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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숲 시목여진] 2차 창작
비숲2_그 이후를 상상하다_<나아가다>_창작

[#비숲2 시목여진]_[Chamomile]_3화. 함께 걷는 해변

by 보리-새우 2020. 11. 30.

사람들은 때론... 오랜 삶의 방식에서, 또는 언제까지고 머물러야지 했던 곳에서 갑자기 성큼 벗어난다, 단 한 순간 얻은 영감이 어떠한 역치를 넘길 때.

특별한 그 짧은 순간들은 대체로 예고 없이 온다. 


*비밀의 숲 2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2차 창작글입니다. 시즌1 및 시즌2 내용 스포를 포함하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Chamomile 1화부터: http://bori-shrimp.tistory.com/10

Postype 에서 읽기: bori-shrimp.postype.com/


*본 편에서는, 구분선이 들어갈 때마다 여진/시목 관점이 전환됩니다!


 3화. <함께 걷는 해변>  

https://youtu.be/7ggZiN-WUG0

 

 

 

통영에서 시목은 사위가 어두울 때 바다를 찾았다. 파도에 햇빛이 부서지는 시간대엔 일터에 있었으므로.

 

늦은 밤 관사 근처 해변에서 조깅을 하곤 했다. 한적하고 넓어 달리기에 좋았다. 

파도 소리는 일기에 따라 거칠기도 잔잔하기도 했으나, 결코 멈추는 일이 없었다. 파도는 연이어 몰려왔고 차례로 부서졌다. 하나가 부서지면 이어서 다음 하나가. 음악 하나 찾아 듣는 일 없는 시목이지만,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그 차르륵-소리에선 나름의 편안함을 느꼈다. 그 소리는 깊이와 크기를 알 수 없는 큰 물이 호흡하는 소리였다. 시목이 그 소리에 맞춰 달릴 때, 그의 옆에 넓게 펼쳐진 아득한 바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였다. 안개가 끼면 더더욱 그랬다. 

시목 안에 묻혀 있던 것들 또한 명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불확실한 건 가차 없이 시야에서 걷어내 버렸을 테지만, 이젠 달랐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함께 달렸다. 이를테면 꿈, 이미 죽은 사람들과의 기억, 다른 마음의 징후들과. 

어쩌면 그래서 밤의 바다를 선호했나 보다. 햇빛 쨍한 낮의 바다엔 명료함이 있었다면, 밤의 바다엔 불확실성이 넘실거렸으므로. 그 불확실성의 감각이, 내면의 불분명한 것들과 씨름하는 시목에게 나름의 안정을 선물했다. 묘한 역설이었다. 

 

 

 

 

그는 그저 홀로 조용히 달렸지만, 그곳을 찾는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둘씩 또는 여럿이 왔고, 운동이 목적은 아닌 듯 서로 기대어 앉아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더러는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바다에는 아름다움과 신비가 있다고, 사람들은 동서고금 그렇게 여겨왔다. 시목은 바다 자체보다도 바다를 찾는 사람들의 동기를 알고 싶었다. 이 장소는 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는 걸까.

 

 바다는 빛나는 곳인 동시에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생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생을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바다는 어째서 사람들이 삶을 끝내는 곳이 되곤 할까. 아니, 스스로 삶을 끝낸다는 건 어떤 걸까... 한 번씩 올라오는 자살 사건 조서를 손에 쥘 때마다 시목은 막막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만일 내가 이걸 진작부터 고민했더라면, 그분이 삶의 의지를 버렸음을 읽어냈을까. 그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아냈을까... 

나 자신이 생명에 대한 의지를 돌이켜보는 일 없이 살아왔기에,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몰랐던 걸까. 살고 있으므로 사는 것이었고, 쓰임이 있으니 일하는 것이었다.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람을 알고 싶었고, 사람이 왜 살고 죽는지 알고 싶었다. 

시목의 눈에 비친 고 이창준 검사장은 신념을 버려가면서까지 권력과 명예를 욕망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작부터 생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욕망하는 자는 생존에 충실하다`, 주변 사례들로부터 얻은 그런 귀납적 결론 탓이었다. 복잡한 인간 마음을 그토록 피상적이기 짝이 없는 분류법으로 접근했다니. 그건 분명 무지에 기인한 오만이었다. 

 

영은수를 생각할 때면 뱃속이 콱 조여왔다. 시목은 제 감정이 그토록 흐릴지언정 적어도 한 가지, 죄책감이라는 감정만큼은 선명히 느낀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예상치도 못한 각종 일을 벌였을 때 그는 화 또는 짜증이란 걸 거의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본능적인 방어기제로서 작동한 불쾌감이었다. 왜, 어째서, 영은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 건지 들여다볼 생각을 조금도 안 했는가. 들끓는 마음이 표출될 구멍이 없다면 더더욱 위험하다는 걸 왜 몰랐는가. 

결국, 효율성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의 자기중심적 판단이었다, 난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하고 외면했던 것은. 밀어내면 멀어지겠거니, 그게 더 안전하겠거니, 본인과 제대로 대화 나눠보지도 않고 시목 혼자서만 판단했던 것 또한 철저한 오만이었다.

 

통영에서 시목의 업무 방법은 이전과 달랐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철저히 검증하는 것은 그대로였으나, 전과 달리 사람을 들여다봤다. 범죄자를 심문할 때도, 피해자를 면담할 때에도, 맞은편에 앉은 이의 동기를, 감정을, 각종 욕구를 이해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안갯속을 연방 헤매며 보이지 않는 장애물에 자꾸만 부딪혀 이마를 깨는 것만 같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명료한 성문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려웠다.

 

고 강진섭 부인에게 사과하러 찾아갔던 날, 그는 우는 사람에게 어떠한 공감도 위로도 내놓지 못했다. 하여 그는 제 감정이 그토록 흐릿하다는 것을 자책했다. 그때도 죄책감만큼은 선명했다... 그날 밤 경감님과 옥탑방 평상에 앉아 한참을 대화했다. 시목은 경감님에게 최근의 고민을, 그가 어떤 미궁 속에 있는지를 말했다. 경감님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몰입하여 들었고, 나직하게 응원을 전했다. 인류애일까, 동료애일까, 경감님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응원함을 느낄 때 시목은 문득 먹먹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그 후로 조깅할 때마다 그 하룻저녁의 대화를 되짚어 보곤 했다. 그날 저녁의 특별한 따스함이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를 때면 해변은 춥지 않았다. 메마른 대지에 물을 흠뻑 주는 건 늘 경감님이었다. 흙이 메마른 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내겐 새싹 피어 올릴 씨앗 자체가 없을걸, 하는 그 오랜 자포자기에서, 시목은 이젠 벗어나 보기로 했다. 

이젠 그 어떤 시도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안갯속이라도 눈을 크게 부릅떠 보기로 했다. 한 치 앞이라도 꼼꼼히 살펴보고 하나라도 더 알아가기로, 그렇게 마음먹었다.

  

 

 

 

통영엔 해무가 잦았다. 해무가 심한 철이면 시목은 일기를 유심히 살폈다. 오늘 밤엔 얼마나 짙을까... 첫 번째 겨울을 보내고 나자, 햇무리의 특성과 온도, 습도 등을 조합하여 예측이란 걸 어느 정도 해볼 수 있었다. 그걸 기상청 예보와 맞춰 보는 게 소소한 일상이 되었다. 시야를 온통 메워버리는 막막한 안개 한가운데로 한참 동안 서행하노라면, 깜박이는 비상등 불빛 틈새로, 외면해왔던 외로움을-형체 없는 그 흐릿한 감정을- 덜컥 마주하기도 했다.

 

가끔 외근할 땐 한낮의 바다도 보았다. 안개도 어둠도 걷혀나간 바다의 색채는 강렬했다. 그 짙푸른 빛에 잠시간 눈길이 머무르곤 했다. 과거엔 산이었을 섬들이 크기도 간격도 일정치 않게 점점이 분포해 있었고, 물결은 그 굽이굽이를 매번 천천히 흘러들고 빠져나갔다. 동료들은 한려수도가 그렇게 아름답다며 찬탄을 금치 않았다. 근처 풍경으론 여기가 전국 지검 중에 최고예요! 네, 그렇습니까. 무심히 답하면서도 한 번쯤은 더 돌아보곤 했다.

 

드물게 일찍 퇴근할 때면 노오란 햇무리를, 때론 핏빛 붉은 노을에 집어삼켜진 바다를 보았다. 시목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대신 덤덤한 시선을 짧게 던질 뿐이었으나... 열에 한 번쯤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이미 무르익었던 노을이 스러지는 과정은 보통 삼사 분을 넘기질 않았다.

미감에 기인한 감상에 젖는 건 시목의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역사의 한 자락을 손에 쥐어보곤 했다. `칼의 노래` 도입부의 메타포, 노을에 겹쳐진 무수한 죽음의 이미지를 보았다. 남해엔 역사가 유독 짙게 남아있었다. 책에서 읽는 것과 그 현장에 서는 것은 분명 달랐다. 철마다 지자체에서 여는 한산대첩 축제는 시민들을 위한 유쾌한 퍼레이드로 마무리되었지만, 음악 소리 흥겨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에선 여전히 겹겹이 얼룩진 전쟁의 비극이 읽혔다. 통제공은 담담한 문체로, 처절하게 애썼으나 스러졌던 이들의 시간을 기록했다. 아주 오랜 예전에도 나라가 버린 백성들은 살아남으려 싸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삶을 이어갔으나, 역사는 되풀이되었다.

 

핏빛 노을 속을 무턱대고 걷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바람이 거센 겨울날이었다.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사람이 여덟 명이나 세상을 떠났다. 거제도의 한 조선소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 `위험의 외주화` 사례였다... 원청 대기업은 하도급 업체가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도록 닦달했고, 사고가 나자 빠르게 꼬리를 잘랐다. 다단계 구조의 하도급이었다. 인지수사를 개시한 담당 검사로서 할 수 있는 범위의 모든 조사를 마쳤음에도, 원청 기업을 기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요리조리 빠져나가도록 교묘하게 허용하는 구조가 자리 잡은 건 오래전부터였고, 이번처럼 큰 사고가 있을 때마다 문제가 제기됨에도 매번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은 없었다. 현재의 법에 근거했을 때 시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결코 끝난 게 아님에도 일을 종결해야만 했다. 사건 서류가 담긴 가방이 시목 한쪽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하청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률은 원청노동자에 비해 열 배 이상 높다는 통계를 떠올리다가... 시목은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보호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지금이 예전보다 낫다고, 정도가 덜하다고, 사람들은 많이들 그렇게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어쩌면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 여전히 국가가 구성원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한. 막을 수 있음에도 되풀이되는 사고의 희생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보호 없이 스러졌던 수많은 이들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시목은 두어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무는 저녁의 한기에 섞여 엄습하는 무력감 때문에. 

 

시목은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붉은빛이 절정에 이르렀다 서서히 식어 서늘한 쪽빛에 자리를 내주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전화기를 꺼냈다. 경감님도 마침 옥탑 평상에서 저녁 하늘을 보는 중이셨다. 여기 온통 진짜 붉었어요. 사진에 안 담겨서 눈으로 담았어. 공기가 워낙 맑아서 그럴까, 이젠 보라색이 진짜 예뻐요. 저쪽엔 달 보이네- 시목은 찬 겨울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경감님의 입김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경감님은, `검사님이 웬일로 노을 보고 상념에 빠진대` 하면서도 농담기 하나 없이 그의 말에 귀기울였고, 고민의 한 자락 한 자락을 온전히 이해해주었다. 네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이 특별한 분의 존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사람들이 바다를 함께 찾는 건 이래서일까... 

바다란 곳은 분명 불확실성과 막막함의 감각을 증폭시키지만... 그럼으로써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든든한지 느끼도록 해 주는 걸까. 마치 세상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는 듯한 그 존재를 확인하도록...

 그래서 사람들은 연인과, 가족과 함께 바다를 찾는 걸까.

 

하늘이 쪽빛을 거쳐 짙게 어두워갈 때까지도 두 사람은 통화를 이어갔다. 겨울바람에 온몸이 차게 식어갔음에도 시목은 추운 줄을 몰랐다.

 

경감님과 함께 해안을 걷는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 생각은 어찌해볼 틈도 없이 머릿속 한켠에 자리 잡아서, 그 후로도, 혼자 바다 곁을 걷거나 달릴 때면 이따금 파도 소리 틈새로 불쑥 떠오르곤 했다.

 

 

 

 

 

통영의 바다는 시목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만큼 저항 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서울에서 한 달, 원주 와서 두 달이 흐르는 사이 시목은 바다를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매일 되풀이되던 조수도, 짙은 안개와 파도 소리도 어느새 저 뒤편으로 멀어졌다. 

2년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전보다도 더욱 차가웠으며, 오랜만에 서랍 밖으로 나온 그로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경감님이 가까이-동시에 어쩌면 멀리-계셨다. 서울 와서 처음으로 경감님을 마주했을 때, 시목은 바다에서 머금었던 공허의 남은 자락을 털어버렸다. 비로소 뭍으로 돌아와 단단한 땅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가장 굳건한 육지와도 같은 존재인 분이 미묘하게 달라진 얼굴로 입을 꼬옥 다물었을 때, 전에 없던 표정들을 보였을 때, 겹겹이 두른 고민의 흔적이 읽혔을 때... 시목은 그로선 드물게, 놀랐다. 의아했고, 시간만 있다면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었다. 혼잡한 식당의 와글거림이, 하필 그 순간 불러내는 상사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경감님께도 경감님만의 바다가 필요하지 않을까. 시간에 늘 쫓기시는 중이리란 걸 짐작하면서도, 피차일반이면서도, 경감님이 어떤 형태로든 숨을 돌리셨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시목 본인이 경감님에게 바다나 땅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데도 경감님이 시목의 존재로부터 위로와 온기를 찾았노라 했을 때, 시목은 놀랐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경감님도 바다를 좋아하실 텐데, 그런 생각을 여러 번씩이나 해 놓고서. 원주에 경감님이 불쑥 와주기까지 했는데, 바다에 모셔가봐야겠단 생각조차 못 했다. 늘 효율성을 따지는 인간답게 두 시간 거리면 퍽 멀다고 생각해왔던 탓일까. 둘 다 바쁘니 통화도 길게 이어가지 못하곤 하던 팍팍한 일상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한경감님이 바다 나들이를 먼저 제안해온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는 길 운전하다가 문득 통영 바다가 떠오른 것 또한,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어둡고 깊은 바다 곁을 달리던 순간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념은 밀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되살아났다... 사람을 알고 싶어서, 생의 의지란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던 시간들을 되짚었다. 천천히 걸으며 경감님과 통화하던, 또는 경감님을 떠올렸던 순간들을 돌이켰다.

 

 

 

차는 곧게 뻗은 영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린다. 옆좌석의 경감님은 꽤 한참 전부터 조용하다. 운전하느라 돌아보면 안 되는데, 자꾸 돌아보고 싶어진다...

 

"주무세요?" 

대답으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돌아온다. "아닠ㅋㅋㅋㅋㅋ 네에, 잡니다아-"

 

시목은 피식 미소 짓는다. "언제 깨셨어요?" 

"좀 전에."

 

"하암... 깨고 나선 풍경 보느라 조용했어요. 지금 밖에 풍경이 최고야... 아, 내가 설명해줄게요! 검사님은 운전하느라 제대로 못 보잖아!" 나른하던 목소리에 그라데이션으로 활기가 차오른다. 

"지금 논 색깔이, 진짜 예쁜 초록색이야, 바람이 불어서 논에 막 파도가 쳐요. 평야 주위론 산이 꽤 가팔라. 산맥 근처 아니랄까 봐. 그리고 오늘 하늘은 구름이 되게 특이해요. 저 위에 바람이 쏀지, 쎄하얀 구름이 막 몽글몽글한 덩어리로 흩어지거든요? 저거 뭐랑 비슷한데...아! 양 떼 같아, 양떼!" 

경감님이 즐거워하는 게 전해져서 시목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른다.

 

목적지는 강릉 해안이지만 경감님은 가는 길의 매 순간을 즐기고 있다. 시목은 그런 그녀와 더불어 웃고 있다. 경감님처럼 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가는 길에 얼마가 걸리건 상관이 없겠구나, 오늘 또 새로운 걸 배운다. 

경감님 유쾌한 목소리가 햇살보다 밝다. 시목 마음 한켠에서 진작부터 재생되던 과거의 파도 소리 위로, 지금 이 순간의 경감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난 어떻게 한 번을 못 갔을까. 통영이요." 

경감님은 휴게소 감자를 양 볼 볼록이 담고 생각에 잠긴다. 시목은 그 모습이 자주 쓰시는 이모티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목 막히시겠어요, 시목이 콜라를 내민다. -오, 고마워용.

 

"바쁘셨잖습니까. 네 시간 넘는 게 보통 거린가요."

 "그래도 2년 동안인데."

 

"중간에 두 달은 서울에 지냈죠."

 "맞아, 그러네! 그 후에도 검사님이 서울 들를 적마다 찾아와 줬죠. 아니었음 내가 남해 검사님 어찌 사시나, 반차 내고라도 내려가 봤을걸?"

 

김이 솔솔 오르는 작은 감자가 입 앞에 불쑥 다가와서, 시목은 엉겁결에 그걸 받아먹는다. 뜨겁지만 혀를 데진 않는다. 딱 그 직전 온도다.

 경감님이 본인 콜라를 건네주곤 커피를 가져간다. "바꿔 먹어 봅시다. 휴게소 감자랑은 콜라 아닌가? 아메리카노랑도 어울려요?"

 

 

 

 


 

 

 

 

송림 울창한 작은 언덕을 넘자 일순 짙푸른 바다가 시야를 메운다. 

여진은 작게 탄성을 내지른다. 아득히 멀리까지 그 무엇에도 가로막히지 않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 둘의 눈앞에 있다.

 

시목은 제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본다. 탁 트인 곳을 좋아하는 분. 서울에서도 숨 돌릴 곳을 찾아 옥탑방을,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집을 찾는 분.

 

여진은 크게 팔을 벌려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쉬고 내쉬기를 거듭한다. 어깨를 쭈욱 펴며 수평선을 응시한다.

 

"와아- 가슴이 탁 트여. 진짜로 오자고 해줘서 고마워요." 기쁨에 찬 목소리의 울림이 파도 소리와 섞인다. 

시목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여진을 살핀다. "바다를 정말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바람 소리가 꽤 커서, 시목은 여진 쪽으로 몸을 굽혀 말을 건다. "엄청 좋아하죠!" 여진이 웃는다. 바람이 단발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더없이 환한 미소가 반짝인다.

 

"해변에 와보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음…. 인천 부둣가 말고 이런 데라면…. 한 5년 됐나."

"이렇게 많이 좋아하시는데 여태 전혀 틈이 안 나신 건가요."

"우리 일이 휴가철에 쉴 수 있는 일인가요, 뭐, 이렇게 드물게 오니까 더더욱 소중한 거지."

"앞이 넓게 트인 곳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전에 옥탑도 지금 집도 그래서 고르신 것 아닌가요?"

"어!!! 딱 아시네-! 역시이!"

 

검사님 역시 한잘알이야. -네? 한여진 잘 안다, 뭐 그런 줄임말이에요. 깔깔 웃으며 여진은 바다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시목 소매를 살포시 잡고서. 자아, 가 봅시다!

 

 "검사님은 통영 이후로 첨이시겠네, 바다."

 "네."

 "뭐 남해랑 동해랑 느낌은 달라도, 오랜만이니 좋죠?"

 "네. ...좋네요."

 

...처음으로 경감님과 같이 해변을 걸어서, 그래서 좋습니다.

시목의 속엣말은 스스로 되짚어볼 새도 없이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맨발로 달려보고 싶은 곳이야, 안 그래요? 여진은 신발을 쓱 벗어놓고 백사장을 내달린다. 단발과 헐렁한 반소매 셔츠가 바람에 나부낀다. 경쾌한 발걸음이 백사장에 폭폭 파인 발자국을 남긴다. "발 담가 봅시다아!" 여진이 눈을 빛내며 돌아보자, 그건 생각지도 못했던 시목은 눈을 크게 뜬다.

 

"물이 차다 한들 그때 한강만큼 차겠어요?" 

시목은 살폿 웃으며 답한다. "그러네요. 여긴 냄새도 안 나고요." 시목이 장단을 맞추자 여진이 깔깔 웃는다. "뭐야, 이럴 때 맞장구도 칠 줄 알고! 울 검사님 다 컸어."

 

허리를 굽혀 신발과 양말을 벗어놓고 꼼꼼히 바짓단을 접던 시목은, 여진이 다시 이쪽으로 도도도 달려오자 급하게 허리를 편다. 

"뭐야, 오랜만에 구부정하길래 잔소리하려 했더니!" 여진은 시목 등을 괜히 툭툭 쳐본다.

 "제가요?" 시목은 허리를 한껏 쭉 펴며 시치미를 뗀다. "가시죠." 

 

  

여진이 뛰자, 시목도 속도를 맞추어 가볍게 달린다. 둘은 파도가 오는 방향을 거슬러 물을 마주한다.

 파도가 발목에 꽤 강하게 부딪혀오자, 여진은 간지러워서 깔깔깔 웃는다. 시목은 물결의 감촉이 몹시 생경하여 눈을 크게 뜬다. 커다란 물 덩어리의 호흡과도 같은 파도, 그 박자와 소리에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도 새로울까.

 

  

 

 

 

여진이 문득 모래 틈에서 뭔가를 주워든다. 어!! 조가비다- 동해에 어떻게 이런 게 있지?

 "하긴, 모래를 딴 데서 구해다 부었겠네... 조개야, 넌 어디에서 왔니?" 여진은 조가비를 물에 씻어 표면의 섬세한 무늬를 들여다본다.

 

"검사님! 요거 보면 뭐가 떠올라요?"

 "음... 통영에서, 해변 관리를 담당한 지자체 공무원이 토목공사 업체와 모의해 공금을 횡령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품질관리를 거치지 않은 모래 탓에, 깨진 조개분을 밟은 피서객 다수가 다쳤고요."

 사건 생각부터 하는 게 검사님다워 - 씩 웃으며 여진은 조가비를 시목 손에 쥐여준다. "선물! 앞으로도 시민들 발 다치게 하는 나쁜 놈들 있걸랑 다 잡아넣읍시다!" "네."

 

시목은 작은 패각을 곰곰 들여다본다. 먼 기억 속 해변에서 어린 시목은 조가비가 예뻐서 웃었다. 이제 작은 조가비는 이젠 리베이트 비리 사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때의 것을 되찾을 순 없다. 그리고 그게 아쉽진 않다. 

길다면 긴 그 세월 동안 느낌이란 걸 되찾고 싶어 한 적이 없었으나 - 이제 와서 느끼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어린 시절의 그것을 되찾으려 하기보단 아예 새로이 익혀나가야겠지.

 

 

  

여름 초입이지만 덥진 않은 날이다. 

구름이 일렁일렁 빠르게 형태를 바꾼다. 구름 사이의 햇볕은 따가우나 바닷바람은 열기를 금방 흩어버리고 대신 상쾌함을 준다. 바람은 또한 방문객들의 머리와 옷깃을 온통 헝클어트려 놓는다.

 

두 사람은 물과 뭍의 경계를 천천히 걷는다. 맨방에 감기는 촉촉이 젖은 모래의 감촉을 느끼노라면, 파도의 끝자락이 꽤 거칠게 훅 다가왔다가 물러가곤 한다. 

혹시나 모래 속에 날카로운 것이 있을지도 몰라서, 시목은 경감님이 내딛는 매 걸음의 앞쪽을 눈으로 스캔한다.

 

 

아직 개장 시기가 아니라 사람은 적지만, 없진 않다. 걷다가 마주친 한 유쾌한 커플은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해온다. 여진도 시목도 사건 현장 사진을 찍는 것 외엔 딱히 재능이 없지만, 머리 맞대 의논해가며 최선을 다해본다. 저희도 두 분 찍어 드릴게요, 그들이 제안해오자 여진이 기쁘게 수락한다. 여진이 다정히 팔짱을 끼워올 때 시목은 흠칫 긴장하지만, 몸을 빼진 않는다. 두 사람이 영락없이 커플로 보이리란 걸 시목도 여진도 안다. 그러나 다시 둘만 남았을 때, 둘 중 누구도 그에 관해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여진은 괜히 두어 번 피식 웃고, 시목은 고개만 살짝 갸웃한다.

 

  

갑자기 자잘한 물방울이 떨어진다. 오는 듯 마는 듯 흩뿌리는 여우비다. 우산 사 올까요, 서두르려는 시목을 여진이 제지한다. 에이, 그냥 맞읍시다.

여진은 하늘을 가리킨다. "난 이런 날씨가 너무 좋아요. 쨍하니 맑기만 한 날씨보다 이런 게 더 좋아. 바람도 막 불고, 여우 시집도 가고, 이게 무슨 날씨다 딱 찝어 말할 수도 없고, 이런 거." 

이렇게 밝은데 비가 오는 게 어디 흔해요? 예상치도 못했네, 노래하듯 말하는 경감님이 퍽 들떠 보여서, 이 또한 즐거움으로 여기시는구나, 시목은 그렇게 짐작한다.

 

  

 


  비는 갑자기 시작한 만큼 갑자기 사그라든다. 대신 햇빛이 확 강해진다. 여진은 씩 웃으며 머리칼을 톨톨 턴다. 이 순간이 좋아서 웃음이 난다. 즐겁잖아, 갑자기 달려온 바다, 예기치 못한 여우비.

"어제 원주로 온 거, 즉흥적으로 마음먹은 거예요. 선배님이랑 얘기하다가 와야겠다 마음먹었어. 그리고 오늘 아침엔, 오늘 꼭 바다를 봐야겠다 마음먹었고." 

여진은 문득 갸웃,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황검사를 돌아본다. 

"검사님은 계획 세우고 살아요? 뭐, 어떤 방식으로든...장기든 단기든." 

당신을 잘 알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다.

 

"음... 일처리 시간 안배는 하죠. 일 주 월별로. 장기 계획은 딱히 안 세웁니다. 청사진을 그려놓고 살진 않아요."

"그냥 매번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거네."

 여진은 활짝 웃는다. 꽤 만족스럽다. 나랑 비슷하네. 닮은 점 또 하나 찾았다...

 

"아, 이렇게 한참 웃으니까 여기가 땡겨. 엊저녁에도 그랬는데" 여진이 제 볼을 가리킨다. "난 애기들이랑 놀 때도 그래요- 한참 놀아주다 보면 막 볼이 땡기거든." 여진은 지압하듯 볼을 쓱쓱 문질러보지만, 정말로 즐거워서 깊숙이에서부터 나온 미소라는 건, 볼 근육이 아플 지경인데도 좀처럼 흩어지질 않는다. 와아, 이래 본 게 얼마 만이야, 하는 생각에 여진은 다시 소리 내 웃는다.

  

 


시목 또한 미소를 머금는다. 오늘 지은 여러 번의 미소 중에서도 가장 환한 미소다.

 

...오늘 이런 오후는 그 어떤 계획에도 없었으나, 나는 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 파도 소리와 더불어 바람에 흩날리는 이토록 따스한 음률을.

  

   

"저... 경감님."

 "음?"

 "계획에 없던 얘기 하나, 지금 들려 드려도 될까요."

 

시목은 자기가 철저히 혼자만의 문제라 밀어뒀던 -그러나 경감님께는 어쩌면 언젠가는 알리리라 생각했던- 문제를 꺼내봐야겠다고, 그 순간 그렇게 마음먹는다.

 

  

여진은 눈을 크게 뜨며 시목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아까 조가비 보여주셨을 때 떠오른 것, 하나 더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전 바닷가에 오면 강렬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했죠. 그랬다는 건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느낌은 사라졌습니다. 한참 전에요."

 "...!"

 

"...제 수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아녜요...!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 누구에게든 검사님이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거지. ...난 의도치 않게 알게 돼서 미안했는데."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렇게 아시지 않았더라도요."

"..."

 

 

"...비슷한 시기 같은 병원에서 그 수술을 받은 환자가 두 명 더 있었습니다. 국적도 다르고 연도 없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찾았는지 제 직장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작년 초에요. 음...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더군요."

 "소송이요...?"

 

"병원 측에서 재활에 관한 정보를 고지하지 않았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재활... 여진이 한껏 커진 눈으로 입술을 달싹인다.

 

"남아있는 뇌섬엽 일부가 다른 영역 피질들과 연결되도록 하는 재활치료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수술 직후부터 꾸준히 시도했다면 감정 인식 기능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걸... 작년에 처음 안 거고요?" 여진은 목소리가 떨려서 나오는 걸 느낀다.

 

"네. 병원 측에서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로선 새로운 방식의 수술이라 실험적 측면이 컸는데, 뇌섬엽 제거가 감정 억제로 직결된다는 단정적 결론을 내려놓고 진행했다고 합니다. 감정이 축소된 상태로 안정화되는 걸 기록함으로써 뇌섬엽이 감정인식에 가장 중요한 중추라는 이론에 힘을 실으려고요."

 여진이 말을 잃는다. 눈물 고인 두 눈 가득 분노가 이글거린다. "어떻게…. 사람들 인생을 그렇게. 하아…."

 

시목은 담담하다. "법조계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죠…. 결과를 미리 단정해놓곤 다른 증거를 무시하는 건요."

 "피해는 보통 사람들이 입는 거잖아요. 심지어 무슨 일이 있었는질 알 수도 없었던 거잖아, 20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안 거잖아요." 분노를 머금어 여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목소리엔 먹먹한 떨림이 담긴다. 여진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면서 뜨거워진 눈을 문지른다.

시목은 내내 담담했으나, 여진의 격앙된 표정을 보고는 얼굴에 그늘을 담는다. 이 얘기를 듣고 이렇게 분노하실 줄은 몰랐다….

 

 

 


 

"그래서 소송 참여는요…?"

 "...시간을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검에선 늘 제 쓰임이 있으니, 그걸 조금이라도 방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

 ...황시목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라면 가장 나중으로 미뤄버리는 사람이지. 여진은 가슴이 쿡 쑤시는 걸 느끼며 미간을 조인다.

 

"전…. 제가 배상을 원할 만큼 그들이 저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원하는 걸 줬으니까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으니까, 전 그거면 된 거였으니까요. 수술 후 한동안은 이명 부작용도 없었고, 아무런 감정이 관찰되지 않았으니 그쪽에서 가장 원했던 결과였을 겁니다. 상부상조였죠." 

그전의 삶이 어땠기에, 어떤 고통이었기에, 차라리 모든 느낌을 잊기로 했던 걸까.

  

"...당시에 알았더라면요." 

"수술 직후에 재활 가능성을 알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거부했겠죠. 제 어머니께선 이미 저 때문에 십수년을 고생하셨으니... 또 기약없는 재활치료에 매달리시게 할 순 없었을 겁니다."

  

여진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붉어진 눈만 거듭 문지른다. 말들이 갈피를 잃고 멈춘 사이로 거센 파도 소리만 거듭 파고든다.

 

 

"...검사님 쓰러졌을 때 나한테 설명해준 의사, 그 의사도 몰랐나 봐요…. `감정을 쌓아놓다 보니 한 번씩 이명으로 표출되는 거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고 느끼기가 힘든 거다.` 거기까지만 알려줬어요. 달리 방법이 있다는 걸 의사도 모르던데." 

"아마 그분이 공부할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을 겁니다…. 워낙 희소한 질병이다 보니 마이너 분야겠죠."

 "..." 

"...이십여 년 동안 많은 게 업데이트되었을 겁니다. 그걸 알아보지 않았던 건 접니다."

 "..." 

"뇌섬엽 전체가 아닌 일부 절제였습니다. 전체 절제면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겠죠. 대학 때든 임관 초기든 제가 조금만 관심을 두고 알아봤더라면, 재활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추론 가능했습니다. 적어도 열린 선택지 중 하나였을 겁니다."

 "...사건 해결할 땐 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하면서." 

일할 땐 그렇게 치밀하게 몰두하는 사람이, 본인에 대해선…. 

 

"...그러게요. 이 경우만큼은... 단 한 가지 방향으로만 못 박아두고, 다시 들여다볼 생각도 안 했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겁니다. 결국 제 선택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제가 회피했던 겁니다. 성인이 되고부턴 오롯이 제 책임이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도 의무인데, 제가 그냥 방기해 버린 거죠. 사실 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 동안. ...제가 진작 노력했던들, 전 지금보다 나은 사람일 수 있었겠죠, 직장 사람들한테도, ...경감님께도.."

 

황시목, 이 단단하고도 안쓰러운 남자의 눈에서 자책이 읽힌다. 여진으로선 이미 여러 번 본 눈빛이다.

"아냐, 그게 아니야, 그러지 마요." 먹먹하게 메어 들었음에도 단호한 목소리다. 울 듯 격앙된 표정으로 여진은 힘주어 고개를 흔든다. "또 그렇게 자신을 탓하지 마요."

 

"..." 

"안 그럴 거죠? 응?" 

 황검사는 예의 그 눈빛으로 고요히 눈을 맞춰올 뿐이다.

 

"...미안합니다."

그는 이명의 고통을 겪은 그 날에도 이 표정으로 사과했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그 마알간 얼굴 위로 금방 자책이 덧씌워졌을 때, 여진의 가슴은 세게 욱신거렸었다.

"아 왜애! 왜 맨날 미안해요!!! 왜 매번 본인 탓만 해…."

여진은 결국 큰 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엔 물기가 어린다. 여진은 성큼 다가서서 황검사 양어깨를 붙들고 앞뒤로 흔든다. 몸에 힘을 뺀 그는 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검사님 탓이 아니잖아…. 응?" 여진은 설득하듯 눈을 강하게 맞춘다.

 시목은 입술을 꾸욱 물고 그 시선을 받아낸다. 그의 눈빛엔 모종의 혼란이 묻어난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을 맞물린 끝에 여진은 눈을 꾹 감는다. 파도 소리에 집중하자 눈가의 열기가 천천히 식는다. 여진은 서너 번 깊숙이 호흡하며 숨을 고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나 검사님한테 화낸 거 아녜요, 알죠?" "…. 네." 시목이 작게 끄덕인다.

 

  여진은 떨리는 손을 뻗는다. 천천히 다가간 손이 잠시간 헤매다 시목의 한쪽 뺨을 감싼다. 긴 손가락 끝이 뺨을 천천히 쓸어내릴 때, 시목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검사님은 나름의 선택을 한 거고,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한 거잖아…." 

"그런 셈이죠…." 시목은 나른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답한다. 잠시간의 혼란은 그새 수면 밑으로 묻혔는지, 살포시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일견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진은 다른 한 손도 마저 뻗어 양 뺨을 감싼다. 작은 동물이나 어린아이를 감싸듯 소중하게, 부드럽게. 생각보다 따스하지만 안쓰럽게 까끌한 그 얼굴을, 여진은 이내 느릿하게 토닥이기 시작한다.

 시목은 미동 하나 없이 잠자코 그에 응한다. 여진이 아는 그는 늘 눈을 예리하게 뜨고 주위 정보를 입수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눈을 꼭 감은 이 순간만큼은, 그도 잠시간 생각을 쉬고 그저 위로에 기대고 싶은 것 아닐까. 그래, 한 번씩 이래도 되잖아. 가끔씩은 그냥 이렇게 기대 쉬어도 되잖아. 장해요, 우리 검사님….

 

 여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황검사 단정한 귓바퀴에 입을 가까이 댄다. 속삭이듯 음절들을 불어넣는다. 

"난 있죠…. 난 그 동요 없이 차분한 성정이, 검사님 안에 원래부터 있었다고 믿어요. 어쩌면 아픈 것 때문에 가려졌다가 드러난 건지도 몰라."

 "…." 

"수술이 지금의 검사님을 만들었다, 그렇게만 생각하는 건 아니죠? 검사님은 나름의 선택으로 삶을 꾸려온 거잖아, 그걸 스스로 칭찬해줬으면 해요." 

"…." 

 

"...파스텔 톤이 때론 강렬한 원색보다 더 아름답잖아. 무슨 얘긴지 알아요?" 

"…."

 "전과 후가 같을 순 없었겠지만, 또 다른 종류의 색채로 아름다운 거라고요."

 

"...제가요?" 

"응…. 검사님이."

 

 

 


시목은 눈꺼풀을 천천히 든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맑은 두 눈을 그토록 가까이서 마주했을 때, 시목은 심장이 덜컥한다는 표현이 어떤 감각을 수식하는지를 -어쩌면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슬픈 미소를 짓는다. "근데 있죠, 난... 오롯이 혼자서 감내해야 했을 그 외로움이 보여서, 너무 아파."

 "..." 

시목은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애써 달싹여본다. 여진이 저지한다. 

"후우……. 외로운 줄도 모르고 외롭게 살아온 여기 이 사람이, 내가 우는 거 보고 방금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이 사람이 안타까워." 

"..."

 

"미안하다는 말 금지예요. 오늘 온종일 금지, 알았죠?" 시목의 뺨을 감싼 두 손은 여전히 그 자리다. 황망히 눈을 깜박거리면서도, 시목은 그 손의 주인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 손끝에서 온기와 더불어 엷은 떨림 또한 전해져옴을 깨달았을 때, 그는 깊은 숨을 여러 번 거푸 삼킨다. 숨이 시릴 만큼 목울대가 시큰거린다.

   

 

 

 

 


"검사님."

 "...네."

 

"...그 당시엔 왜 말 안 했어요…? 소송 일 알게 됐을 때." 

"죄송합ㄴ…." 시목은 사과하려다 멈춘다.

 

 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끓어올라 가슴이 저릿한 걸 느낀다. 왜 난 이 외로운 사람을 그 먼 통영에 보내 놓고 그렇게 조금밖에 신경을 못 썼을까. 최애들한테 들일 시간 좀만 덜어서 전화라도 더 할걸….

 검사님에게 사과를 금지해 놓은 탓에, 여진 또한 미안하단 말을 속으로만 삼킨다. 내가 미안해하면 이 사람은 그걸 이유로 더욱 미안해할 걸 알기에.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파도가 금방 그 정적을 메우므로 정적은 공백이 아니다. 해변이라는 장소의 또 다른 장점이다….

 

  

시목이 먼저 입을 연다.

 "처음 수술 얘기 들으셨을 때, 왜 말 안 했느냐고 물으셨죠."

 "...그랬죠." 

"저는, 그게 뭐라구요, 그렇게 답했고요"

 "...그러셨지."

 

"꽤 긴 시간 동안, 전 수술이 그저 별것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제 쓰임을 저해하지 않았으니까, 성문법엔 감정이 필요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전…. 각종 욕심에 휘둘리는 다른 이들을 보며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믿음이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경감님이 그 질문 하셨을 땐... 별것 아니라 답하면서도, 그게 별 게 아닐 수가 없음을 이미 알았습니다."

 

"경감님은 호수에 돌을 던지셨어요." 

"...내가요?"

 "전 경감님과 함께 일하면서, 처음으로 제 결함을 직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지 않으려던 걸 자꾸만 보게 되었습니다."

 

"검사님." 

"...네." 

"결함이라고 하지 마요…. 내가 늘 그랬잖아, 세상 사람 참 다양한 거라고. 정상 비정상 그런 거 없다고."

 

시목은 눈으로 엷게 웃는다. 

"경감님은 제 수술을 아시고도 저를 보통의 사람으로 대해 주셨죠…. 방금 그 말씀도 여러 차례 해 주시고요. 덕분에 제가 한 발짝씩 뗄 수 있었습니다…."

 

  여진이 눈물 고인 눈으로 웃는다. 놀라고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통에 웃음기를 잃었던 여진이다.

  

"전에 그러셨죠, 전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고, 느끼는 방법에 있어 서툴 뿐이라고요. 그땐 그 뜻을 짚지 못했는데…. 18년도에 소송 소식 들었을 때 경감님 말씀이 생각나더라고요. 혜안이셨네요. 그게 팩트이기도 했고요." "...환자 본인의 신념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아예 닫아놓는 것 사이의 차이가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채로 굳어졌던 거구나.   

그 굳었던 생각이 이제야 말랑말랑해진 거구나, 이십 년 넘게 지나서야.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 피질 사이 연결이란 게, 나름 꽤 이루어졌을 거야, 그쵸?" 

"최근 몇 년 동안 그랬을지도요. 전 분명 변했습니다. 제겐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흐릿하긴 해도, 이젠 있으니까요…. 제가 그동안 문을 닫아왔다는 사실을 이젠 직시합니다. 더는 안 그러기로 마음먹었고요. 이십여 년 넘게 묻어놨던 걸, 늦었지만 지금에야 흔들어 보는 셈이네요."

 

"내가 그랬잖아. 검사님은, 변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만큼은 참 굳건하면서도 변할 수 있는 부분은 능동적으로 바꿔나간다고. 그게 참 멋지다고…. 내가 그 증인이죠?"

 

...증인 그 이상이죠. 원인을 주셨고, 동기를 주셨으니. 

"경감님 덕분입니다."

 

"검사님 본인 덕분이지. 진짜 대단해요…. 너무 장해. 우리 검사님, 이젠 다 컸어, 진짜." 

다 컸어, 하는 그 말에 시목은 문득 웃는다. 그래요, 꽤 컸죠, 크는 중이죠.

 

 

 

"저번에 상담을 권하셨죠. 지난주에 첫 내담 갔습니다." 

"!!!" 여진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찬다.

 "두 번째 내담 땐 수술 이력 얘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경감님이 그러셨죠,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요."

 

 

 "...검사님." 

"네." 

"지금, 꽉 안아 봐도 돼요? 너무 대견해서 그래."

"...!!"

 

시목이 천천히 팔을 벌리자 여진이 휙 뛰어든다.  

잠시만 이러고 있읍시다…. 여진은 한동안 안 풀 생각으로 팔을 단단히 감는다. 눈을 꼬옥 감고 황검사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어쩐지 친숙한 그 부드러운 체향을 들이마신다. 여진의 뺨과 맞닿은 얇은 여름 남방은 남아있던 눈물을 빠르게 흡수한다.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어쩌면 안개는 영영 걷히지 않겠지만…. 시목은 그 속에서 자신을 붙들어주는 단단한 존재를 느낀다. 그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할 때 문득 새로운 감정을 깨닫는다.

시목이 처음으로 자각한 선명한 감정은 죄책감이라면, 두 번째는 아마 지금 이 감정일 듯하다. 벅차다는 감정. 이름을 제대로 붙였는지 확신은 없다. 이 감정의 증상을 정리해보면…. 목울대가 시큰거리고, 눈이 조금 뜨겁고. 가슴 언저리가 조금 아프다. 그러나 죄책감과는 확연히 다르다: 뒤편으로 끌어당기는 감각이 아닌, 어떠한 고양의 감각이므로. 사람들이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동반하므로.

 

...나 또한 경감님께, 안갯속에서 붙잡고 싶은 그런 존재일 수 있을까. 내가 감히 그걸 목표 삼아 보아도 될까.

 

 시목의 변화는 줄곧 결함에 대한 자각에서 동력을 얻어 왔으나, 이젠 그의 성장기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때인지도 모른다. 그가 비로소 깨달았으므로, 느끼는 법을 배우려는 동기의 근원도 그 변화의 지향점도 모두 이 빛나는 분임을. 

시목의 두 손은 이번엔 갈 곳을 찾는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살포시 경감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러자 경감님이 팔에 힘을 더해와서, 시목은 다시금 눈을 꾸욱 감는다.

 

 

 

 

<Chamomile 3화 끝>


비밀의 숲 2 OST part.3 '바람(Wish)' 

 

오늘 밤은 유독 어두운 것 같아 

이런 날엔 비가 내릴 것 같아 어둠 위로

지쳐가는 맘과 쓰러져 가는 날 놓아주고 싶어

오늘만큼은 나 바다 깊숙한 곳에 가라앉고 싶어

 

오늘 밤은 유독 찬 바람 부네 

이런 날엔 뭔 일이 날 것 같아 내 등 뒤로

이 넓은 세상과 동떨어졌어 난 겉잡을 수 없이 

오늘만큼은 나 저 푸른 하늘 위로 올라가고 싶어

 

 Oh Please 이 어둠에서 날 꺼내줘  

나도 너와 웃고 싶어 너와 살아가고 싶어 매일 그렇게 

Oh please 이 절벽에서 날 잡아줘  

나는 정말 웃고 싶어 너와 걸어가고 싶어 그게 어디든