 특질들이 한때의 젊은 치기로 치부되어버리는 것이 못내 괴롭다. 두 분이 나를 걱정하신단 건 알겠지만, 그 걱정이 나를 옥죈다.
분야는 달라도 제가 걷는 길은 두 분의 길과 다르지 않아요. 우리 다 같은 공직자잖아요. 원칙을 중시한다, 도덕률을 지킴에 있어 철저하다, 그런 공통분모도 있잖아요. 제가 선택한 길을 그냥 눈 딱 감고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어째서 이렇게 소통이 힘들까. 왜 매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부모님을 온전히 이해하질 못하는 내 잘못도 있겠지.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난 답을 알고 있잖아. 서로 존중하되 거리를 두는 것, 그게 정답 아닌가?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잖아. 난 왜 매번 가망 없는 기대를 품는 거지?
"이젠 형사도 그만뒀겠다, 빨리 짝 찾자. 때 놓칠 참이니?"
여진은 파드득 놀랐다. 맙소사, 거실에 데려다 놓고 두 분이 맞은편에 나란히 앉으셨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시선을 피하며 심호흡을 두어 번 해야만 했다. 후우... 오빠놈은 얼마나 바쁘길래 하필 이번에 빠지냐.
두 살 터울 오빠 또한 아직 독신이라, 둘 다 와있는 날이면 부모님 공격이 양쪽으로 분산된다. 각자도생에 충실한 남매는 서로를 방패로 활용하곤 했다... 대학생인 막둥이는 아직 대상자가 아니다. 육촌 동생들과 놀고 있는 해맑은 동생놈을 돌아보며 여진은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막내야, 평화를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네가 부득불 싫다고 매번 피해버리니 한동안 안 알아봤다. 그런데 네가 계속 이 모양이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어." 여진은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애써 웃으며 애교를 부려봤다. "아유, 저라고 아무것도 안 하겠습니까... 믿어 주세요." 결혼을 꼭 해야 하냐고 되물었다간 특히 아버지 혈압이 오르실 걸 알기에, 여진은 매번 적당히 넘어가는 편이다.
"소개팅 꾸준히 해보고 있는 거지? 네 직장 좋아진 만큼, 기준 더 높게 잡아. 당연히 알아서 잘하겠지?" "..." "상대한테 어머니 아버지 직업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형제 언급 나오면 네 오빠 직장도 말해라." 어머니가 덧붙이셨다.
여진은 이쯤 되자 유체이탈을 시도하고 싶었다. 어쩜 나를 이렇게까지 모든 면에서 몰라주실까. 여진의 마음속에서 옥탑방과 본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전자는 초라하지만 즐거움과 자유가 있는 공간, 후자는 번듯하지만 더없이 갑갑한 공간.
"지금 누구 있어요, 저."
이 선언을 안 하면 밤늦게까지 두 분 훈화를 듣느라 놓여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진은 빨리 이곳을 뜨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부모님은 시선을 교환했다. 아버지 얼굴엔 화색보단 걱정이 먼저 떠올랐다. "뭐 하는 사람이니? 너 전에 예술가 같은 소리 하더니 설마 그런 사람 만나는 건 아니지?"
예에 맞아요, 저 지금 예술인 만납니다아! 이제 그 예술인 만나러 가볼게요- 외치고 나와 버리고 싶었다. 대신 여진은 다소곳이 고개를 포옥 숙였다. "진짜 좋은 사람이랑 알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 주세요." 미심쩍어하시는 반응을 본 여진은 마지못해 말을 보태야 했다. "그 사람도 공무원이니 걱정 마세요!" 그제야 두 분은 작게 끄덕이셨다.
더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저어, 이제 설거지 해놓고 가보겠습니다." 여진은 몸을 일으켰다. 죄지은 것마냥 꿇어앉았던 탓에 다리가 온통 저렸다.
누구 있다고 말한 거, 아직 사실 아니지, 상황 모면한 거지... 그런 속말을 하다가 문득, 생각하는 걸 잠시 쉬고 싶었다.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그래서 팔이 뻐근하도록 그릇들을 문질렀다. 이것들만 다 해치우고 나면 당신한테 간다... 이 생각만 남기고 나머지 상념은 다 싱크대 밑으로 흘려보냈다.
여진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어른들께 공손히 인사했고, 집이 한산해지고 나자 동생을 불러 주머니에 꽤 두둑한 용돈을 찔러줬다. "누나 먼저 간다! 남은 청소는 니 몫이야. 각자 잘 살다가 또 보자꾸나..."
부모님은 현관까지 나와 배웅해 주셨다. 여진은 입꼬리를 한껏 올려보았으나, 제 미소가 자연스럽지 않음을 알았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길에 여진은 문득 슬퍼졌다. 어느 훗날에 황검사를 소개하게 된다면 이분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 보수적이고 걱정 많은 분들이, 그의 평판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풍파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 세간에 회자되는 그를 어떻게 여기실까. 여진은 막막한 기분에 잠겨 차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이걸 왜 벌써부터 고민해. 정말이지, 오늘 같은 날은 머릿속이 참 와글거리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일수록 절대 인정해준 적 없는 분들이야.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여진은 흠칫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내 미간을 조이며 입술을 꾸욱 물었다.
황검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그래, 난 경찰대 재수 때랑 똑같이 할 거야. 부모님이랑 전보다도 더 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원하는 걸 얻을 거야. 엄마, 이번엔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여진은 기지개를 힘있게 쭈욱 펴곤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나서기 전, 여진은 눈을 부릅뜨고 본가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시목은 공손하게 허리를 포옥 숙인 후, 들고 있던 선물 가방과 테이크아웃 모과차를 내민다. 어머니는 그걸 보지도 않고 받아들면서 아들 얼굴만 조용히 응시한다.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 그런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든 행동이 그저 의무로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라 여겨왔으므로.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시목 차 쪽으로 걷자, 시목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문을 열어 드린다. 모자는 후열 좌석에 나란히 앉는다. 한동안 침묵만 오간다.
"뭐 하다 이제 오니. 저녁도 같이 안 하고."
"일이 늦게 끝나서... 죄송합니다."
시목은 일터에서 바로 달려온 길이다.
원주시 소재 화학폐기물 처리 업체에서 유출 사고가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었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없다면 근로자들과 인근 주민의 보호를 담보할 수 없었다. 지청장은 미온적이었지만 임혜인 부장은 한껏 촉을 곤두세웠다. 시목의 날카로움을 진작부터 알아보았던 부장은 기회가 오자 그를 제대로 활용했다. 이만큼 대놓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직속상사는 시목으로선 처음이다.
해당 업체는 (주)한조케미컬의 2차 하청에 해당했고, 한조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은폐에 아주 능했다. 여름 막바지에 시작한 수사가 근 한 달째다. 시목은 서울에 그간 한 번도 오질 못했다. 내원할 시간을 낼 수조차 없었고, 몇 달간 이어져 왔던 여진과의 주말 루틴 또한 잠정 중단되었다.
연휴 첫날까지 일에 파묻혀 밤을 새워야 했다. 한조케미컬 측에 요청한 자료가 하루나 늦게 도착한 탓이다. 그래도 추석 당일 늦은 오후까지 매달린 덕에 보고자료 작성을 마무리해놓고 왔다. 다음 단계 승인은 연휴 끝나고 지청장이 복귀해야 이루어질 테니, 그전까진 달리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얼굴 보러 온 게 어디니. 명절에 안 온 적이 더 많은데."
"...죄송합니다."
"네 잘못만은 아니겠지. 여기가 불편한 건."
"..."
"새아버진 안에 친척들이랑 있으니까... 여기서 얘기하자. 어차피 자고 갈 것도 아니라면서."
"...곧 들어가 보셔야 되지 않나요."
"내 아들 보고 온다고 했다... 제사 뒷정리는 원래 그이가 알아서 해."
"..."
다시 대화가 끊긴다. 어머니는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앉아 창밖을 응시한다.
대화... 모자간의 대화란 어떠해야 하는가. 시목은 어머니로부터 원하는 게 없고 그저 늘 죄송해할 따름이다, 어머니가 겪으셔야 했던 그 크나큰 고통은 시목으로부터 왔으니.
어머니는 어떠실까. 어머니도 바라는 게 없으실까?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너무 지쳐버리셨다. 수술 전에 이미 지치셨고, 수술 후엔 또 다른 이유로 힘들어하셨다. 시목이 아무 것도 표현하질 않아서... 되돌아오는 게 없어서. 그래서 결국 포기하셨을까.
시목은 말을 이어갈 시작할 거리를 생각해본다. 그동안 경감님과 그토록 많이 연습했던 표정들 중 하나라도 지어보려 애써본다. 그러나 왜일까, 남들은 어머니 앞이 가장 편하다는데 시목은 어째서 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굳어버릴까.
시목은 부질없는 시도를 그만둔다. 대신... 조용히 몸을 굽혀서 어머니 손을 살포시 잡는다. 양손으로 고이 감싼다.
어머니는 많이 놀란 듯 작게 움찔한다.
"웬일이니." 하며 잠시간 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손을 들어 아들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본다...
한참 묵묵히 고개를 숙였던 시목이 조용히 어머니를 응시할 때, 그의 얼굴엔 일견 슬픈 미소가 엷게 떠올라 있다.
"죄송합니다." 시목이 속삭인다.
"..."
"의무 때문에 찾아오고 배운 대로 죄송하다 말하는 거 아닙니다. ..오랜만에 뵙고 싶어서 왔고, 정말로 죄송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 이젠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 보려 합니다. 그러니 이젠 절 좀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시목의 속말은 쉬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머니를 응시하는 시목의 표정엔, 이젠 명백한 슬픔이 서려 있다. 눈가가 희미하게 붉다.
어머니 시선이 아들에게 붙박인다.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도리질 친다. 내내 잠잠하던 어머니 얼굴이 이젠 금방이라도 울 듯 일그러진다. ...아들이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을 떈 그에 기대어 냉혹할 수 있었던 어머니다.
"맙소사... 너 언제부터."
"...저도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나 봅니다. 사람은 변하잖습니까."
"네가? 이 세월이 흐르고서... 갑자기?"
"그새 의료기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하네요. 해서 이젠 일부 재활이 가능합니다... 의사 말이, 이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답니다."
시목은 말을 아낀다. 치료에 대해선 간략히 알리되 소송에 대해선 끝내 말씀드리지 않을 할 생각이다. 알려드린다면 어머니는 재활을 진작에 - 수술 당시에 해야 했다는 죄책감에 빠져드실 테니.
"왜 그걸 이제 얘기하니..."
"실패하면 말씀 안 드리려 했죠..." 시목이 살포시 웃는다. 표정을 지어보려 일부러 애쓸 적엔 전혀 안 되더니, 이젠 물꼬가 트였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을 들어 시목 얼굴을 만져본다. 엷은 미소가 담긴 입꼬리, 살짝 접힌 눈가... 네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을 아는구나.
시목은 잠자코 여행용 티슈를 꺼내 어머니 뺨의 눈물을 닦아드린다. 조심스레, 섬세한 손길로.
"왜 난... 아무것도 알아볼 생각을 못 했을까. 어떻게 아무것도 몰랐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그 긴 세월을 그냥..."
"왜 그게 어머니 탓입니까. 제 나이가 몇 갠데요, 당연히 제가 알아보고 움직여야 할 사안입니다."
"..."
"저 이제 엎어지면 마흔입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어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죠."
"..."
시목은 두 번째 티슈를 꺼내 어머니 눈물을 닦아드린다. 어머니는 사양하지 않고 시목이 하는 대로 둔다.
"...바뀔 기회를 다 무시해버린 건 제 선택이었습니다... 이제야 기회를 잡아보는 중입니다."
어머니와의 관계도요... 전 이제야, 이 세월이 흘러서야 노력해 보려 합니다. 기회가 남아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머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사과를 하며 시목은 어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어머니는 문득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명절이라 주차장에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차창을 끝까지 꼭꼭 올린다. 그제야 비로소 둑이 터진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시목은 어머니가 목놓아 우시는 걸 정말이지 오랜만에 본다. 그는 둑이 터진 듯 눈물을 쏟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손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린다. 시목은 제 가슴께를 살짝 문질러본다. 안에서 뭔가가 뭉친 것만 같다. 함께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나눈다는 게 이런 건가. 어머니는 이런 걸 느껴오신 걸까. 이렇게 펑펑 우시고 나면 좀 나아지실까. 시목은 그렇게 우는 법을 여전히 모른다..
내가 무얼 해야 할까, 망설이던 시목은 몸을 굽혀 어머니를 살포시 안는다. 힘주어 눈을 꾸욱 감는다. 그동안 이 포옹 한 번이 그렇게 어려웠나. 어린 시절엔 참 든든하게 느껴졌던 어머니 어깨가 이젠 이토록 여위고 작아졌구나. 어머니도... 나이를 많이 드셨구나.
수술 후 시목이 잠잠해지고부턴 나름의 평형 상태를 찾으셨는데, 한참을 안 우셨는데... 평온하던 어머니를 괜히 다시 뒤흔들어 놓은 것만 같아서, 시목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린다. 아... 수술 전 어린 시절 느꼈던 바로 그 통각이다. 이 감각은 감정이겠지. 죄책감과 슬픔.
어린 시목은 어머니 곁에서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가 밀쳐내면 다시 매달려 끌어안으며.
'같이 가자 시목아, 엄마랑 죽자... 나랑 너랑... 그냥 같이.'
'엄마, 잘못했어. 엄마... 다신 안 그럴게요, 엄마.'
'더는... 못하겠어.'
이명이 올 것만 같다. 조짐을 인식한 시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그는 작게 도리질 친다. 안 돼, 지금은, 절대로... 절대... 시목은 사력을 다해 버틴다. 아슬아슬한 경각에서 그를 붙드는 건 여진과의 기억 한 자락이다. 비틀대는 그를 옆에서 꽉 붙잡아주던 그녀의 손힘을 떠올리고, 자알 참았어, 우리 검사님 많이 쎄졌네- 하던 그 다정한 목소리를, 바로 귓가에서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밀려오려던 고통의 물결이 서서히 물러간다. 시목은 피가 나도록 앙다물었던 입술을 푼다. 새하얗게 질린 입술에 천천히 혈색이 돌아온다. 숨을 여태 계속 참았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신선한 공기가 폐에 들어차자 정신이 돌아온다. 헐떡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손으로 입을 막는다. 다른 한 손으론 다시 어머니 어깨를 토닥여드리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던 탓에, 그의 이상징후를 눈치채지 못하셨다. 시목은 안도한다. 그가 철저히 숨겨왔기에, 어머니는 후유증이 진작에 다 사라진 줄 아신다.
어머니를 만나고 온 후 이명에 쓰러진 일이 몇 번 있었다. 어머니는 그 일들을 영영 모르셔야 한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어머니 눈물이 한참 만에 멎는다.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본다.
"한 밤이라도 묵어가지 그러니..." 시목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는 미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다음 번엔... 어머니 댁에서 묵겠습니다."
어머니가 순간 멈칫한다.
"너, 오늘 밤에 어디서 자니."
"..."
...기시감이 든다. 시목은 다섯 달쯤 전(서울을 뜨기 직전)의 대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너, 대검 처음 왔을 때 어디서 잤어."
"관사에 묵었습니다."
"관사 들어가기 전엔?... 관사 곧바로 배정 안되는 건 엄마도 안다."
"..." 어머니 집을 놔두고 호텔에 살았다는 말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시목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네가 네 아버지 닮아서 멀끔하지, 직업도 번듯하고. 너를 보고 혹하는 여자들이 없을 리 없다. ...엄마가 전부터 말했지, 넌 다른 남자들처럼 하면 안 돼, 넌 그러면 안 된다. 피임이 완벽한 줄 아니. 혹여라도-"
어머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시목의 병을 물려받은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성적이지 않을 정도의 그 공포심을 시목은 오래전부터 알았다.
나 같은 아이를 가지신 게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기에.
시목이 고개를 숙였다. 죄책감 어린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묻힌 탓에 어머니 눈엔 닿질 못했다... 아파트 단지 뜰이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혼자, 비즈니스 호텔에 묵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시목은 담담하게, 확신을 드리듯 말했다.
"그래. 원주에서도 조심하고. 엄마 말 늘 명심해." 어머니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한 번씩 꼭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이차 성징을 시작하던 나이부터 수도 없이 쐐기를 박았다, 여자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너는 무성의 존재여야 한다고.
"시목아."
"네."
"누구 집에서 자는 거니, 오늘"
"..."
"...조심해라, 너-"
"어머니." 시목이 어머니 말을 가로막는다. 나지막한 그 음성이 미세한 떨림을 담는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멈춰 놓고도, 알맞은 말을 고르느라 쉬이 입을 열지 못한다. 어머니가 그를 돌아본다.
"...전에 네가 그랬지, 그런 건 너한텐 절대 없을 일이라고."
"..."
"지금은 생각이 다르잖니."
"..."
"내 말이 맞지?"
"어머니, 전에 말씀하시곤 하던 방식대로 예상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오늘 만나려는 분에 관해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
"...동료다, 친구다, 연인이다, 그렇게 하나의 타이틀로 정의할 수는 없는 분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늘 제 주변엔 사람 하나 없다고 아쉬워하셨죠... 이젠 다릅니다. 그분 덕분에요."
아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어머니 시선을 맞받는다.
"더없이 귀한 분입니다. 그분이, 제가 변할 수 있었던 이윱니다."
그분이라는 사람이 아들에게 어떠한 의미일지, 시목 어머니로선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는다. 지나칠 정도로 깍듯한 아들은 존칭의 규범을 늘 칼같이 지켰다. 그런 아들이 압존법을 무시할 정도이니.
"그분이... 아니? 네 머리..."
"네. 한참 전부터요."
"..."
"처음 재활 결정할 때도, 과정에도 늘 함께 있었습니다."
"...나보다 훨씬 낫구나." 어머니가 거의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린다.
"사진 하나만 보자. 같이 찍은 거 있으면."
시목이 잠자코 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연다. 여러 장 중에서 고민하다가 시목 본인 또한 웃고 있는 사진을 고른다. 어머니 시선이 한참을 붙박인다. 처음엔 시목의 미소 띈 입가에, 그다음으론 그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는 여진의 얼굴에.
침묵이 이어지자, 시목은 어쩐지 불편하다. 경감님이 보여드려도 된다 하셨기에 보여 드렸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한참 들여다보실 줄은 몰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이 분이 네가 남자로서 좋대? 그래서 재활도 돕고 그랬대?"
"..."
"드러나게 말하거나 표현한 적이 있니?"
"그런 일은 없었-"
"그래, 아직 남자 여자 사인 아니라는 거지?"
아니어야 한다는 느낌이다.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하신다. 시목은 안다, 방금 보여드린 사진은 누가 봐도 커플의 사진으로 보인다는 걸.
"아직 아닌 거다, 곧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니?"
"어머니,-"
"지금은 복잡한 상태라는 거지?"
"복잡하다기보단-"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거, 나도 안다. 동료이기도 하고 아직 선은 안 넘었고, 그런 상태."
시목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는다. 그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직장에서 만나셨다. 두 분 사이엔 모호함의 시기가 있었을 테고, 그걸 거쳐 두 분은 결국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후회하신다.
"그 선 하나만 안 넘으면 된다. 그럼 적어도 후회할 일은 없어. 미워할 일도 잃을 일도 없고."
...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후회를 하셨을까.
그 괴로운 후회, 이미 소용없는 후회에 잠식되어 젊은 시절 매일을 그토록 힘들게 사셨던 어머니를 안다. 시목 마음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이 먹물 푼 듯 확 피어오른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림과 동시에 친숙한 두통이 스멀스멀 자리 잡는다.
"첨엔 뭐든지 다 이해할 것처럼, 끝이란 건 없을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사람 마음, 쉽게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일 수가 없어."
"..."
"가정을 이뤄보고 싶기도 하겠지."
"어머니, 전-"
"당장은 좋아서 결혼한대도 상대가 조금만 문제 있으면 갈라서는 게 남녀다."
"..."
"배우자가 삶에 필수인 건 아니다. 알지?"
"..."
시목이 상처받은 얼굴을 든다. 두통을 참느라 한껏 힘준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차창 밖 먼 곳을 향한 탓에, 어머니는 아들의 상처 입은 눈빛을 알지 못한다.
"혹여나 너 병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제야 너무 심했나 싶었던지 어머니가 말을 멈춘다.
네 생일엔 좀 찾아와라. 밥 한 끼라도 같이 하게-, 어머니는 그렇게 당부하곤 했건만, 시목은 생일이면 일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야근을 했다. 늦은 새벽 터벅터벅 혼자 걸어서 귀가하곤 했다. 어머니의 비극이 탄생한 날, 그 날의 기념일이 지나간 걸 다행으로 여기며.
물러났던 전조증상이 온몸을 휘감는다. 시목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안간힘을 쓴다. 이번엔 어머니에게 숨기지 못하리란 예감이 그의 가슴을 콱 조인다.
그를 부르는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이, 마치 물속에서 듣는 듯 모호하게 웅웅 울린다. 흐려진 시야가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검게 어두워져 간다.
시목은 머리를 꽉 싸맨 채 무릎에 기대어 신음한다. 흉중에 알 수 없는 열기와 한기가 함께 들끓어 이젠 견딜 수 없다고 느낀 순간-
"검사님도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땐 억지로 버티려 하지 마요... 알았지?"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울린다. 주위를 소용돌이치는 소음들 속에서도 그 목소리만큼은 더없이 또렷하다.
의사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스스로 감정을 인정하질 않으면 결국 쌓이고 쌓여 이명이 되는 겁니다.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걸 부인하지 말고 인정하세요. 이명을 참으려고만 하지 마시구요. 원인이 명확할 땐 그 원인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야.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힘을 빼 봐요. 참지 말아 봐... 응?"
이번에도 그를 붙잡은 건 여진이었다. 문득 시목은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낀다. 그를 뒤흔들던 날카로운 고통이 서서히 잦아든다.
이십여년 만의 눈물은 길지 않았다. 시목은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곤 천천히 고개를 든다.
입술을 오므리자 짠맛이 느껴진다. 눈물을 흘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시목은 묘하게도 기쁘다. 그래서 여진을 떠올린다. 울 줄 알게 되었다고 자랑을 해야 할까. 아니다, 안 된다. 왜 울었는지 설명할 수 없잖은가.
어머니는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떨고 계셨다.
"...난 네가 상처도 안 받는다고 생각했어. 그 동안 너한테 온갖 모진 말 하면서..."
"괜찮습니다... 상처 안 받습니다."
거짓말이다. 이건 진심이 아니다. 결국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동안 어머니 집을 좀처럼 오지 못했던 진짜 이유가 뭔지, 어머니는 영영 모르셔야 한다.
어머니의 떨리는 손이 시목의 뺨을 감싼다.
"미안하다..." 시목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미안하다, 시목아." 어머니가 잠긴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눈가가 다시 뜨거워진다. 또다시 울고 싶지 않아서, 시목은 감았던 눈을 뜨고 애써 입꼬리를 올려본다.
"어머니. 이젠 짐을 내려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어머니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
"그럼에도 지켜 주셨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잘 컸잖습니까."
"...그래. 잘 컸지."
"..."
"..."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제 제가 나이가 몇인데요." 시목이 위로하듯 다시 작게 웃는다.
한참 만에, 그 위로를 받아들인 어머니 입가에도 아주 엷은 미소가 어린다. 눈물 어린 슬픈 미소. 시목은 어머니의 미소가 낯설다는 걸 깨닫는다. 어머니 미소는 어쩌면 먼 기억 속에만 있었다...
그 긴 세월 어머니께 웃음 한 자락 선물하지 못했다. 아니, 그 긴 세월 어머니 웃음을 앗아간 존재가 바로 나다.
이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콱 조여든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지언정, 이명의 전조를 또다시 겪진 않는다. 죄책감에 잠식되지 않겠다고, 어느 저녁 긴 얘기 끝에 여진과 약속했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영영 엷어지지 못하겠지만, 그 죄책감을 안은 채로 걸어야 하는 거겠지. 과거를 직시하되, 과거 때문에 머뭇대진 말아야지.
여진이 발걸음을 우뚝 멈춘다. 기척을 느꼈는지, 대문 앞에 살포시 기대어 섰던 시목이 이쪽을 본다. 여진을 발견한 시목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뭐야, 왜 밖에 있어요." 여진이 헐겁게 웃는다. 어쩐지 목이 잠긴 듯,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시목은 말없이 살폿 웃으며 눈을 맞춘다.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하듯.
위로받으려는, 그리고 위로하려는 그 슬프고 맑은 눈빛에 여진은 가슴이 시리다.
당신의 본가 방문은 어땠을까... 당신도 힘들었을 것 같아. 어떻게 아냐면, 그 말갛고 부드러운 얼굴은 아픔을 잘 못 숨기거든. 가장 덤덤해 보일 때조차 천 가지 만 가지 표정이 있는데, 난 그걸 읽어내거든...
시목이 허락을 구하듯 눈을 크게 뜨며 한 발짝 다가선다. 여진이 양팔을 살며시 벌린 것과 동시다. 여진이 웃음을 터트린다. 통했네.
시목도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그가 그렇게 웃을 때, 눈동자 속의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시목이 천천히, 신중하게, 마지막 거리를 좁힌다. 깊숙이 눈을 맞추며.
시목이 여진을 감싸 안는다. 다가설 땐 그렇게 조심스러웠으면서, 막상 품에 안고 나자 후퇴라곤 없다. 빈틈 하나 없이 꼭, 꼭, 껴안으며 여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는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온전히 하나가 된다.
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지만, 이내 스르르 눈을 감고 편안히 기댄다. 온몸의 힘을 풀고 기대어도 될 만큼 포옹은 굳건하다.
여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오늘 하루가 참 길었어, 검사님도 그랬죠." 시목이 조용히 끄덕이자 보풀거리는 머리칼이 여진의 귓가를 간질인다. 여진은 시목의 목덜미에 뺨을 기댄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하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한다. 그 낮은 목소리의 감미로운 진동을 느끼며, 여진은 그의 목덜미에서 숨을 들이켠다.
한참 만에 여진이 속삭인다. "난 지금 진짜 괜찮아요. 그냥 다 괜찮은 거 같아."
"저도요." 시목도 속삭인다. 시목도 눈을 포옥 감은 상태다.
언젠가 여진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우리 검사님, 이따금씩은 그냥 긴장을 풀고 생각을 쉬었으면. 눈을 편안히 감고 그냥 기대서 쉬었으면.
...그게 가능하도록 하는 존재가 당신에겐 나여서, 내겐 당신이어서, 모든 게 그냥 다 괜찮은 거 같아, 그냥 다 괜찮아.
다행이다, 이 긴 하루 끝에 당신과 있어서.
<Chamomile 7화 끝>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편은 좀 무거웠죠...😥
여러분의 긴 하루 끝도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이어지는 시목여진 회차들은 포스타입으로만 연재됩니다!
( Chamomile 마지막 화, Chamomile 외전_ 여진 편, 이어지는 시리즈 [시목여진] '웃어요' )
https://bori-shrimp.postype.com/post/8722161
[시목여진]_[Chamomile]_8화. 감정의 무게
가슴에 든 게 많은 사람한텐 시간이 느리게 흐른대. 당신 여기에 든 게 많다고.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구요. 그 세월, 그렇게 길었다며. Chamomile 1화부터: https://bori-shrimp.postype.com/post/828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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