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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숲 시목여진] 2차 창작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비숲2 시목여진]_[Chamomile]_5화. 가족사진

by 보리-새우 2020. 12. 16.

다행이다, 좋은 분들이 당신을 아껴주어서


 

*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Chamomile 1화부터: http://bori-shrimp.tistory.com/10

Postype 에서 읽기: bori-shrimp.postype.com/


<5화. 가족사진>

 

 

누가 더 매끄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느냐, 지금 문제는 그거야. 여진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여진은 제 옆에 앉은 이의 더없이 선량하고 마알간 얼굴을 돌아본다. 그래, 검사님 얼굴이 이렇게 순수하니까 내가 여태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지. 

 여진은 그동안을 반추해본다. 너무 편한 나머지 필터를 안 거치고 나온 장난들, 행동들, 어제와 그제의 포옹.

 

당신이 흠칫 긴장하는 거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어. 사람 손을 안 탄 고양이가 흠칫하는 거, 그런 건 줄 알았지.

 당신이 아무 것도 모를 줄 알았다. 

위선이었던 건가. 당신에게 정상 비정상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자부해 놓고는, 당신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건가. 당신처럼 마알가니 혼자서 살아온 남자는 무디고 서툴 거라고, 섣불리 그렇게 믿었으니. 

검사님, 당신은 매번 무슨 생각이었을까.

 수술 이력 때문에 남자로 안 보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떡하지. 그랬다면... 내가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한 거야. 정말 너무 나쁜 짓을 한 거야.  

 

여진은 돌고 도는 생각의 고리를 좀처럼 놓지 못한다. 

 

 

하지를 보름쯤 앞둔 초여름의 아침은 빨랐다. 순식간에 강해진 햇살은 어스름 무렵의 모호함을 가차 없이 걷어내버렸다. 모든 그림자의 경계가 선명해졌다. 

일찍 깨자마자 여진은 시목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마침 일요일이니 전통시장을 구경하자며. 죽집에서 아침을 때운 후에도 일부러 이곳저곳 들여다보며 한참을 뭉그적댔다. 집에 있으면 안 돼, 여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집안에 단둘이 있으면 어젯밤의 긴장이 이어질까봐. 그러나 여진은 집안이라는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장소를 옮긴대도 떨림은 옅어지지 않으니. 

 해서 두 사람은 안락한 집으로 되돌아왔다. 지금 둘은 아침 햇볕 강하게 쏟아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나른한 오전, 간만에 아무 업무도 없는 오전의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여진의 머릿속은 더없이 바쁘다. 세 뼘 떨어진 곳에 앉은 사람 머릿속도 바쁠지, 그게 궁금하다. 

 

 

"경감님." "어, 네?" 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목 쪽을 돌아본다.

시목은 여진 쪽을 보고 있었다. 단정히 허리를 세우고 앉은 자세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뭔가에 눈이 부신지 눈을 깜박거리면서도, 그는 여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시목이 눈을 조금 가늘게 하며 입을 뗀다.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음?"

"...미안해하지 마세요."

 여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목을 본다. 눈을 수없이 깜박거리며.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아니, 당신은 어디까지 아는 거지?

 

"...노력해 볼게요."

여진이 한참 만에 대답하자, 시목이 어쩐지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살포시 웃는다. 아침 햇빛 속에서, 아주 예쁘게. 작게 그러나 선명하게.

여진은 오전 내내 굳어있던 얼굴을 푼다. 시목의 미소를 보니, 이젠 여진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생각일랑은 그만두고 그냥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진은 온몸의 힘을 빼고 소파에 깊숙이 기댄다.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와- 오늘 볕 진짜 좋다. 이제 여름이에요, 그치?"  "그러네요." 시목이 여전히 여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답한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말을 쉰다. 고요함이 주는 평화를 향유한다. 

 여진은 소파 깊숙이 기대어 몽롱함을 느낀다... 어떻게 이 순간 졸릴 수가 있지, 여진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밤을 새웠다지만. 아직 그래도 끄떡없는 나이 아닌가. 여진은 잠을 깨기 위해 자꾸 시목 쪽을 돌아보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 까무룩 의식을 잃는다. 

 

 

 잠든 여진이 이쪽으로 슬슬 기대오자, 망설이던 시목은 스르르 내려오는 머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받친다. 그는 여진을 소파에 누이고는 본인은 바닥으로 쫓겨나길 자청한다. 

그대로 머리맡 바닥에 앉아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다. 부지불식간에 그도 졸음에 휩싸인다. 

거실에 남기로 한 게 화근이었다. 갑자기 울린 시목의 전화기가 여진마저 깨워버렸으니. 

 

 

화들짝 놀란 시목이 전화기를 들고 벌떡 일어선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목을 여진이 재미있다는 듯 놀린다.

"뭘 그렇게 보셔. 빨리 받아 봐요."

"부장님이네요. ...부장님이 등산 가자 하셨었거든요."

여진은 으으, 하는 표정 짓는다. 등산 하면 교통계 시절 계장이 떠오른다. 매번 등산은 대충 끝났고 술판이 메인이었지. 최악이었다. 결국 주말에 하는 회식이었으니. 울 황검사님 그런 거 진짜 질색하겠네 싶다. 

"일단 받아 보셔! 기다리시겠다."

"그럼 실례할게요." 여전히 미안한 표정인 시목이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른다.   

 

 

 

"받았네. 주말에 미안해." 카랑카랑하지만 무게감 있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 이 연배 여성 검사님은 되게 드물 텐데. 여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닙니다, 부장님." 시목이 특유의 건조하지만 공손한 톤으로 답한다. 

여진이 몸을 슬슬 기울여 귀를 바짝 댄다. 우리 검사님 새 상사가 어떤 분일지 알고 싶다. 

 시목은 그런 여진을 보더니 통화 음량을 키운다. 

 

"안 온대서 포기해야지 싶더라. 오늘 날씨가 차암, 비실비실한 놈 운동시키기 딱 좋더라도, 뭐,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너 설마 일거리 찾았니? 일하려고 거절하는 거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오!! 다행이네. 자아- 그럼 다시 잘 생각해 보자?"

 

세상에. 예상이랑 너무 다른데.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엿듣는 게 점점 재밌어져서, 여진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인다. 

여진이 입 모양으로 말한다. 가세요 등산! 왜 거절하셨대. 

그러나 시목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부장님, 전..."

 "내가 동행 하나 섭외했는데. 니가 잘 아는 사람."

 다시금 거절하려던 시목이 일시정지한다. 일순 눈이 커진다. 

 

"너 보러 오는 사람이다."

"저를요...?"

 "그래, 너 보러! 근데도 니가 안 오면 내가 뭐가 되니. 누군진 서프라이즈다, 궁금하면 와라!"

 

여진이 시목을 톡톡 두드린다. '나도 갈래요! 괜찮다 그러시면!' 

시목도 입 모양으로 답한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저 그럼 가겠습니다."

"오호! 먹혔네!" 부장님이 기뻐하시는 게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 

"저도 동행이 있어도 될까요."

"오오? 네 동행이라면 환영이지. 모셔와!" 데려오는 이가 누군지 꼬치꼬치 안 물어보신다, 꼰대와는 거리가 먼 면모들이 읽혀서 여진은 눈을 반짝인다. 

"이따 오후 한 시, 치악산 국립공원 매표소 앞이야. 점심은 먹고 와라." 부장님은 이 말만 남기고 쿨하게 끊어버리신다. 

 

"와, 빨리 만나 뵙고 싶어!" 여진은 꽤 들떴다. "뭐랄까, 통화 잠깐 엿들은 건데도, 되게 매력이 느껴지는 분이네."

"...같이 간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산 가자셨다는 말 듣구서 섣불리 편견을 가졌어요. 부하들 끌고 가서 술 멕이고 막 그런 분 상상했어. 어우, 되게 죄송해지네...."

"통계적으론... 해당 연배에 그런 분이 많죠, 아무래도."

"많이 시달려 보셨구나."

"되도록 피했죠."

 

"있잖아요, 강원철 지검장님은 진짜 특별한 분이시겠다, 그쵸."

"네."

여진은 씩 웃는다. 강 전 지검장 얘기가 나올 때마다 황검사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히는 걸 안다. 저 표정에 담긴 건 존경과 감사겠지.

"음... 동행하는 분이 지검장님인 걸 바로 아시네요, 경감님도요."

"아무래도 그분일 것 같아서."

 

"임부장님 처음 뵀을 때, 동부지검장님한테 얘기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오오? 신기하다, 확률적으로 전 보스랑 현 보스가 친하려면...?"

"음...두 분 다 친화력이 좋으신 편이셔서, 동기들하곤 거의 다 친하신 게 아닐까 싶은데요. 두 분 기수가 같으시더라구요."

 "아아..."

그 기수에 지청 부장이라니. 여진은 말을 아낀다. 경이든 검이든 인사발령이 문제야... 

강원철 전 지검장과 임혜인 부장은 연수원 25기 동기로, 나이는 임 부장이 세 살 더 많다. 임 부장이 왜 아직 부장인지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 항명을 여러 번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남의 소문을 함부로 묻지 않는 시목은 그에 관해 잘 모른다. 다만 청렴하고 강직한 분임을, 직접 겪으면서 서서히 알아나가고 있다. 

 

"다행이다."

"네?"

 

"지금까지 들은 걸로 내가 막 판단할 순 없지만, 이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임부장님은 검사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는 분이란 생각이 드네."

시목이 곰곰 생각에 잠긴다. 

 

"원래 주말 일정도 없으셨잖아, 근데 왜 거절했었어요?" 

"부장님 체력이 정말 좋으세요."

"음?"

"등산 따라갔더니 다음날 몸이 잘 안 일으켜지더라고요.

여진이 뒤집어질 듯 깔깔깔 웃는다. "그래서 거절했던 거예요?" 웃음을 겨우 진정하고 물어보자 새침한 대답이 돌아온다. "... 네." 

 

 "임부장님, 운동에 진짜 진심이신가 보다."

 "네... 건강이 중요하다고 설파하시곤 해요."

시목이 아침 햇살 환히 비쳐드는 창을 가리킨다. 

"하루 최소 15분은 직사광선을 쬐라고 종종 그러세요. 그래야 세로토닌 수치가 유지된다, 집중력이 확보된다 그러시면서요."

"와... 이런 분이 검사장으로 계시면 참, 지검 전체가 건강해질 텐데." 

"되고도 남을 분이시죠. 경력으로도, 능력으로도." 

시목의 담담한 목소리에 엷은 아쉬움이 묻어난다. 여진이 고개를 비스듬 기울여 그의 얼굴을 살핀다. 새 상사랑 유대감이 꽤 생겼구나 싶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검사님은 승진 언제지? 머지않아 황 부부장 되는 거죠."

"글쎄요." 승진을 기다려본 일이 없는 시목이 다소 무심히 답한다.  

"잘하면 내년쯤 아닐까요? 검사님 37기니까."

"음... 그렇대도 그대로일 겁니다. 지금 지청엔 부부장이 없어요."

"음? 부장 다이렉트인 거야? 지청 인원이 적어요?"

"검사는 열두 명 뿐입니다. 지청장과 부장 두 분 포함해서요"

"일 되게 많겠다... 형사부가 원래 많은 데다가, 사람 적은 지청일수록 일이 많다던데, 그쵸. 수도권 형사부는 인당 월 200건, 지방에선 300건 넘기도 한다던데."

"그건 평균에 해당합니다... 편차가 있어요."

아. 뭔가를 깨달은 여진이 아픈 표정을 한다. 밉보여서 일을 잔뜩 떠맡은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긴 세월 동안. 보통 월별 몇 건씩 처리해왔는지 물어보기가 겁난다. 

"사실 이번이 처음입니다. 평균적인 양을 받아보는 건요. 음... 그래서 이젠 격주로 주말 한 번쯤은 쉴 수 있더라고요."

"..." 울컥한 여진이 말을 잃는다. 

여진의 표정을 읽은 시목이 해명 아닌 해명을 해본다.

"전 괜찮았습니다. 전엔 일 말곤 달리 할 게 없었는걸요."

워커홀릭인 거야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스톡홀름 신드롬 아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여진이 슬픈 눈을 하고 시목을 시무룩하게 바라본다. 부당하게 혹사당해온 거지. 안쓰러워 죽겠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참...

그래도 이번엔 좋은 부장님 만나서 다행이야, 진짜 다행. 

 

"부장님이 뭐라 하실까요, 검사님 내원 계획?"

"말씀드려 봐야겠네요, 이따가."

   

 


 

 

 치악산 국립공원 입구, 이른 오후. 아직 매미가 안 울 뿐 햇살 따가운 여름 낮이다. 

 나무 그늘에서 손을 흔드는 이는 임혜인 부장, 옆에 있는 사람은 예상대로 강원철 전 지검장이다. 시목의 눈꼬리가 접힌다. 시목을 잘 아는 이들은 그 눈꼬리에서 그의 반가움을 읽는다. 

여진은 특유의 싹싹함으로 두 어른께 인사한다. 

"와, 한경감도 오셨네! 동행 있다길래 한경감이지 싶었어요." 지검장이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저도, 지검장님이 오시지 싶었습니다." 여진이 지검장 손을 다정히 흔든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여진입니다." "아유, 반가워요." 임혜인 부장도 손을 내민다. 여진이 야무지게 마주잡고 공손히 꾸벅한다. 첫눈에  서로 호감을 느낀 두 사람-젊은 경찰과 중년 검사-의 눈이 한껏 반짝거린다.  

 

 

6월 초면, 활엽수림이 퍽 짙은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기다. 서울에선 귀한 맑은 초록빛이 사방에 펼쳐지자, 여진은 기쁜 마음으로 그 색채를 눈에 실컷 담는다. 시목은 여진의 들뜬 얼굴을 이따금 돌아본다.

등산 초반부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는 발걸음들이 퍽 여유로웠으나,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임부장이 이끄는 빡센 코스 탓에 다들 말수가 적어진다. 

 오는 길에 시목이 부득불 등산복 매장으로 데려갔던 이유를 여진은 그제야 깨닫는다. 제대로 안 갖추고 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 등산화 신길 잘한 건 분명하다. 낙낙한 등산화는 시목의 선물이다. 저 때문에 따라오시는데, 이거라도요. 눈꼬리를 살폿 접어 웃는 말간 얼굴에, 여진은 거절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등산화 신고 앞으로도 동행해달라는 뜻인가? 여진은 의심을 담아 괜히 시목 뒤통수를 째릿 보다가 이내 씩 웃는다. 

 

 

"아이고, 누님- 잠깐만 쉬어 갑시다, 잠깐만요."

체력이 왜 그 모양이냐며 임부장이 혼내자, 원철이 항변한다.  "평생 앉아서 일하다 보면 이러는 게 정상 아녀? 난 그래도 배는 별로 안 나왔어요."

임부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시목과 여진 쪽을 돌아본다. "한경감님은 걱정이 안 되네, 몸이 아주 날래셔. 형사의 체력이다, 딱 느껴져요." "아유, 많이 부족합니다." 여진이 뿌듯한 표정으로 웃는다.  

"황시목 넌, 저기 저놈처럼 안 되려면 지금부터 운동해라"  "아유 누님, 걘 쌩쌩해요. 뛰기는 또 얼마나 잘 뛰는데." 아니, 그 사실을 지검장님도 아시네? 여진이 귀를 쫑긋 기울인다.  

"뛰는 걸 봤어?" "봤죠." 원철이 껄껄 웃는다.

"이놈이 3학년 때였을 거야, 아마. 황시목이가 동문회 회식을 혼자서만 빠졌거든요? 아니 뭐, 안 그런 적이 거의 없긴 하지. 암튼 그때 회식 마치고 2차 갈 사람 추리고 있었어요. 식당 앞에서. 근데 그쪽 동네가 우범지역이었단 말이죠." 원철이 만담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자, 여진과 임부장이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바싹 모여들어 집중한다. 시목은 무념무상한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딴청을 피운다. 

"유흥가야 늘 탈이 많지. 근데 그땐 꽤 심각했어, 근처에서 용의자 미상 살인사건이 있었거든. 범행 수법이 잔인한데도 경찰에서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날도 그 때문에 다들 으스스하니까 뭐, 서로 다닥다닥 모여서 택시 기다리고 있었지."

"근데 갑자기 길 반대편이 심상찮은 거야. 누가 막 정신없이 도망치듯 뛰어가는데, 손에 칼을 들었네? 다들 놀래서 그쪽을 봤어. 시커먼 옷 입은 사람이 쫓아서 뛰는데, 칼 든 놈이랑 속도가 비등비등한 거야. 어어 이게 뭔 상황이냐, 저거 놓치면 어쩌나, 웅성대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인도로 콱 들어가서 칼 든 놈 진로를 막았어요. 형사 업무차량이었나 봐, 형사 몇이 뛰어내려서 테이저건도 겨누고 봉으로 칼도 쳐서 뺏고 하더라. 그제야 쫓던 사람이 비켜 서서 숨을 돌리는데, 그제야 알았죠, 먼발치에서 봐도 이놈인 거야. 아이구, 기가 탁 막혔지."

"안 다쳤어요?" 여진이 정색하고 물어본다. 칼 든 범인을 쫓기까지 했을 줄이야. 

"다칠 뻔한 거죠. 그 사건 주임이 얘였는데, 잡겠다고 지가 먼저 설쳐서 범인 찾았대. 형사들한테 연락도 넣고." 원철이 질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시목 쪽을 본다. "아이구 황시목아."

"많이 혼내셨습니다. 그때." 시목이 돌아보며 눈을 깜박인다.

"그래. 혼날 짓 했으니 혼쭐을 내줬지. 칼 든 놈 잡으려면 형사를 해야지, 엉?"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여진은 멍해지고, 임부장은 껄껄 호탕하게 웃는다. 

"야야, 키워볼 만하네. 지구력도 꽤 된다는 거잖아?  얘 마라톤이나 시켜 볼까?" 시목이 흠칫한다. 임부장이 해맑게 웃으며 물어본다. "황프로야. 내년 봄에 마라톤 대회 있단다. 원주시장배 연례 마라톤. 같이 할려?" "음... 저는 생각을-" "아 맞다, 물론 하프 아니고 풀코스야." "..." 시목이 조금 창백해진다.

 

 


 

 

네 사람은 쌈밥집에 오손도손 둘러앉는다. 힘든 산행 후인 데다 편안한 이들과의 식사인 만큼, 시목의 먹성이 살아난다. 오물오물 하도 잘 먹어서, 여진은 언젠가 굶주린 그를 국밥집에 데려갔던 날을 떠올린다. 여진 또한 열심히 먹는 중이다. 한 번씩 상추를 쟁여놓을 정도로 쌈밥을 좋아하는 편이니.

맛있게 먹는 두 젊은이의 모습에, 강 전 지검장과 임부장은 퍽 흐뭇한 얼굴을 한다. 여진이 쌈을 입에 가득 문 상태에서 시목 쪽을 돌아본다. 시목도 오물오물 열심히 먹는 중인데, 눈으로 엷게 웃고 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목이 말갛게 눈을 깜박이며 운을 뗀다. 지검장이 휙 돌아본다. 그간의 경험 탓에, 이놈이 작정하고 말을 꺼내면 긴장하게 되는 건 거의 반사적이다. 

시목은 여진과 눈빛을 한 번 더 교환한 후, 수술 이력 그리고 재활 계획에 관한 얘기를 차분하게 꺼내놓는다. 이건 두 분을 만나러 오기 전 여진과 의논해두었던 사항이다. 시목 집을 나서기 직전 시목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재활이 가능한 걸 안 이상, 오늘 만날 두 분께도 말씀드려야겠죠?" "...!" "제 수술, 경감님껜 제가 직접 말씀드릴 기회를 놓쳤잖습니까. 이번엔... 기회가 있을 때 잡아봐야죠." 여진은 그런 결심을 한 그가 너무도 대견해서 또다시 꽉 끌어안고 싶었으나,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황시목아, 이제야 나한테 말해 주는구나." 지검장이 시목을 지긋이 들여다본다.  시목 눈이 커진다. "...아셨습니까."

시목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다. 17년도 당시 윤과장이 어디까지 알았고 어느 선까지 보고했는지를 시목은 몰랐으니.

"황시목아. 그런 건 너 아끼는 사람들한텐 비밀로 안 해도 돼. 이해심 없는 각박한 놈들한텐 굳이 말하지 말고." 

"아시고도 그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주신 건가요." 

"이놈아, 너는 내가 봐 온 너 그대론데. 그걸 안다고 왜 다르게 대하니." 목이 살짝 메인 듯, 지검장의 목소리가 먹먹하다. 

"그보다 나는 진짜로 미안하다... 너도 모르게 아는 게 계속 미안했어. 알리기 싫었던 걸 테니, 네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런 너 자체로 좋은 놈인데, 내가 뭔 자격으로 이러니저러니 참견하나, 그런 생각도 했고. 그래서 니가 먼저 말해주기 전까진 모르는 셈 쳤어. 미안하다..."

"아닙니다. 지검장님께서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때 윤과장이 나한테까지 알린 이유가 뭐겠어. 알고 도우라고, 이창준 선배 뜻이셨겠지. 내가 챙겨줬어야 했는데. 난 하나도 못 도왔네."

 시목이 고개를 포옥 숙였다가 든다. 조명 탓인가, 눈이 조금 붉어 보인다. 

지검장 눈엔 이미 눈물이 글썽하니 고였다. "재활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나름 챙겨준다 해놓고 아무 것도 못 해줬구나, 난..."

"아닙니다." 시목이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제가 선택했던 겁니다. 그간 재활을 못 한 건 순전히 제가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알았어도 안 했을 겁니다..."

"...지검장님께서 자책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목은 오히려 지검장의 감정을 살핀다. 살짝 몸을 가까이 기울여 조심스럽게 뜯어보며. 그런 시목에, 지검장은 결국 울컥 눈물을 흘린다. 

"..." 지검장이 안경을 벗으며 눈을 꼭 누른다. 

시목 시선이 흔들린다. 어찌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목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여진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입 모양으로 말하며 힌트를 주자, 시목은 탁자 위에 놓인 지검장의 한쪽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는다.

"감사합니다, 늘... 감사했습니다." 

 선배와 후배는 한동안 그 상태 그대로 잠자코 머문다. 

 

 

 

"황시목. 나한테도 말해줘서 고맙다."

시목이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에 어찌 답해야 할까.

임부장이 신경정신과 명함을 내민다. "우리 딸이 여기 내원해. 한동안 입원도 했었고. 양극성 장애." 시목과 여진은 놀란 눈을 하고, 전부터 알고 있던 원철이 안부를 묻는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학교도 잘 다니고."

 

"힘들었겠어..." 임부장이 사려 깊은 눈길로 시목을 본다. 부장은 시목이 후암동 사건 당시 사이코로 몰렸던 것을 안다. "이 말 해주고 싶다, 남들 눈 신경 쓰지 마. 굳이 정상 비정상을 나누려는 건 어쩌면 인간 본성일지도 모르지, 다만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언제든 뭐든 얘기해라. 억지로 얘기해줄 필욘 없고."

"네." 시목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공손히 답한다. 

"알면 알수록 옵션이 생긴단다. 나도 우리 아이 아프기 전엔 아무것도 몰랐어. TMS도 MRI도, 약물 종류도. 계속 배우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선생님들한테 확인받고, 책 찾아 읽고, 그렇게 점점 방법을 찾아갔어. 황시목 명석하니까 열심히 알아봐."

"명심하겠습니다." 시목이 여진 쪽을 보고 살짝 끄덕인다. 경감님 덕분에 한 발짝 뗐네요, 말하듯. 여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저 부장님." 시목이 병원 명함을 만지작거린다. 

"추천해주신 병원의 명의 분들의 시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환자일까요, 제가?" 

"...그곳 의료진 분들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능력을 갖추고 계시죠. 그분들이 제게 시간을 쓰는 대신 더 중요한 환자들, 어쩌면 더 필수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분들을 치료한다면-"

임부장이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황검사, 일할 때 어떤 건 사소한 사건 어떤 건 중한 사건, 그렇게 분류하니?"

"...아니요."

"그래. 너야말로 그런 구분을 안 하고 임하는 사람이지. 얘, 그분들도 마찬가지야."

옆에서 듣던 원철과 여진이 무릎을 탁 친다. 둘 다 찡해진 표정들이다. 

 

 

 

"2주에 한번 주말도 못 비우는 건 인권침해 아니니? 뭐 주 최대 근로시간 노동규정은 깡그리 파괴하는 게 형사부 업무라곤 하지만. 암튼 니가 일을 버리고 가니? 아니잖아. 정 급할 땐 병원에 미리 연락해서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기 예약은 꼭 잡아."

"...네, 부장님."

"내원 일정 잘 맞춰 보자. 격주로 오라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되면 나랑 번갈아 비우자꾸나." 임부장도 가족을 만나기 위해 격주로 서울을 방문한다. "내가 없는 주말엔 네가 지키고, 내가 있는 주말엔 네가 비우고. 둘 중 하나는 있어야 어린 친구들이 도움을 청하겠지." 형사 2부의 평검사 넷 중 시목을 제외한 셋은 아직 1학년 또는 2학년인 초년생들이다.   

"...감사합니다. 일에 소홀한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믿지, 황시목인데."

"..."

"내원하는 주말은 되도록 싹 비워줄 테다. 군말 말고 내원이나 잘 해."

"일을 비우진 말아 주십시오. 재택근무로 주시죠." 임부장이 혀를 내두른다. "그래, 일하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니."

시목이 천천히 묵례한다. 시목으로선 나름 다정한 감사 인사다. 

 

 

 

네 사람의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넉넉한 인상의 식당 주인 부부가 말을 붙여온다. 마침 손님이 적어서 심심하던 차였나 보다. 

 "맛있게 드셨어요? "아이구 네네, 기가 막혔습니다" 원철은 넉살 좋게 답한다. 갸우뚱 하며 네 사람을 바라보는 부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아드님 며느님이랑 오셨나 봐요?" 세상에, 멀리서 보면 그런 형국이었구나.

원철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누가 뭐랄 새도 없이 긍정해버린다. "아유우, 딱 아시네. 우리 애들, 보기 좋죠?" 

나머지 세 사람은 살짝 멍해진 상태다. 부부가 후식을 내온다며 떠나자, 임부장이 원철 쪽을 휙 돌아보며 작게 쏘아붙인다. "내가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니? (시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늙은 자식이 있을 만큼?" 시목은 '늙은'이라는 수식어에 흠칫한다.

 "강원철아, 물론 너는 그래 보이지." 실제로 원철은 수염이 덥수룩-희끗희끗해진 탓에 누가 봐도 일행 중 가장 연장자다. "근데 난 아니다?" 

"에이, 누님. 너무 확신하진 마시죠." 원철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해 보지만, 임부장이 째릿하자 얼른 꼬리를 내린다. "아이구, 아닙니다. 아마 이 두 친구가 동안이라 그렇게 보였겠죠. 그치 황시목아?" 시목은 눈을 깜박거리며 제 선배를 돌아본다. 

원철은 카운터 쪽으로 돌아서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우리 아이들, 나이대가 어디쯤으로 보입니까?" 

  "오호라, 이 사람이 이런 건 또 잘 맞추거든요?" 하는 아저씨, "음..." 눈을 반짝거리며 유심히 보는 아주머니. 시목과 여진은 둘 다 괜히 살짝 긴장한다.

 "자아 보자. 딱 봐도 사회초년생은 아니셔, 왜냐 하면 그런 풋풋한 게 전혀 없거든." 여진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으며 시목을 돌아본다. 

"또 보면, 부모님께 이렇게 깍듯한 걸 보니까 결혼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어." 이 대목에서 원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빵 터져 버린다.

 "저희 애들도 차암, 첨엔 이렇게 잘 했는데. 몇 년 지나더니 코빼기도 잘 안 비쳐. 두 분, 부모님들께 잘 하셔요, 응?"

 "예엡-! 그래야죠!" 원철의 장난에 동참한 여진이 싹싹하게 답하곤 원철과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임부장과 시목은 '한경감(님)마저도...' 하듯 여진을 돌아본다.

"그래서! 내가 따악 보면... 요 두 분은 30대 중반이네, 맞죠?"

"네, 맞습니다." 시목이 냉큼 대답한다. 

"검사님은 후반 아냐? 난 초반이고?" 여진이 못마땅한 듯 소곤댄다.

"평균을 취하면 중반이죠." 시목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하는데, 기분 좋은 듯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아니 이 양반 은근히 나이에 민감하다니까... "그래, 검사님 동안이에요, 인정!" 시목이 정말인가요,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든다. "게다가 강원도 공기 좋아서 그런가, 피부 나이도  젊어지셨어." 

 줄곧 소곤대는 젊은이들을, 두 어른은 퍽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가족사진 하나 남기려고 하는데, 찍어 주시겠어요?"이건 놀랍게도 임부장의 아이디어였다. 아까 불평했던 건 이미 잊으신 걸까, 부장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만 남았다. 

여진이 시목의 폰을 집어들어 식당 주인 아주머니-일일 사진사-에게 내민다. 제 폰으로 찍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한 시목이 끄덕거린다. 모두의 연락처를 가진 건 시목 뿐이니. 

자아- 웃으시고! 여진은 타이밍에 맞춰 시목을 웃기기 위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본다. 살폿 웃기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장면 그대로 찍혀버린다. 아앜 이건 지워야 해요- 여진이 손을 휘휘 젓는다. 이 상황이 우스워 여진이 제풀에 빵 터지고, 시목도 피식-하듯 제대로 웃는다. 덕분에 두 번째 사진은 아주 잘 나왔다. 여진은 첫 번째 사진을 지운 후 시목에게 폰을 건넨다. 

곧장 톡방을 열어서 사진을 공유하는 시목을 보고, 여진 눈이 확 커진다. 몹시 대견한 나머지 버릇대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와, 이런 것도 할 줄 아시고!" 여진이 소곤거리자, 시목이 뿌듯한 얼굴을 한다.  단톡방 사용법이야 당연히 안다, 전부터 실무관, 수사계장과 일 관련 톡방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으니. 다만 이런 종류의 단체 사진을 시목이 나서서 보내 본 게 난생처음일 뿐.

함께한 한나절이 마무리된다. 진짜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사진 한 컷을 남기고.

 

 

"한경감도 서울로 가죠? 기차표값 아낍시다, 태워다 드릴게!" 강 전 지검장의 제안에, 여진은 예의 바르게 꾸벅 감사를 표한다. "앗...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지겠습니다!"

어른들 앞이라 살짝 쭈뼛대며, 두 젊은이는 악수를 나눈다. 담백한 시선교환이 오간다. 그 짧은 순간에, 강 지검장의 예리한 시선이 둘의 표정을 훑는다.  

여진은 한껏 예의 바른 몸짓으로 뒷좌석에 자리 잡는다. 담백하게 배웅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차가 출발한다. 여진은 차 안을 둘러보다 말고 흠칫 멈춘다. 하아, 또 직업병 나온다. 남의 차만 타면 이것저것 추리해대는 버릇 고쳐야 해.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강원도 밤 풍경을 담아가야지.

차가 첫 적신호에 걸려 멈추자, 여진은 뭐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어 앞 좌석 쪽으로 눈을 돌린다. 백미러 너머의 지검장은 이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육각 안경테 너머로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두 눈. 분명 사람 좋은 웃음인데 와중에 눈초리가 자못 예리하다. 

"흠... 우리 무슨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여진이 눈을 도르륵 굴린다. 궁금한 게 되게 많으시겠지... 이 베테랑 검사에게 취조 아닌 취조라도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검사님도 이걸 예상했나 보다, 출발 전에 어쩐지 귓속말을 하더라니. '지검장님껜 말씀드리셔도 됩니다. 경감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건 뭐든요.'

"아유, 네! 좋죠." 여진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씨익 웃어 보인다. 나도 호락호락하진 않지. 주는 정보가 있다면 동량의 정보를 얻어낼 테다. 가는 만큼 와야지, 기브 엔 테이크. 그리고 사실... 애초에 이분이랑 난 아군이야. 바라는 바가 같잖아? 황시목의 행복.

 

 

<Chamomile_5화 끝>  


 Epilogue 1. 얼마 후, 임혜인 부장과 강원철 전 지검장의 전화통화

 

 "난 왜 더 알아볼 생각을 못 했을까요." "자책하지 마라, 얘."

 "자책을 어떻게 안 합니까... 나름 챙겨준다 해놓고, 난 재활의 재 자도 몰랐어."

 "하아. 문이과 극명히 갈라서 가르친 폐해라니까. 대학에서 요즘은 복전도 많이 해, 법전원 통해 온 젊은 친구들은 이공계 출신도 많고. 그래야 지식이 이렇게 요리조리 섞이지. 옛날엔 들입다 법만 판 무리들만 모여 있었잖아. 그러니 뇌니 신경이니 하나도 모르지."

 "하아... 그놈도, 사건 관련되어 있었다면 어떻게든 공부했을 겁니다. 지 문제는 안 알아보지, 사건은 사소한 거 하나까지 죽어라 파면서... 이놈 지 자신을 절대 안 챙겨."

 "그래도 그런 걸 알고 챙겨주는 니가 있었잖아"  "내가 한 게 뭐가 있겠어요..."

 "한 게 많겠지, 보면 느껴지는데. 거의 아버지랑 아들이다." "..."

 

 "넌 그런 생각 안 하냐? 잠잠해지고 싶다? 감정을 좀 덜 느꼈으면 좋겠다 싶은 적 있어?"

"있죠 그럼. 황시목이 이눔이 부러웠던 적도 있어. 하긴, 요놈 덕분에 그런 적이 꽤 있었지... 내 속은 뒤집어놓고 지는 아주 멀쩡해. 너 속 끓이지 마라, 하면 이눔은 '제 속이요?' 그래. 남의 속 많이 뒤집어 본 걸 알긴 아나 보데."

"그래서, 누가 오욕칠정 다 싸악 걷어내서 잠잠하게 만들어준다면 오케이 할려?"

 "아뇨, 그건 아니지. 이미 그동안 겪어보면서, 힘들어도 이게 있어서... 뭐랄까, 이유를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네, 차암."

 

"...나도 가끔 그런 생각 해, 인간사 희로애락 그냥 다 잊고 기계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누님."

"그런 생각도 해봤어. 우리 딸이...감정을 다 잊을 수 있다면 좋을까, 우리 애가... 아예 감정을 다 털어버려서, 슬픈 감정 괴로운 감정도 뭔지 모르고,  그래서 고통을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누님."

 "근데 있지, 애가 울지도 화내지도 않으면 내 가슴이 훨씬 더 찢어질 거 같다. 눈물이란 게, 녹여내는 거기도 하거든." "..." 

"너도 자식 있으니 이해하지." "이해하죠..."

 

 "말씀 듣다 보니 참 다행이다 싶어요, 시목이 이놈이 내원하기로 한 거. 이놈이 고민해서 결정한 거라면 당연히 지지해야지. 뭔 말인지 아시죠?"  "그럼."

"...예전부터 차암... 차암 외로운 놈이었어요, 늘. 저놈 혼자 나가는 뒷모습 보면 가슴이,,, 집에 돌아와서 애들이랑 놀고 아내랑 웃고 그러다가 가끔 가슴에 꽂히는 거예요. 이놈은 지금 혼자서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지금은 덜 안쓰럽지?"

"한경감이 같이 있어서 참 든든해요." "그래, 든든하더라."

 

 


Epilogue 2

 

똑똑, 임부장이 면담실 문을 차분히 두드린다. 신경과-신경외과-정신건강의학과가 함께 있는 중견 병원. 임부장이 시목에게 소개한 곳이다. 

임부장은 기러기 엄마다. 주말이면 남편과 딸이 원주로 찾아오기도 하고, 임부장이 서울로 올라가기도 한다. 서울에 들를 적엔 딸 연주의 치료 근황을 직접 듣는 게 중요한 일과다. 

 "참 힘든 과정 이겨 내신 거예요. 연주도, 어머님 아버님도 참 장하십니다."

"계속 지켜보고 내원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얘랑 얘기를 하는데요,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고, 애가 그런 말을 해서 진짜..." 임부장은 북받쳐서 말을 멈춘다. 

"상담 때도 자랑하더라고요. 이젠 강의도 안 빠지고 동아리도 자주 나간다고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눈물 괸 어머니가 감사 인사를 속삭인다.

"우리 모두 계속 노력하는 거죠..." 임부장은 여전히 눈물 괸 눈으로 웃는다. 탁월하지만 동시에 겸손하고 다정한 이 의사 선생님을, 임부장은 아낌없이 신뢰하고 존경한다. 

 

짧은 만남을 마치기 전, 임부장이 조심스레 운을 떼어본다.

"선생님 명함을 제 일터 동료 하나에게 전했습니다. 황시목이라고요."

의사는 살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뺀다. "어머님, 그럴 분 아니신 건 알지만, 다른 내담자 정보를 들려드릴 순 없습니다."

"아닙니다. 정보를 얻으려 여쭈는 게 아니라요, 제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려구요... 시간 뺏어서 죄송하지만 도움을 좀 청하고자 합니다. "

임부장이 서류철 하나를 꺼낸다. 시목이 설명해 준 바를 기반으로 시목의 수술, 그리고 재활치료 방법에 관해 정리해 본 자료다. "아무래도 제가 업무상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만큼, 잘 이해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의사는 자료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임부장은 본인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군더더기 없는 질문들을 통해 확인해나간다. 

의사의 눈이 점점 커진다. 

 "저....어머님. 실례 무릅쓰고 여쭤볼게요. 혹시 정신건강 쪽, 아니면 신경학 쪽 전문가 아니세요?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배경지식이 워낙 넓고 깊으시길래요."

"아닙니다, 이쪽으론 그 어떤 학력도 없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나씩 배워나간 엄마일 뿐입니다. 마음은 곧 뇌라고, 그렇게 알려주신 게 선생님이잖습니까, 그걸 아는 이상 저도 공부해야죠."

"...!" 의사 표정이 숙연하게 가라앉는다. 의사가 천천히 끄덕인다. "어머님, 대단하신 겁니다. 정말 잘 해오셨고, 함께 잘 헤쳐나가고 계세요."

"후배분도,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만큼, 원하는 변화를 이루 겁니다. 내일 첫 내원이신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가 준비할 재활 과정은, 주변 사람들과의 감정 교류가 이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치료 시간 외의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치료 자체 못지않게-어쩌면 더- 중요합니다. 직장 동료, 가족, 연인이나 친구랑요. 감정 기능을 계속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 시간들이 모이고 모였을 때 가시적 변화가 이뤄지는 거죠."

임부장은 앞으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황시목 이 친구가 잘해나가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놈 직장에선 나름 관계맺기 잘 해오고 있는걸. 가족은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고. 연인도. 마침 서울로 격주 내원이니, 황시목 이놈이 알아서 잘 하겠지.' 임부장은 미소를 짓는다.  

 

"아, 꾸준한 신체활동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 연주 경우에도 운동 꾸준히 한 게 큰 도움되었잖습니까. 말씀하신 후배분, 운동 하시나요?" 

임부장 얼굴이 확 심각해진다. 

"하긴 하는데, 꾸준히 하는진 모르겠습니다. 운동보다 일을 훨씬 좋아하는 놈이라서요...."

의사 표정도 심각해진다. 

"장시간 또는 강도 높은 운동을 시도해 보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야외활동을 통해 햇빛을 충분히 받는 것도요 - 사실 이런 건 누구에게나 필요하죠."

"이 친구 운동만큼은 제가 책임져 보겠습니다." 임부장이 눈을 빛내며 활짝 웃는다. 시목은 앞으로 평일 새벽 산행에 시달릴 예정이다. 높은 확률로, 임부장 휘하에 있는 내내.

 

 

 <5화 진짜 끝> 


오늘도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바쁘고 추운 연말, 다들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