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2019년 세밑. 이연재 회장과 박상무 / 황시목과 황시목을 아끼는 사람들
비숲 세계관에 충실하지만 산업재해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관련 내용은 실제 통계 및 사례들입니다. 가장 아래 참고문헌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 크리스마스 이브 이른 저녁, 이연재 회장 집무실
"이제 좀 쉬시지요, 회장님."
"쉬라는 소리도 계속 들으면 그 자체가 피로 요인이야. 알지."
"...죄송합니다." 박상무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박상무는 내 건강에 관심이 참 많아?"
"..."
"하기야, 회장 건강이 중요하지. 근데 난 알아서 잘 챙겨요."
"네, 회장님."
연말은 연중 일이 가장 무겁게 산적한 시기다. 매 결정에 약간의 판단 착오라도 있다면 그건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회장의 자리를 위협할 것임을 회장도 그 수하도 명확히 인지한다. 이 안락한 요새와도 같은 높은 곳에 파묻혀 있음에도 회장은 매 순간 위태롭게 줄 위를 걷고, 회장의 그림자는 회장으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며 함께 걷는다.
지금 회장은 유독 날카롭다. 박상무의 기민한 눈이 회장을 몰래 관찰한다. 단순히 격무에 시달려 지친 것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박상무는 제 존재가 달려있기라도 한 양 매 순간 회장의 심기를 면밀히 살핀다. 박상무보다 더 예민하게 회장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론 회장 본인도 모르는 미세한 감정의 기복들마저 그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읽어내니.
회장은 생각에 잠겨 있다. 박상무의 시선이 회장 탁자에 흩어진 서류를 스친다. 회장의 눈이 지금 이글거리는 건 저 보고서들과 무관할 수 없다.
"회장님."
박상무는 개입해 보기로 한다.
"...회장님께서 직접 신경쓰실 사안은 아닙니다. 황시목 검사요."
회장 눈이 순간 날카롭게 좁아든다. 박상무는 그걸 알지만 일단 계속한다.
"사안이 그 정도로 크진 않습니다. 당한 건 결국 하도급업체 하나일 뿐입니다. 황검사 때문에 우리 그룹까지 책임소지가 번진 건 맞지만 그래도 벌금액 규모를 최소화했잖습니까."
"지금 벌금이 문제야? 언론 통제 사실상 실패했어요. 사망사고가 난대도 한조는 발 뺄 수 있는 게 하청 쓰는 것 이점 아니었나? 지금 우리 그룹 이미지는 살인기업이에요." 회장이 쏘아붙인다.
"... 죄송합니다.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회장이 눈썹을 치켜뜬다. "박상무 잘못은 아니지."
까만 눈동자가 짙어진다. 회장 시선은 탁자의 서류를 향한다. 박상무의 시선도 그를 따라간다.
"지금까지의 피해도 작지 않지. 근데 난 앞으로를 보는 거예요. 앞으로 또 무슨 짓을 할지."
회장이 낮게 뇌까린다.
"한조케미컬 일이 산안법 개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알죠? 유족들이 힘을 얻어서 아직까지도 시위를 하고 있다고. 황검사 아니었던들 진작에 잠잠해졌을 것을."
"회장님, 산안법 개정은 유명무실해질 겁니다. 보여주기용입니다."
"나도 알아요. 우리가 손 쓴 게 언제부턴데. 우리 뿐만이 아니지, 더반도 이럴 때만큼은 같이 움직이잖아."
"더반 외에도 사실상 대부분 움직였고요. 현재까지 법제처 작업은 순조롭습니다, 위원장부터 넘어왔으니까요."
"조만간 자세하게 보고해줘요."
"네, 회장님."
"믿어, 박상무가 이런 데엔 둘째가라면 서럽지?"
"과찬이십니다." 박상무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편다.
회장이 눈을 내리깔고 낮게 중얼거린다. "멍청한 것들. 우리가 가만있을 줄 아나? 사고 날 때마다 원청 책임을 묻는다면 기업마다 손해액이 얼만데. 될 소리를 하라 그래."
박상무는 다시금 몰래 회장의 표정을 살핀다. 회장은 서류 하나를 집어 들고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다.
"경찰 쪽은 어떻게 돼가죠?"
경찰이 검찰 밑에서 벗어나면 힘을 얻겠지, 그러니 경찰에 우리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 - 회장의 지시로 한조는 검찰 뿐 아니라 경찰에 대해서도 작업을 본격화한 지 오래다. 박광수를 통한 정보국장 포섭도 그 일환이었다...
"수사국 중대범죄수사과는 작업 끝났습니다. 기업 경제범죄 담당이니만큼 도움이 될 겁니다."
"정보국은 왜 진전이 없지?"
고위급을 구워삶는 작업은 올해 유독 인풋 대비 아웃풋이 낮았다. 특히 새 정보국장이 비협조적이었다.
남양주 별장 성매매 및 사체유기 사건은 당초 예상보다 크게 불거졌다. 한조가 거론되는 걸 막으려면 서동재 입만 다물리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강원철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후배를 지킨답시고 그 자리를 내려놓을 줄은 예상이나 했을까. 덫을 놓으면서 짐작이나 했을까, 그 덫을 빠져나간다고 다리를 아예 잘라버릴 줄은. 그때나 지금이나 회장은 강원철 전 지검장에 관해 보고받을 때면 미친놈, 하고 중얼거린다.
강원철이 사직하기 전 취한 움직임으로 인해 수사는 한조를 향했다. 한조는 박광수 별장 사건과 결국 연관 지어졌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돈을 꽤 많이 들였으나 그 일이 묻히기엔 대중의 분노가 너무 컸다. 성상납이라는 가장 추한 형태의 비리, 그리고 질시와 선망을 동시에 받는 거대기업 한조. 이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들어박히는 연결이었고 끓어오른 여론은 꽤 오래갔다. 한조의 성장세는 일정 부분 타격을 입었다. 이연재 회장은 어찌 됐든 평정을 유지했다. 오래가지 않아, 거듭 중얼거리며.
그 후 경찰청이 이미지 쇄신에 몰두하는 통에 고위층 컨텍이 어려워졌다. 별장사건 이후 많이들 눈치를 본다.
"눈치를 보는 게 다가 아닙니다. 검경 수사권조정 때문인지, 비리 자체를 줄이려고 경찰 조직이 기를 쓰고 있습니다."
"...미련한 것들. 쓸데없는 짓 하네. 어차피 경찰로 권력 일정 부분은 넘어가게 돼 있어, 빠르든 늦든."
흩어진 서류 중 어느 정보국 주임의 신상 파일이 눈에 들어온다. 박상무는 그게 누군지 안다. 연줄도 없으면서 정보국장의 신임을 얻어 청장 직속 감찰팀에 들어간 젊은 경감. 소위 '깨끗해지려는' 경찰 조직이 표방하는 '합리적 인사배정 시스템'의 결과.
"얘도 황시목 관데 정보국에 왜 저리 오래 놔두지? 멍청한 것들."
"수사권조정에 유리하니 이미지 측면에서 놔두는 것 같습니다."
"정보국장이랑 짝짜꿍인 거지 뭐. ...얘도 어찌 됐든 밀려나겠지. 쓰임 다하고 나면 그대로 두겠어?"
"팀 전체가 와해될 겁니다. 현 정보국장도 오래가지 못할 거고요."
"왜 저러고 살지?"
"..."
"버티기도 간당간당할 텐데, 조직에서 잘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나?"
한여진 주임의 파일을 내려다보는 이연재의 시선이 더 짙어진다.
"이 역시 회장님께서 직접 신경 쓰실 필요는..."
회장이 휙 고개를 들어 박상무를 올려다보더니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표정이 없다. 박상무는 조금 긴장한다.
"왜 일개 경감이며 평검사를 들여다보는지, 지금 그거 묻는 거죠?"
속내를 쉬이 읽는 건 때론 쌍방향이다. 박상무가 시인하듯 작게 끄덕인다.
"쌍으로..." 회장이 내뱉듯 낮게 중얼거린다. 회장은 문득 피식 웃는다. "얘네랑 나 알고 보면 인연이 꽤 오래됐어. 얘네 나 취조한답시고 집에까지 들이닥치기도 했는데."
박상무의 얼굴이 굳어든다. 2017년에 있었던 일을 회장이 언급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주 드문 일이다. 죽은 부군의 기일, 명절이나 연말, 아니면 모종의 트리거가 있을 때 뿐이다.
18년도 연말에도 이연재 회장의 괴로움은 짙었다. 그때 회장과 박상무의 거리는 지금에 비해 멀었기에 박상무는 자신이 무엇을 읽어냈는지를 숨겨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회장은 그때 일들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였으리라. 그때의 시간을 되새길 때면 회장의 얼굴엔 표독스러움과 분노, 아픔, 그리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한데 섞여 이글거린다.
그러나 오늘은 어딘가 다르다... 어쩐지 차분하고, 박상무가 처음 보는 표정이 섞여 있다. 박상무는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는다. 거꾸로 선 비늘들을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회장이 위에 펼쳐졌던 한조케미컬 재판 자료를 걷어다가 치운다. 서류에 깔려 있던 것들이 드러났을 때 박상무는 조금 놀란다. 박상무는 회장의 모든 움직임을 빠짐없이 파악하고자 애쓰나 가끔씩, 아주 가끔씩 회장은 오른팔조차 모르는 일을 벌인다.
파일 밑엔 고화질 사진 여러 장이 흩어져 있었다. 회장이 신경질적으로 사진들을 집어 들더니 얄쌍한 서류 한 장과 함께 내민다.
"봐요."
박상무가 재빨리 받아든다.
사진은 황시목 검사와 한여진 경감이고, 서류는 이들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다. 이성재 사찰을 위해 고용한 이들 중 한 명을 따로 빼내 움직인 듯하고, 황시목과 정보국 사이에 오가는 게 있는지 감시하는 데에서 시작한 듯하다.
명백한 불법사찰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박상무는 짐작해보려 애쓴다. 박상무가 아는 이연재 회장은 이유 없이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다.
보고서 하단까지 내려온 박상무의 눈이 좁아진다.
격주로 서울에 올라온다. 감정인식 재활 치료까지 받는다...
그제야 다시 사진을 살핀다. 수사를 모의한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내밀한, 사적인 교류다. 포장마차 테이블 너머로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사진을 보고 박상무는 확신을 갖는다.
회장이 상무에게서 파일을 도로 가져간다. 회장의 눈빛이 자못 사납다.
"왜 저러지? 로봇이나 다름없으니까 다 맡기고 갔다고 생각했어. 실제로도 내가 본 건 로봇이었어. 올봄에도 그랬어, 그이 행적이 완전히 폄훼되고 있는데 표정 하나 안 바꿨다고. 그이 얘기를 꺼냈는데도 아픈 낯빛 하나 안 했어. 그래놓고 지는 무슨 연애를 해?"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린다. 박상무는 언젠가 회장이 황시목 검사의 병력을 조사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때도 회장은 그에게 알리지 않고 움직였다.
"정상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까지 낳는다면, 병력을 언론에 퍼트려서 공격한대도 여론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 데리고 감성팔이라도 한다면 누가 침을 뱉을까요?"
박상무의 말에 회장의 얼굴이 순간 묘해진다. 노려보는 듯 책망하는 듯. 박상무는 황시목이라는 인물에 대한 회장의 복합적인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한다.
박상무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고개를 작게 숙인다. "죄송합니다."
포장마차 사진에 회장의 눈길이 머무른다.
회장 눈엔 옹색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음식점들을 찾아 마주 앉는, 그렇게 마주 앉아서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르는 그들.
회장이 픽 입꼬리를 올린다.
"왜 궁상을 떨어 저렇게. 공무원이라곤 하지만 월급이 그렇게 적나?"
박상무는 안다. 회장은 지금 조소를 위장하고 있다. 박상무는 의심을 해본다. 저 조소의 뒤편엔 뭐가 있을까...
어린 시절의 회장께선 돈 없는 어느 평검사를 사랑했다.
회장님의 기억 속에도 저런 순간들이 있었을까.
회장이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휙 밀어버린다. 박상무가 재빨리 사진들을 집어 들어 폐기 서류 상자로 옮긴다.
"쓸모가 없어. 이딴 건 왜 찍지."
회장은 이것도 버리라는 듯 박상무에게 보고서를 건넨다. 박상무는 보고서를 버리면서 몰래 뒤 페이지 내용을 읽는다. 최근에 올라온 보고서인지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에 두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까지 언급되어 있다. '둘 다 일터에 있는데, 한여진 경감은 외근으로 경북지방경찰청에 2주째 묶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황시목 검사는 휴가 반납하고 원주지청에서 추가근무 중입니다.'
회장 입꼬리에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걸린다.
"왜 저렇게 살지? 이해가 안 돼. 우리 그룹 젊은 변호사들이나 임직원들은 돈이랑 승진, 그거면 충성하는데. 쟤넨 뭘 바라서 저렇게 사는 거지?"
"..."
"저러면 뭐가 바뀐다고? 쟤네가 하는 일들, 결국 다 순리를 거스르는 거야."
"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죠."
박상무는 제 맞장구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지금 회장님을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는 회장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저까지 파악하려 총력을 기울이지만 짚일 듯 말 듯 복잡하다.
"...그이는,"
"...!"
"그이는 왜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냥 내 옆에서 살면 안 되는 거였나, ...참 많이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박상무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깐다. 그의 안 좋은 예감이 적중했다. 회장의 모든 괴로움은 결국 한 가지 원인으로 귀결된다.
"왜 유서를 내가 아닌 황시목한테 남긴 건지 이젠 알아."
"...회장님."
"내가 절대 안 바뀔 걸 알았거든. 그이가 날 가장 잘 알았으니."
"..."
"그이가 나를 바꾸려고 시도라도 해보다가 포기하고 갔더라면 난 죄책감에 못 버텼을 거야. 나한텐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갔으니 원망으로 버티는 거지."
"...!"
"그래, 난 하나도 안 미안해. 그리고 그이도 그걸 바랐어. 내가 미안해하면서 발목 잡히길 원치 않은 거야. 그러니 한 마디 귀띔도 안 했지. 자길 원망하라고."
"..."
처음이다. 회장이 박상무에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그 무게가 너무도 선명해서 박상무는 말을 잃는다.
"쌍으로 저래서 좋겠네 걔들은."
"..."
"서로 향하는 방향이 다르면 결국 끝이 안 좋아."
"...회장님."
"난 같다고 생각했어, 그이랑 내가."
"..."
"내가 내 눈을 가린 거지."
후회하시나요, 이 말은 결코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말이다. 박상무는 입을 굳게 다문다.
"허위가 아니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허위가 아니었다고."
이번에도 박상무의 짐작은 적중하고 만다. 어쩌면 지금까지 봐 온 것들만으로도 박상무는 이미 알았다. 사랑이었다. 회장님과 고 이창준 수석 사이에 마지막까지도 남았던 것은.
박상무는 늘 표정을 숨겨왔다. 흰 가면과 세련된 미소와 절도 있는 몸동작이 그를 가려주었다. 박상무의 눈빛이 짙어지는 일은 아주 가끔이지만 있어왔으나, 매번 그는 회장의 눈에 띄기 전에 감췄다. 고개를 숙여 그저 감췄다.
저는 회장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회장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끝이 어디든 함께. 더 빛나시도록, 더 높이 올라가시도록.
항상 숨겨왔으나 제 모든 동기는 회장님이십니다.
박상무가 작게 한숨을 쉰다.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안다. 감히, 차마 원해 본 적 없다. 지금 바로 이 위치가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높이다. 회장은 높디높은 줄 위에 있고 그는 그 그림자에 잠겨 밑에서 올려다본다. 이렇게라도 나란히 걸을 수 있음에 만족하며.
"박상무?"
회장의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성큼 다가선다.
생각을 읽힌 걸까, 박상무는 당황한다. 뭐라도 말해보려 황망히 입술을 달싹인다. 그로서는 드물게 평정을 잃는 순간이다.
나는 이 복잡하디 복잡한 분을 누구보다 잘 읽어내는 게 나라고 자부한다, 그 만족감이 나를 채워왔다. ...그러나 결국 읽히는 건 내 쪽인 걸까.
"오늘은 좀 쉬어요. 연휴잖아."
평소보다 훨씬 고압적이다. 일부러 보내버리는 것을 박상무는 눈치챈다.
회장님이야말로 쉬셔야 한다는 말을 회장은 대화 첫머리부터 이미 차단해 버렸으니, 이제 인사하고 나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박상무는 차분히 묵례하고 발걸음을 뗀다.
"잠깐만."
"...네, 회장님."
박상무가 흠칫 돌아선다.
"맹목적인 건 건강하지 못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은폐. 오래된 은폐. 남자는 가면을 쓴다.
"박상무는 참 헌신적이야. 우리 그룹에 대해서."
남자는 조그만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이 안도는 위태롭다.
얼굴엔 모종의 열감이 서린다. 문을 나서고 나면 냉수에 세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박상무야말로 본인을 좀 챙겨요. 한조에 충성하는 진짜 이유, 박상무 본인을 위한 이유를 찾아 봐요. 연휴에 한번 잘 생각해봐."
...저 자신을 위한 게 바로 회장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박상무는 아무 말 없이 묵례한다.
"나가는 길에 비서한테 말해요. 박상무가 받으랬던 그 건강검진 받는다고."
"날짜 잡겠습니다."
가엾은 남자는 그 수락에 기뻐하며 나간다.
문이 닫히고 나자 회장은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박상무 앞에선 한 번도 지은 바 없는 표정이다.
회장이 엷게 웃으며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다. "참... 똑똑한 애가 저렇게 미련할까."
몸을 일으켜 창가를 향하며 회장은 스치듯 중얼거린다. "내가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인 줄 아니."
밖엔 눈이 쌓이고 있다. 높디높은 곳에서 회장은 희게 변해가는 세상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사는 게 내 방식이야. 난 이곳 수장이야.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회사를 키울 거고, 내 위치를 굳힐 거야. 아직 많이 멀었어.
이게 내 삶이야. 내게 부여된 삶이기에 앞서서, 내가 선택한 삶이야.
난 당신 아내기에 앞서 한조 회장이야. 그 우선순윈 이제야 자리 잡았고 절대 바뀌지 않아.
역대 한조 회장들 다 내 경쟁자야, 누구보다도 실적을 많이 낼 거고, 이 회사를 키울 거야. 그 누구도 다신 우릴 흔들지 못하도록 이 나라를 휘어잡을 거야. 우리가 오래 고수해온 방식들, 승자의 방식, 조금도 바꾸지 않을 거야.
...여기서 우리, 란 한조를 뜻한다. 회장은 문득 황시목을 떠올린다.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우릴 건드린 걸 가슴치면서.
그 우리가 누굽니까. 사모님과 이회장입니까, 아니면 사모님과 남편분입니까.
지긋지긋해, 회장이 짓씹듯 내뱉는다. 황시목이라는 존재가, 그 별것도 아닌 평검사 하나가 가진 의미가, 지긋지긋하다.
회장의 눈빛이 이젠 숫제 이글거린다.
당신이 바꾸려던 거 그대로라고, 변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그렇게 믿고 맡기고 간 저 후배는 평생 발악해도 한조 발꿈치도 못 물 거라고, 내가 증명해 보일 거야.
이연재 회장은 책상으로 돌아간다. 딴생각이라곤 없는 듯 연말 국정감사 보고서에 한참을 무섭게 몰두한다.
잠시도 멈추지 말고 달려야지. 멈추면 쉬고 싶어질걸, ...당신 옆에서.
난 한참 후에, 가능한 한 한참 후에 당신을 만날 거야. 그때 가서 할 말 있으면 맘껏 해. 나도 당신한테 해줄 말 많아.
회장의 값비싼 펜촉이 서류 곳곳에 작고 꼼꼼한 표시들을 남긴다.
회장의 눈길이 그해 산업재해 결산 자료를 훑는다. 책임을 피하느라 참 많이도 노력을 기울였다. 박상무는 늘 그랬듯 의심의 여지 없이 유능했고 한조의 법무팀은 효과 직통의 판검사 전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청업체 재해를 반 넘게 숨김으로써 산재보험금을 최대한 타냈고 벌점도 대부분 회피했다.
이미 읽었던 통계를 회장은 다시 잃는다. 아무 표정 없이 무심하게 중얼거린다. 사람이 많이 죽었구나.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이 죽었다. 한조 그늘 밑에서 죽었다. 사고로 죽은 하청업체 노동자들, 쥐어짜이고 또 쥐어짜이는 하도급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하청업체 관리자, 발암물질 다루다가 병을 얻은 기술자들.
박상무는 회장이 그런 통계를 보는 걸 말린다. 그럴 때면 회장은 그런 그의 입을 다물린다. 회장은 모든 걸 직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다는 사실 또한 직시한다.
이 회사가 낳은 죽음들과 나는 결코 무관할 수 없으며 내겐 분명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난 내가 해온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 그게 회장의 사고방식이었다.
...난 언제 이렇게 무뎌졌을까. 위치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난 당신의 죽음조차도 무리 없이 삼키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회장은 문득 고개를 돌려 발치의 폐기 서류 상자를 내려다본다. 그 안에 버렸던 사진 한 장을 다시 집어 든다. 무심히 들여다보는 시선엔 색채가 없다.
황시목과 한여진. 나이도 어린 주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확신에 가득 찬 듯 보이는 저 둘.
...왜 저렇게 사는진 모르겠지만, 저렇게 살면 공허가 없을까.
저런 식으로 살도록 놔뒀더라면... 안 죽었겠지.
결국 이연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동요한다. 아무도 없는 빈 회장실에서 이연재는 눈물을 흘린다. 한 인간 이창준을 사랑한, 사랑하고야 만 인간 이연재로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길지 않다. 어쨌건, 악어의 눈물이 아닌 눈물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회장은 일로 돌아간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으로 굳어간다. 흰 가면만큼 세상도 희게 변해간다. 밖엔 눈이 이제 꽤 많이 쌓였다.
가면과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때쯤 회장은 비로소 하루를 끝마친다.
#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저녁, 춘천지검 원주지청 형사 2부 부장실
(시목의 현 직속상사인 원주지청 형사 2부 임혜인 부장은 Chamomile 5화에 등장합니다. 강원철 전 지검장과 동기이고 나이는 세 살 더 많습니다.)
강원철 전 지검장이 한숨을 포옥 쉬며 샌드위치 포장을 뜯는다. "하이고 누님, 연휴에 이게 뭡니까. 저 오늘 밤엔 진짜 가야 해요, 가족이 기다려." 임혜인 부장이 끄덕인다. "그래, 그래야지. 얘, 미안하다... 이거라도 많이 먹어."
임부장과 시목이 한조케미컬을 찌르는 동안 강원철 지검장은 꽤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이젠 공무원이 아닌 무직자지만 때론 밤늦게까지 이곳 부장실에 상주해가며 자문이 되어주었다. 한조를 2년간 탈탈 털어온 전직 지검장은 든든한 아군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 누님, 좀 좋은 거나 사주시지." "그거 비싼 거야, 요새 프랜차이즈가 얼마나 비싼데." 임부장이 짐짓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시목은 어른들이 먼저 들길 기다리는 중이다. 포장지 뜯은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서. 말갛게 이쪽을 보는 시선을 깨달은 지검장이 털털 웃는다. 아이구 그래, 빨리 먹자 시목아. 강 전 지검장과 임부장이 샌드위치를 베어 물자 시목도 잠자코 먹기 시작한다. 부장이 부하 쪽으로 탄산음료 컵을 밀어준다.
"그래도 결국 마무리가 됐네, 그죠?" 강 전 지검장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서류가 산적한 탁자를 돌아본다.
"끝이 찝찝해." 임부장이 탄산음료를 마시다 말고 중얼거린다.
"어느 사건인들 안 그렇겠어요."
"아니, 뭐가 남아서 찝찝하단 얘기가 아냐. 이 사건만큼은 진짜 털 수 있는 거 다 털었어. 내 말은... 이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강 전 지검장이 끄덕거린다.
"그래도... 기대해 봐야죠. 산안법 개정안 올라가 있는 거."
"넌 기대가 되니?"
"그래도 28년 만이잖습니까. 독재 때 만들어진 게 여태 그대로였는데."
"그래, 그 덕분에 우리가 내내 산업재해 사망률 OECD 1위였지, 그것도 압도적으로. 시목아, 작년 통계 말해봐." 부장이 부하를 톡톡 두드린다.
그새 다 먹고 포장지를 접던 시목이 부장을 돌아본다.
"18년도에만 산업현장 근로자 2142명이 재해로 사망했습니다. ...하루 6명씩인 셈입니다."
이 수치에 담긴 무게 때문에 말하는 이의 미간이 조여든다. 시목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간다.
"...산재 사망 사고에 대한 평균 벌금액은 400만 원, 책임자에 대한 실형 선고 비율은 약 0.5%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도 원청 운영책임자들은 비껴갔고 현장 실무자들만 처벌받았습니다. "
부장이 무거운 얼굴을 한다. 내쉬는 한숨이 무겁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이번 개정이 뭔갈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을 거 같아? 너네 생각은 어떠니. 난 아니라고 본다."
"개정안부터가 허점이 많긴 하죠..." 시목이 곰곰 고민하며 입술을 매만진다.
"그래. 개정안도 이 모양인데 시행령은 어떻게 될지 참. 한숨이 나온다."
강 전 지검장이 턱을 괴고 중얼거린다. "이게 말이죠. 사람들이 많이들 그렇게 생각해. '이윤을 막 쥐어짜는 관행은 대기업이니까 뭐 당연한 것 아닌가?' 근데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질 말아야 한다는 거지. 기업 제대로 처벌해 가면서도 충분히 경제는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거죠. 이윤을 일부만 포기하면 돼, 일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어렵지 그럼. 자발적으론 절대 안 바뀌니까 강한 법이 필요한 거지."
"그 말 들으니 생각나네. 영국에선요, 기업이 원칙 무시해서 노동자가 숨지면 ‘살인’으로 쳐서 처벌을 해. 벌금에 상한선을 아예 안 두고 확확 때리거든? 시목아, 그거 말해봐. 2013년."
"아, 네." 시목이 침착하게 두뇌 어딘가에 저장된 자료를 불러온다.
두 선배는 시목을 컴퓨터 대용품쯤으로 아주 잘 활용하는 중이다. 명민하지만 이제 조금씩 노화를 겪고 있는 그들의 두뇌는 수치 암기하는 일을 슬슬 거부하기 시작했으므로.
"2013년 영국 한 대형마트 체인에서 하도급업체 직원 한 명이 재해로 사망했는데, 영국 법원은 원청인 대형마트 체인에 약 37억 5천만원에 해당하는 벌금을 매겼습니다. 비슷한 사례로서 약 43억원의 벌금이 부과된 건설회사, 약 30억원의 벌금이 부과된 철도회사 또한 원청의 책임소지가 인정된 사례입니다."
강 전 지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걔네가 우리보다 100년은 앞선 선진국이야. 캐나다랑 호주도 법 바꾸고는 노동자 사망률이 크게 떨어졌어. ...말인즉슨 우린 할 수 있는 걸 안 해온 거지." 지검장이 끝을 꾹꾹 눌러 말한다.
"그래, 그래서 그걸 제대로 하게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임부장이 중얼거리며 테이크아웃 봉지에 다 마신 음료 컵들을 모아 담는다. 시목이 자리에서 일어나 봉지를 살포시 뺏어들더니 탁자를 마저 정리한다. 두 선배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후배는 유심히 귀를 기울인다.
"언젠간 제대로 자리잡히겠죠, 풍토가 바뀌겠지."
"난 성격이 급해. 언젠간 되겠지 그 말이 싫다."
"...사실 저도 그 말 싫어요. 기다리기만 하면 뭐가 되나."
"그래서 말인데 산안법, 개정안이랍시고 나온 게 어째 그 모양이지? 정작 발전소랑 조선, 건설은 뺀다잖아. 가장 사고가 많이 나는 걸 다 뺐어. 말이 돼?"
"제일 목소리가 크고 이윤 규모가 큰 곳들이잖아. 재계 입김이 보통 셌겠어요."
"정보공개의무도 추가 안 됐어. 위험요인 관련 정보를 근로자들한테 알리라는 규정은 없어. 일터가 얼마나 위험한진 알고 일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아. 저 위에서 이리저리 결정하는 사람들은 그 결정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걸 알까요."
"당연히 알겠지."
"근로자들 유족들 고통을 헤아리긴 할까..?"
"돈으로 언론플레이로 입 다물릴 궁리, 그 궁리나 하겠지."
"...어쩌다 상식이란 게 안 통하는 세상이 된 걸까요." 강 전 지검장이 아픈 얼굴을 한다.
"상식이 통했던 적이 있나?" 임부장이 굳은 얼굴을 한다.
"누님이 허무주의 쪽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지금도 아니라고 믿어요." 강 전 지검장이 임부장을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임부장이 탁자 표면을 만지작거린다.
"...허무주의는 아니지. 다만 이런 게 무수히 반복되는 걸 보다 보면 희망이 엷어지게 돼.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미래를 향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하루를 버티듯 살게 된다고."
"저라고 안 그렇겠어요. 근데 누님,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바뀔 수 없는 걸 바꾸려 한다고? 이번 일 진짜 열심히 하셨잖아. 희망을 갖고 그러신 거 아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지. 이거라도 해야 하니까, 안 그러면 퇴보밖에 없으니까."
"누님은 말은 그렇게 해도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에요."
"..."
"우리 황시목이 잘 키우고 있잖아요. 내가 진작에 이렇게 해 줬어야 했는데."
"내가 키우긴 뭘 키우니. 마흔 다 돼가는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놈을. 오히려 얘가 후배들 키우고 있다. 젊은 애들이 얘를 꽤 따르거든?"
지검장이 놀란 얼굴을 한다. "이야, 황시목이 사람 다 됐구나. 보기 좋다."
갑자기 영감을 얻은 듯 지검장이 탁자를 톡톡 두드린다. "그래요, 결국 희망은 사람 속에 있다고. 진부하게 들려도 맞는 말 아닙니까?"
임부장이 껄껄 웃는다. "그래, 맞다, 맞아."
"...사람이 바뀌면 기업도 바뀝니다." 지검장이 나직이 그러나 뚜렷이 생각을 꺼내놓는다.
부장의 얼굴이 다시 굳어든다. "너도 참 대단해. 검사장 자리까지 간 놈치고 참 순수하다니까. ...한조가 알아서, 앞서서 먼저 바뀌리란 희망은 아예 염두에 두질 말아야 해. 퍽이나 가능하겠다."
지검장이 반박할 말을 찾는다. 임부장과 강 전 지검장은 같은 듯 다른 서로의 생각을 맞춰보며 한참을 논쟁한다.
시목은 한 걸음 물러나서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둘 중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지만 생각이 많은 낯빛이다.
한참 대화하던 중 문득 강 전 지검장이 시목을 돌아본다.
"시목아, 너 연수 가거들랑 이런 걸로 공부해와라. 산안법 제대로 갖춰진 나라들 가서 좀 배워 와."
"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치만 연수는 부장 승진 전에나 가능하니 제겐 한참 남았죠."
"차암 뭐든지 기수만 따지는 이 관행이란 게 참. 너같이 뛰어난 애들한테 일찌감치부터 기회를 주면 좀 좋아? 참 고리타분하다, 고리타분해." 지검장이 중얼거린다.
"그래, 바뀔 때가 됐어. 뭐든지 기수만 따지지 말고, 뭐 시험을 보게 하든가. 근데 또 그럼 폐해가 생기겠지, 부정하게 특혜 받는 놈들이 나온다던지." 부장이 보탠다.
"어우... 차암.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네. 그래도 우리 염세주의자가 되진 맙시다 누님."
"그래, 이 파릇파릇한 젊은일 봐서라도."
임부장이 앳된 젊은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목을 본다. 전엔 늙었다고 뭐라 하시더니. 시목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두 선배가 촉촉한 눈빛으로 시목을 응시한다. 시목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꼬옥 다문다.
"애 살 빠진 것 좀 봐. 올봄에도 핼쑥했는데 지금은 더 심하네. 누님, 너무한 거 아녀요?"
시목이 작게 웃는다. "와중에 운동까지 시키셔서요."
임부장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시목아, 연휴에 이래서 어떡하냐."
말간 얼굴에 그리움이 맺힌다.
"보고 싶지? 한경감."
"네."
지금 시목은 뒷좌석에 있던 책들을 트렁크로 옮기느라 한창 바쁘다. 다 옮기고 나서는 시트를 깔끔히 탈탈 털어 정리한다. 두 선배님을 뒷좌석에 모시고 서울을 향하려는 참이다. 두 어른에겐 각자를 기다리는 가정이 있다.
시목이 운전하는 내내 두 분은 지치지 않고 잔소리도 하고 이것저것 말을 거신다. 시목은 부모님을 차에 태워 모시고 다니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진지하게 궁금해한다.
"우리 황시목이, 이제 드디어 휴가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이제 서울 가면 만나는 거냐?"
그 질문엔 시목이 입술을 꾸욱 문다.
"...아뇨. 한경감님이 지금 경북 안동에 있습니다."
"하이고... 연휴에 쉬지도 못하고. 하루도 못 쉰대?"
"한경감님 지금... 눈코 뜰 새가 없어서 끼니도 대충 때우고 있습니다." 시목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아픈 얼굴을 한다. 강 전 지검장은 백미러로 후배의 표정을 보며 놀란다. 근 몇 개월 동안 이놈 표정이 다양해져서 참 자주 놀랐다. 재밌는 건 꼭 한경감이 관련된 일이라야 이놈 감정이 풍부해진다는 점이다. 공판이든 취조든 서류업무든 평소 일할 때는 원래의 그 목석같은 얼굴이며 말투 그대로다.
"한경감도 지방 가 있고, 서울은 그럼 왜 가냐?"
"집 가서... 좀 준비해 놓으려구요."
"!!!" 두 선배가 입을 'O' 모양으로 만들며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그... 무드등이랑 연말 분위기, 그런 거 많이 좋아합니다. 한경감님이요. 그런데 연말을 그렇게 보내고 있으니... 어떻게 집에라도 꾸며 두려고요. 돌아와서 잘 쉴 수 있게."
"황시목이... 진짜 다 컸네." 강 전 지검장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그래, 장가보내도 되겠어." 임부장이 진지하게 맞장구친다.
시목은 백미러 너머로 두 분의 흐뭇한 웃음을 본다. 두 분은 백미러 너머로 수줍은 서른일곱 살의 엷은 눈미소를 본다.
<Chamomile 시리즈 외전 1편 끝> (짧은 2편도 있습니다.)
한조와 같은 거대기업 이윤추구 방식의 폐해는 사람들의 고통이 읽힐 때에 비로소 구체화되는 것 같습니다. 비리가 사회악인 이유가 아들을 잃은 윤과장의 서사로부터 아프게 전달되었듯이요.
경찰 내부비리가 어떠한 의미의 악인지 또한, 희생당한 송기현 경사의 아픔을 생각할 때 구체화되는 것 같아요. '자살이지만 타살입니다, 단장님', 했을 때의 여진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엷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찰의 내부 비리 조사팀 일은 여진에게 정말 잘 맞는 일이리라 믿어요. 우리가 아는 여진이라면, 그 일들에도 불구하고 경찰 조직에 대한 애정 - 정상성 회복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을 테니까요.
시민을 지키는 데에 실패한 시스템. 그 앞에서 시목이 어떤 생각을 할지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춘천지검 원주지청 검사실 배치표를 검색해보니 시목 방인 507호 검사실이 마침 '안전사고'를 다루더라고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안전점검을 생략하고, 비숙련자를 위험한 업무에 몰아넣고, 2인1조로 해야 하는 작업을 혼자 시킨, 그래서 결국 사고를 낳은 기업들의 사례들이 우리 현실엔 너무나 많잖아요. 가까운 이를 사고로 떠나보내는 것 자체가 너무나 끔찍한 아픔인데 그 저변엔 근로자의 생명을 그토록 경시하는 기업의 운영행태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때 유족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실까요.
운영자들은 새발의 피 같은 벌금만 물고 사법시스템은 그들을 처벌과 반성에서 너무도 쉽게 면제해버리며, 그리하여 사고를 낳았던 바로 그 시스템은 결국 바뀌지 않고 그대로 굴러가죠, 또다른 사고들의 위험을 품고요.
'위험의 외주화'는 개인적으로 비숲 다음 시즌들에서 언젠가 꼭 다뤄졌으면 하는 사회문제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이윤의 논리 앞에서 그토록 경시되어온 역사를 보노라면, 이윤을 쥐어짜내는 구조는 거대기업으로선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원철쌤이 이연재 회장에게 그랬죠. ‘조직은 다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아버지 대에서 하던 행태를 그대로 이어갈 겁니까, 회장님 대에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연재 회장은 미친놈, 하고 일축해 버렸지만요. 연재가 도덕적 동기로 인해 갑자기 변화할 인물은 아니지 싶어요.
한 명의 입체적-매력적인 인물로서의 이연재의 고뇌를 그려보는 것과는 별개로 대기업 이윤창출 방식의 그림자를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하나의 조직이 낳은 억울한 죽음들과 그 수장은 결코 무관할 수 없으나, 이연재는 과연 어떤 생각일까요.
세상에. 이번엔 마무리 글이 너무 길었네요. 읽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려요!!
모두가 힘든 시기, 뉴스를 접하면 어두워지지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비숲으로부터 얻어보고 싶어집니다. 여진과 시목이 같은 곳을 보며 걷는 모습을 그려보면서요.
고 김용균 사건,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 (뉴닉 포스트 2019/11/29, https://newneek.co/post/ae87d)
국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 시작 (뉴닉 포스트 2020/11/13, https://newneek.co/post/E0aI6t)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최민, '영국 슈퍼마켓 회사에 벌금 37억원 선고된 사연', 매일노동뉴스, 2018.01.25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381)
김광호,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비판 속 산안법 개정안 16일 시행', UPI News, 2020.01.15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001150098) *산안법 개정안에서 발전, 조선, 건설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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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께서도 2021년 새해 안전하게 따뜻하게 맞이하세요!!
(ღ˘⌣˘ღ)
2020.01.01, 보리새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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